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가자지구 소유 및 개발 주장 후폭풍이 거세다. 가자지구 주민 이주 주장에 대해 "인종 청소"라는 국제사회의 비판이 쇄도하는 가운데 백악관이 일부 발언 축소를 시도하는 등 계획되지 않은 발언이었다는 정황도 상당하다. 실현 가능성을 떠나 발표 자체로 가자지구 휴전 연장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UN) 사무총장은 5일(이하 현지시간)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가자지구 해결책을 찾는 과정에서 문제를 악화시켜선 안 된다"며 "국제법의 토대에 충실해야 한다. 어떠한 형태의 인종 청소도 피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어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의 땅에서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며 2국가 해법 지지를 밝혔다.
유럽 국가들의 반발도 이어졌다. 안날레나 베어보크 독일 외교장관은 5일 성명을 내 "가자지구가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과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인에 속해 있다는 점은 명확하다. 이는 미래 팔레스타인 국가의 기반"이라며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가자지구에서 이주시키는 것은 용납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국제법에 위배된다"고 비판했다. 이어 "모든 노력은 (가자지구) 휴전 협정의 두 번째 단계를 이행하는 데 집중돼야 한다"고 환기했다.
프랑스 외교부는 5일 성명을 통해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인구 강제 이주에 대한 반대를 재강조한다"며 "이는 심각한 국제법 위반이자 팔레스타인들의 정당한 열망에 대한 공격일 뿐 아니라 2국가 해법의 큰 장애물"이라며 "우리의 긴밀한 파트너인 이집트와 요르단은 물론 이 지역 전체를 불안정하게 하는 주요 요인"이라고 비판했다.
린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5일 정례 브리핑에서 "중국은 '팔레스타인인이 팔레스타인을 통치한다'는 것이 분쟁 이후 가자지구 통치의 기본 원칙이라고 믿어 왔다"며 "가자지구 주민 강제 이주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가자지구 주민 이주 장소로 지목한 요르단, 이집트 등 아랍국들도 재차 반발했다. 요르단 왕실은 5일 국왕 압둘라 2세가 구테흐스 사무총장과 통화해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을 이주시키거나 그곳을 합병하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한다고 재강조했다고 밝혔다. 압둘라 2세는 이스라엘 정착촌 활동을 중단하기 위한 국제적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이집트 외교부는 5일 바드르 압델라티 외교장관이 모하메드 무스타파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총리 겸 외교장관과 만나 팔레스타인 주민이 가자지구를 떠나지 않은 상태로 가자지구가 재건될 필요성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사우디아라비아도 5일 성명을 통해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 없이는 이스라엘과 수교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백악관 등이 전날 트럼프 대통령 주장을 완화하려 시도하는 등 계획되지 않은 발표였음을 의심하게 하는 정황도 이어졌다.
5일 캐롤라인 리빗 백악관 대변인은 언론 브리핑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가자지구 주민들이 "일시적으로" 가자지구 밖으로 이주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전날 가자지구 주민 이주에 대해 "우리가 주민을 영구적으로 재정착시킬 아름다운 지역을 얻을 수 있다면"이라고 언급한 트럼프 대통령 발언과 상반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날 가자지구에 대한 "장기적 소유권"을 가지고 "접수"해 "개발"해 "중동의 리비에라(해안 명승지)"로 만들겠다고 밝혔지만 리빗 대변인은 "미국 납세자가 이 노력에 자금을 지원한다는 의미는 아니다"라며 "최고의 협상가인 도널드 트럼프가 이 지역 파트너들과 협상을 타결할 것이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영국 BBC 방송은 이날 브리핑에서 리빗 대변인에 트럼프 대통령의 가자지구 주민 이주 주장 속 가자지구에 남길 원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은 머물 수 있냐고 물었지만 리빗 대변인이 "일시적" 이주만 주장할 뿐 대답을 회피해 팔레스타인인 강제 이주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하는 데 실패했다고 덧붙였다.
마르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도 5일 과테말라 방문 중 가진 기자회견에서 가자지구 주민의 "영구적" 이주를 부인하려 했다. 그는 "재건이 이뤄지는 동안 임시로 (가자지구) 주민들은 어딘가에서 살아야 한다"고 트럼프 대통령 발언을 축소했다.
