춘추시대 제나라에 '역아'라는 희대의 간신배가 있었다. 자기 자식을 죽여 임금의 식탐을 달랬고 그 공으로 최고의 권세를 누렸다. 그리고 패권을 자랑하던 임금 환공은 혼군이 돼 망국의 길을 향했다.
지난 13일 국가인권위원회는 전대미문의 결정을 내어놓았다. 대통령 윤석열 등의 탄핵심판을 맡은 헌법재판소에게는 "형사소송에 준하는 엄격한 증거 조사 등 적법절차의 원칙을 준수"할 것을, 법원에는 불구속수사의 원칙을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 비상계엄을 선포한 대통령의 조치에는 침묵으로 일관하던 인권위가 느닷없이 그 친위쿠데타에 인권의 논리를 가져다 붙이며 헌재와 법원을 압박하고 나섰다.
기어코 인권을 상납해 버렸다.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패악의 권력을 옹호하고, 그 결과 인권을 공허한 말장난으로 돌려버렸다. 권력에 맞서 인권을 수호해야 할 인권위가 되레 인권을 팔아 권력을 추종하고 나라를 퇴행의 길로 내몰았다. 중국사에서 최악의 간신배가 저질렀던 그 패륜의 망동을 21세기 이 나라의 국가인권위가 그대로 반복했다. 자신의 존재이유여야 했던 인권을 국가폭력의 수단으로 내팽개친 것이다.
인권은 누구나 누릴 수 있어야 하며 어디서든 보호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번 사안은 해당 사항이 아니다. 적법절차의 권리에 빗대 '피청구인 대통령의 방어권'이라 언급되는 권리들은 탄핵심판의 과정에서 각종의 규정들에 의해 마련되는 절차상 권리일 뿐이다. 그러기에 인권위가 헌법재판소에 이리저리 권고할 수 있는 대상 자체가 되지 못한다.
탄핵심판은 일반 형사재판과 성격이 판연하게 다르다. 한 사람의 행위를 다투는 형사재판과는 달리 탄핵심판은 공무원의 직무수행과정이나 그 결과를 다툰다. 윤석열이라는 사람이 어떤 짓을 했는가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라는 국가기관이 수행한 직무가 헌법이나 법률에 따라 이루어졌는지의 여부를 심판한다. 그래서 헌법도 그냥 '헌법이나 법률을 위반한 사람'이 아니라 "그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공무원을 심판하게 한 것이다.
이 때문에 탄핵심판대에 선 피청구인인 대통령(윤석열)에게는 인권으로서의 적법절차의 권리를 강조할 여지가 없어진다. 원칙적으로 국가기관은 인권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적법절차의 권리는 국민의 것이지 국가기관인 대통령이 주장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헌법재판소가 대통령의 탄핵심판이 있을 때마다 국회의 탄핵소추절차에 대해 대통령이 적법절차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이를 증명한다. 이런 논법은 헌재에서의 탄핵심판에도 여전히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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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의 의견 표명이 월권인 것은 이 때문이다. 국가기관은 통상 인권의 반대편에서 인권을 제한하거나 침해하는 권력의 주체다. 사람을 잡아가고 재산을 약탈하며 주거지를 침탈하던 바로 그 권력에 맞서 인권이라는 관념들이 만들어졌다. 이에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법으로써 국가권력을 통제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권력의 정점에 대통령이라는 국가기관이 자리한다. 여기에 인권을 갖다 붙일 여지는 없다. 국가인권위의 이런 반역사적 억지를 가능케 하는 인권의 문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미국의 탄핵제도에 빗대 적법절차의 권리 운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반역, 수뢰, 기타 중범죄 또는 경범죄(treason, bribery, or other high crimes and misdemeanors)를 저지른 행위를 탄핵대상으로 삼는다. 과거 빌 클린턴 대통령의 "부적절한" 행위가 그대로 탄핵심판의 대상이 되었듯, 개인의 행위 그 자체가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처벌의 성격이 강한 미국의 탄핵심판에서는 개인의 권리로서 적법절차의 권리가 언급될 수 있다.(그 조차도 형사절차에 비해 매우 느슨하게 적용된다) 행위가 아니라 그의 "직무집행"이라는 공적 활동을 탄핵의 사유로 삼아 직무집행의 불법성을 교정하고자 하는 우리의 경우와는 판이 다르다.
설령 미국의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형사소송에 준하는 엄격한 증거조사 실시"를 요구한 국가인권위의 의견은 틀렸다. 미국의 경우 적법절차의 권리는 그런 수준의 증거조사가 아니라 절차의 공정성을 담보하는 수준에서 그친다. 피청구인이 심판절차 내내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청구인측과 대등한 수준에서 자신에 유리한 증인이나 증거를 제출하고 진술할 수 있는 동기회를 가졌고, 청구인측 증인에 대해 반대심문을 할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 적법절차의 권리는 충족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헌재는 이 미국의 기준조차도 한 치의 벗어남이 없었다.
