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대 넘어온 노숙인복지
1997년 말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노숙인이 우리사회의 주요 이슈로 떠오른 뒤 한 세대가 지나갔다. 그간 노숙인복지 영역에서는 무슨 일들이 있었을까.
국가부도 사태 당시 안정적인 사회생활을 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갑작스런 실직과 부도 등으로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한순간에 '실직 노숙자'가 되었다. '부랑인'만 있고 '노숙인'이라는 용어조차 없던 때였다. 1998년 중앙정부와 종교·시민단체는 빠르고 긴밀하게 대응하였고 십여 년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거처할 곳을 잃고 해마다 거리로 나오는 사람들이 거리에서, 시설에서, 비적정 주거지에서 도시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왜 집에서 나왔으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일까. 돌아갈 집이 없기 때문이다. 갈 곳이 없으니 생존을 위해 여러 자원이 있는 거리로 나오고 시설로 들어가고 임대비용이 적게 드는 비적정 주거에서 버티며 살아가고 있다. 노숙 상태에서는 몸도 마음도 정신건강도 쇠약해져 누구나 일상적인 생활이 어렵다. 노숙 상황의 늪에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든 건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숙 상황에 떨어지지 않게 예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2005년 노숙인시설의 일부가 지자체로 이양되면서 노숙인복지사업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로 이원화되었다. 2011년 노숙인 등 보호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이 만들어져 대상이 통합되었고 모법 체계가 갖추어져 노숙인 등도 비로소 법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2022년 보건복지부에서 관할하던 재활·요양시설까지 지방이양화되면서 노숙인복지 행정사무는 각 지방정부에서 도맡게 되었다. 노숙인복지사업이 각 지자체의 사무가 되면서 지자체 상황이나 지자체장의 의지에 따라 노숙인복지사업의 비중은 제각각이고 지역간 편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현장 변화에 뒤쳐진 노숙인법 보완해야
노숙인법은 2011년도 제정된 뒤 현재까지 특별한 개정이나 보완된 것이 거의 없다. 시대가 바뀌었고 복지체계도 변화·발전하였지만 시대상황에 따른 모법의 보완이나 개정이 뒤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노숙인법이 만들어진 초창기에는 노숙인에 대한 보호망이 되었다. 지금은 오히려 노숙인복지 현장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는 모양새다. 따라서 지금까지 변화된 상황을 반영하여 노숙인법을 시급하게 보완·개정하여야 한다. 모법 개정이 어렵다면 시행령이나 시행규칙에라도 담아야 한다. 각 지자체는 조례를 제정하여 실행력을 뒷받침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노숙인복지사업이 한 단계 더 나아가기는 까마득할 것이다.
노숙인법에 담을 한두 가지 사례로, 먼저 정신질환이나 알코올 의존증이 있는 노숙인의 지역사회 정착지원을 위한 지원주택사업을 들 수 있다. 서울시는 2016년 지원주택시범사업 운영지원계획을 수립했다. 서울시의회에서 2018년에 서울시 지원주택 조례를 제정해 제도적 틀을 갖췄다. 2019년~2023년 5년동안 249호를 지원했고 6개 운영기관 45명의 코디네이터가 참여해 220명의 노숙인이 입주했다. 열악한 거리환경과 공동시설에서 생활하던 노숙인들이 복약관리 등 집중적인 사례관리와 독립주거를 제공받으며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추진한 노숙인정책 중 가장 으뜸이다. 2023년도에만 서울시 예산은 21억여원이 집행되었다. 만성 노숙인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노숙인복지 정책을 한 단계 높인 뒷배에는 지자체의 지속적이고도 통 큰 지원이 큰 몫을 했다.
서울시의 지원주택 사례는 대구시, 경기도로 이어져 조례가 만들어졌지만 경기도에서는 여러 사정때문에 아직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만성 노숙인은 전국 어디에나 있으나 다른 지자체에서의 추진은 아득하기만 하다. 지원주택사업 모범사례가 전국적으로 신속하게 추진되기 위해서는 지원주택사업을 노숙인법 및 시행령에 담아 법적 근거를 갖추어야 한다. 각 지방의회에서도 지자체들이 지원주택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지원주택 조례를 서둘러 제정해야 한다.
두 번째로 비적정 주거 노숙인을 폭넓게 적용해야 한다. 노숙인법에서 노숙인은 거리 노숙인, 시설 노숙인 비적정 주거 노숙인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비적정 주거 노숙인은 쪽방 상담소가 설치된 특정 지역의 쪽방 거주자만을 대상 범위로 제한하고 있다. 피시방, 만화방, 찜질방, 다방 등 비숙박용 다중이용업소 거주자, 고시원이나 여관·여인숙의 장기거주자, 산재지역 쪽방이나 비닐하우스 거주자 들은 대부분 빠져있다. 이들에 대한 정확한 조사나 통계조차도 뚜렷하지 않다. 정부부처에서는 노숙을 미연에 방지하고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비적정 주거지에서 생활하는 4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노숙인법 및 시행령에 적용할 때가 되었다.
