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럭비공'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행보가 거침이 없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단계적 휴전에 도달한 데에는 트럼프 행정부의 막후 영향력 행사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환호가 채 가시기도 전에 가자 지구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드러내 국제사회의 공분을 사고 있다.
또 최근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결을 향한 외교에 박차를 가하면서 국제사회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 와중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주된 원인이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 시도에 있었다고 말해 서방 세계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다.
핵무기와 국방비 문제 역시 예외가 아니다. 트럼프는 1월 하순 세계경제포럼(WEF) 화상연설에서 "우리는 비핵화를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은데, 나는 그것이 매우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며 세계 3대 핵보유국들인 미국·러시아·중국이 핵군축 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연설 나흘 후에는 '미국을 위한 아이언 돔'을 추진하라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특정 국가를 거론하지 않았지만 "경쟁자"와 "불량국가"의 탄도미사일과 극초음속 미사일 등이 미국이 직면한 최대 위협이라고 주장하면서 미국 본토와 해외 주둔 미군 및 동맹국을 방어할 수 있는 차세대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 방안을 마련해 60일 이내에 자신에게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트럼프는 2월 중순에도 깜짝 놀랄 만한 발언을 내놨다. "내가 원하는 첫 만남 중의 하나는 중국의 시진핑 주석,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과 만남이다"며 "나는 '우리 군사예산을 절반으로 줄이자'라고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는 서로를 겨냥해 돈을 쓰고 있는데, 우리 사이가 좋아지면 그런 돈을 더 좋은 목적에 쓸 수 있다"며, "나는 그런 것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중동 및 러-우 전쟁에 대한 트럼프의 접근은 물론이고 핵무기 및 국방비에 관한 그의 행보 역시 현기증을 유발할 정도로 혼란스럽고 그래서 논쟁적이다.
우선 미·중·러 핵군축 협상 제안은 핵 군비경쟁이 첨예해지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에 '신선함'을 주고 있다. 하지만 그가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의 '스타워즈'를 방불케 하는 MD 구축 검토를 지시한 것은 '식상함'을 떠올리게 한다. 과거의 사례나 오늘날 강대국들의 입장을 고려할 때 강력한 MD 구축과 핵군축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국방비에 대한 트럼프의 접근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이다. 그는 한국, 일본, 대만, 나토 등 동맹을 상대로는 대폭적인 국방비 인상을 압박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들 나라의 국방비가 '다다익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중·러를 상대로는 미국과 함께 절반으로 줄이자고 한다. 국방비를 줄여 좋은 목적에 쓰자며 '소소익선'을 강조한다.
트럼프의 본심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화법이 기존 미국의 외교안보 문법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핵무기 없는 세계'를 주창해 노벨평화상을 '선불'로 받았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임기 후반에 1조 2천억 달러에 달하는 핵무기 현대화를 승인해 빈축을 산 바 있다.
조 바이든 행정부 역시 국가안보에서 핵무기 의존도를 낮추겠다고 했다가 임기 후반에는 핵무기의 양적·질적 증강을 추진하려고 했었다. 북·중·러의 핵무기 증강을 이유로 삼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미국은 물론이고 국제사회에서도 자취를 감춰온 핵군축 논의를 주된 화두로 던지고 있다.
국방비 역시 마찬가지이다. 미소 냉전 종식 이후 아버지 부시 행정부와 클린턴 행정부 시기에 줄어들었던 미국의 국방비는 아들 부시 행정부 이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왔다. 1990년대 중반에 3000억 달러 수준이었는데 오늘날에는 1조 달러에 육박할 정도이다. 그만큼 국방비 인상은 미국 내에서 초당적 합의가 강했던 영역이다.
그런데 군산복합체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고 연방 정부 효율성을 강조해온 트럼프 행정부가 금기를 건들고 있다. 또 중·러를 상대로 핵무기와 같은 특정 무기뿐만 아니라 국방비도 군축 협상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것도 대단히 이례적이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에는 기존 미국 주류에 대한 반감, 동맹을 호구로 바라보는 관점, 김정은·시진핑·푸틴 등 이른바 '스트롱맨'들과 거래하고 싶은 유혹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노벨평화상을 향한 트럼프의 변함없는 욕심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핵무기부터 국방비까지 아우르는 군축을 화두로 던진 트럼프의 발제에 우리 역시 토론을 준비해야 한다. 미국은 유일한 동맹국이고 트럼프가 군축 협상의 대상으로 여기는 북중러와의 관계는 1990년대 이래 최악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토론을 잘 하려면 질문을 잘 던져야 한다. 가령 이런 것이다. 한국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주한미군·한미연합훈련·미국 전략자산 전개 등은 트럼프의 군축 기조와 어울릴 수 있을까? 트럼프는 세계 비핵화 진전을 이뤄내야 한다고 하는데, 이런 트럼프를 상대로 한국의 자체 핵무장론이 먹혀들 수 있을까? 트럼프가 말한 군축을 한미동맹 변화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재개의 기회로 삼을 수는 없을까?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