국가인권위가 검찰의 피의자신문조서("피신조서") 운운한 부분도 억지에 가깝다. 형사소송법이 개정되어 피고인의 동의 없는 피신조서는 형사재판의 증거로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피고인 자신이 한 피신조서가 대상이다(그는 묵비권으로 일관하였기 때문에 피신조서라고 할 만한지도 의문이다). 더구나 탄핵심판은 형사재판이 아니다. 이 부분은 헌재가 심판의 필요에 따라 적절히 판단해서 결정할, 헌재의 고유권한 대상이다. 거기에 국가인권위가 "인권"의 이름을 대며 헌재를 압박할 일은 전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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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는 인권위의 후안무치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대통령은 비상계엄이라는 형식을 빌린 친위쿠데타를 자행했다. 1952년 한국전쟁 와중에 재집권을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의원을 감금하며 개헌을 강제한 부산정치파동을 야기한 전례가 그대로 반복된 것이다. 모든 문제를 국회의 탓으로 돌리며 총칼로써 국민을 겁박한 5.17 신군부의 친위쿠데타 또한 그대로 반복됐다.
계엄법도 없던 1948년 여순사건에서 계엄이 선포된 이래 제주 4.3, 한국전쟁 등에서 수시로 선포됐던 계엄은 민간인 등 수많은 생명과 신체를 유린한 피와 눈물의 사건이었다. 5.16 군사정변을 비롯한 군사정권들이 자행한 계엄은 우리 모두의 자유와 권리를 약탈해 버린 폭력정치의 근원이었다.
그런 계엄을 대통령 윤석열이 선포했다. 포고령 제1호는 억압정치의 극단을 달렸던 5.17의 판박이였다. 대통령 윤석열과 그 일당들은 언론출판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정치활동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폭력과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노동기본권, 직업선택의 자유 등 우리가 어렵사리 지켜오고 키워왔던 그 인권의 핵심항목들을 이 포고령으로써 송두리째 부정해 버렸다.
이 상황에서 무엇보다 앞서 움직여야 했던 기구가 인권위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 생명과 안전이 목전에서 위협받고 있을 때 인권위는 누구보다 먼저 소매 걷어붙이고 국가폭력에 단호히 맞섰어야 했다. 국민의 편에 서서 인권을 향한 절박한 아우성을 온전히 받들어내어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권위의 존재 이유다.
하지만 인권위는 이 점에서 현저히 비겁했다. 아니, 권력의 편에서 서서 국민에게 등을 돌리고 침묵으로 일관하며 아예 내부적인 논의조차도 거부하다 급기야 작금의 의견표명으로 나아갔다.
인권위의 이런 행태는 단순한 직무유기나 월권의 일탈에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대통령 윤석열의 인권침해행위를 노골적으로 옹호하고 조장하는 또 다른 내란, 내란 옹호의 한 몫을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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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위는 대통령 등의 "인권"을 보호해야 할 이유라면서 대통령측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 인용한다. 아울러 그 계엄선포는 통치행위이기 때문에 사법권의 판단대상이 아니라는 권위주의 시대의 반법치적, 반인권적 통념까지도 반복한다.
심지어 대통령 측의 대리인들이 대통령의 방어권 운운하는 억지 논리를 들이대면서 헌재의 탄핵심판에 불복하는 일부 정파와 그 지지자들을 선동했던 주장까지도 그대로 결정에 담아냈다. 국가인권위의 이 결정문이 탄핵심판에서 대통령측의 최후진술서와 그대로 중첩되고 있는 기이한 현상을 우리는 21세기 이 민주화의 시대에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의 조치가 문제적인 것은 이 지점에서이다. 그것은 대통령의 인권침해를 정당화하고 억압적, 폭력적 통치의 방식을 재생산하도록 부추긴다. 결정문에 의하면 권력분립상 당연히 인정되는 야당의 국정통제라 할지라도 이를 빌미로 대통령은 언제든지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임시입법기구를 만들고 자기 마음대로 입법할 수 있게 된다.
이 의견 표명에 따르면 대통령이 무슨 이유를 갖다 붙이든 포고령를 선포해 국민의 인권을 제약하고 자신의 권력을 최대화할 수 있게 된다. 비상계엄의 상례화, 폭력통치의 구조화 나아가 인권침해의 일상화는 이렇게 국가인권위로부터 시작돼 대통령의 권력으로 자리잡게 된다.
역아의 요리를 탐닉한 제 환공은 역아에 의해 굶어 죽는다. 인권을 무도한 권력으로 만들어 상납한 국가인권위원장 안창호, 인권위원 김용원, 이충상, 한석훈, 강정혜는 이제 누구를 굶겨 죽이게 될까?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지만, 이 상납으로 초래된 국가인권위의 비극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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