3차 노숙인복지종합계획 수립을 앞두고
보건복지부는 노숙인법 제정 이후 5년마다 노숙인복지 종합계획을 세우고 있다. 1차(2016년~2020년)에 이어 2차(2021~2025년) 5개년 종합계획이 진행되고 있으며, 올해는 2차 종합계획의 마지막 해다. 내년에는 3차 종합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2차 종합계획에는 다섯 가지의 방향과 추진계획이 담겨있다. 거리현장지원, 의료보건지원, 주거지원, 복지서비스지원, 인프라 구축이 그것이다. 보건복지부는 해마다 각 지자체들로부터 종합계획 성과와 실적을 취합하고 있지만 그 내용이 현장에 공유된 적은 없다. 종합계획이 얼마나 어떻게 추진되고 있는지 현장에서는 잘 알 수가 없어 어림잡아 헤아릴 뿐이다. 노숙인복지 문제에 관해서 중앙정부는 지자체에게 역할을, 지자체는 중앙정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핑퐁게임을 계속하고 있다. 노숙복지현장과 행정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노숙인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협치는 멀다. 노숙인복지현장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도 잘 담기지도 않는다. 2차 종합 계획의 마지막 해인 올해 5대 추진 과제와 연차별 실행 계획, 특히 예산이 제대로 반영되고 집행되었는지 사뭇 궁금하다. 2차 종합 계획을 제대로 평가하고 3차 종합계획에는 실질적이면서 보다 진전된 종합 계획이 담겨야 한다. 노숙복지 현장의 목소리가 오롯이 반영되어야 한다.
지역격차 해소할 중앙조직 구성해야
2차 종합 계획에도 들어있지만 아무리 좋은 계획도 실행할 주체가 없으면 뜻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 종합 계획이 제대로 실현되고 노숙인문제를 뚜렷하게 풀어내기 위해서는 실행주체 구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노숙인 문제는 단지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가지 복합적인 문제가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세대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다. 노숙을 경험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예방 정책이 앞서 작동되어야 한다.
노숙에 빠지면 최대한 빨리 노숙 상황을 벗어날 수 있도록 즉시 개입하여야 한다. 노숙을 벗어난 사람들이 재노숙하지 않도록 사후관리도 계속 지원하여야 한다. 이는 한두 지자체만의 노력을 넘어서서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통일되게 진행되어야 실질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러한 것이 제대로 작동되려면 주무부서인 보건복지부만으로는 힘에 부친다. 이미 20여년의 시간 속에서 그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하여 이를 실행할 총괄조직이 만들어져야 한다. 지자체끼리 분절되고 파편화되어 제각각인 노숙인복지 환경에서는 지역간 차이만 커지고 지역 노숙인들의 배제만 더욱 심화될 게 뻔하다. 노숙인의 삶이 지역에 따라 차별화되고 악화되어서는 안 된다.
노숙인의 특성과 노숙의 원인을 살펴볼 때,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 뿐만아니라 다른 부처도 적극 참여하여 노숙인 문제에 공동대응하는 시스템을 지금이라도 갖추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노숙인복지중앙위원회를 총리실 산하 등 중앙정부 차원에서 만들어야 한다. 보건복지부 외에 국토해양부, 고용노동부, 기획재정부, 여성가족부, 행정안전부 등 각 부처가 협의하고 협력하는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각 부처의 업무역할을 명확히 하여 각자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도록 강제하여야 한다. 이는 제2차 종합계획의 핵심내용이기도 하다.
아울러 이를 실행할 실행주체도 만들어야 한다. '(가칭)노숙인중앙지원센터'를 신설하여 각 지자체에 흩어져있는 노숙인 시설의 정보와 자료, 역량을 한데 모아서 전국단위의 단일한 대응이 가능하도록 하여야 한다. 노숙인복지를 위한 소통, 연대, 교육, 정책 및 프로그램 개발 들을 주도하여야 한다. 중앙단위에서 통일된 정책업무를 수행하여 노숙인문제에 대응하도록 하여야 한다. 이 단위에 전국의 노숙인 협회들도 적극 참여하여 문제를 함께 풀어가야 한다.
노숙자가 아니라 노숙인이다
노숙인이 사회 이슈로 떠오른 지 27년의 세월이 흘렀다. 노숙인복지 초기에 가장 힘들었던 것 가운데 하나는 시민들의 따가운 시선이었다. '노숙인은 게으르다' '노숙인들은 사지가 멀쩡한데 일을 하지 않는다' '노숙인들은 술주정뱅이다' '노숙인들은 폭력적이다' 등 노숙인에 대한 시민들의 선입견과 편견이 노숙인과 노숙인복지 관계자들을 매우 힘들게 했다. 노숙인복지 일을 하는 것도 힘들지만 시민들의 따가운 시선은 2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낙인처럼 남아있다.
대표적인 것이 언론방송에서 보도하는 노숙인에 대한 내용이다. 과거에 비해 술 마시거나 폭력적이거나 하는 등의 부정적인 장면은 덜해졌다. 하지만 노숙인은 무섭고 피해야 하고 사회적으로 격리시켜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아직도 케케묵다. 특히 시민들에게 끼칠 영향이 큰 언론방송에서 '노숙인'보다는 관행적으로 사용해왔던 '노숙자'란 표현을 더 자주 사용한다. 법에서 '노숙인'으로 정한 것은 노숙하는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감을 담고 있다. '노숙자'라고 표현하는 것은 노숙하는 사람을 낮추어 부르고 못난 놈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이는 결코 사소하게 지나칠 일이 아니다. 사람을 사람으로서 대우하지 않고 우리사회에서 치워야 할 무언가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언론방송에서부터 앞장서서 노숙인이라는 공식용어를 써야 한다. 노숙인에 대한 인식개선은 노숙인 당사자나 노숙인시설 종사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언론방송과 시민들이 적극 나서야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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