다만 5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만난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은 취재진에 가자지구에 미군을 파견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냐는 질문을 받고 "우리 동맹 및 파트너들과 외교적, 군사적으로 모든 옵션을 함께 작업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두 사람의 대화에 정통한 두 소식통을 인용, 4일 트럼프 대통령이 네타냐후 총리에게 공동기자회견을 위해 걸어 나가기 직전 가자지구 소유에 대한 생각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해 네타냐후 총리를 놀라게 했다고 전했다. 신문은 해당 논의에 정통한 네 명의 소식통들이 트럼프 정부가 가자지구 소유에 대한 실현 가능성을 검토하는 가장 기본적인 계획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을 설명했다고 보도했다. 국무부나 국방부와의 회의도 없었고 실무 그룹도 없었으며 필요한 병력과 비용 추정치도 제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문은 트럼프 대통령이 사적으로는 지난 몇 주간 가자지구 소유에 대해 이야기 해 왔지만, 지난주 가자지구를 방문한 중동 특사 스티브 윗코프가 이 지역의 끔찍한 상황에 대해 설명한 뒤 이 생각이 가속화됐다고 두 소식통을 인용해 설명했다고 덧붙였다.
미 CNN 방송은 루비오 장관조차 이 구상을 4일 트럼프 대통령과 네타냐후 총리의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처음 접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가자지구 "접수"와 팔레스타인인 강제 이주의 실현 가능성과는 별개로 이 구상을 던진 것 자체로 중동에 파란이 일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BBC 국제 편집자 제레미 보웬은 트럼프 대통령 발언이 전후 가자지구 통치 계획이 부재해 이미 "결함"이 있는 가자지구 휴전을 흔들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는 한 고위 아랍 소식통이 이것이 "종말의 전조"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고 전했다.
보웬은 트럼프 대통령의 가자지구 소유 구상이 "지중해에서 요르단강 사이" 모든 땅이 유대인 소유라고 믿는 이스라엘 극단주의자들을 선동하는 동시에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및 다른 무장 조직에 위기감을 일으켜 이스라엘에 대한 무력 행사 필요성을 느끼게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전쟁 탓에 현재 이스라엘 영토에서 쫓겨나(나크바·대재앙) 가자지구를 포함해 중동 각지에 흩어져 다시 돌아가지 못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강제 이주안은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휴전 협상에 필요한 신뢰에도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 보웬은 2023년 10월7일부터 지속된 가자지구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맹폭을 경험한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미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파괴하고 주민을 추방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다고 믿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제 트럼프 대통령이 가자지구 주민 전체 이주안을 들고 나와 이스라엘의 계획을 돕는다는 불신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버락 오바마 정부에서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대니얼 샤피로도 "이는 진지한 제안이 아니다"라면서도 이 구상이 발표된 것 자체로 "이스라엘 정부 내 극단주의자들과 다양항 성향의 테러리스트들이 이를 문자 그대로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행동에 나설 수 있다는 점이 위험하다"고 지적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는 인질의 추가 석방을 위태롭게 하고 미군 인력이 목표물이 되게 하며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관계 정상화 협상 전망을 약화한다"고 우려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금 극단적 발언을 통해 이 지역 국가들에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게 하려는 전략을 구사 중이라는 분석도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협상가로 일한 바 있는 팔레스타인인 변호사 다이애나 부투가 트럼프 대통령 발언에 대해 "아랍 국가들에게 '하마스가 우리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받아들이게 압력을 넣으라'고 말하는 것"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으면 "(가자지구 주민들을) 쫓아내 (이집트) 시나이반도와 요르단으로 보내겠다는 것"이라고 추측했다고 전했다.
다급해진 아랍국들을 한발 물러서게 하고 미국이 원하는 해법을 만들어 오도록 유도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마이크 월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5일 미 CBS 방송에 트럼프 대통령의 구상이 "과감하고 신선하다"고 옹호하며 "트럼프 대통령의 해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 지역 전체가 자체적인 해결책을 내놓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더해 이스라엘 매체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은 트럼프 대통령 발언이 하마스 지도자 추방 등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 요구안을 역내에서 "갑자기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것으로 보이게" 하며 네타냐후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을 가자지구 주민 이주 구상에서 멀어지게 할 경우 이집트와 요르단의 호감 또한 살 수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가자지구 "개발"에 완전히 뜻이 없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5일 <파이낸셜타임스>는 수일 전 한 유럽계 이스라엘인 부동산 개발업자에게 갑자기 백악관에 있는 옛 친구가 전화를 걸어 팔레스타인 지역 투자에 대한 은행 규정, 주요 걸프 건설 대기업과의 제휴 가능성 등을 물었다고 보도했다.
가자지구 주민들은 반발했다. 5일 카타르 알자지라 방송은 가자지구 남부 칸유니스에서 주민 파티 아부 알사이드(72)가 "이 잔해 더미가 보이는가? 이게 미국과 그 안의 모든 것보다 더 소중하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을 전면 거부했다고 전했다. 1948년 나크바 당시 이스라엘 민병대에 의해 현재 이스라엘 영토 내에서 쫓겨난 부모를 둔 알사이드는 "팔레스타인인을 아는 분별 있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조국을 떠나는 것이 죽음 그 자체라는 걸 안다"며 "여기 있는 누구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 발언 탓에 휴전 연장과 전투 재개를 가를 가자지구 전쟁 협상에 대한 초점이 흐려지고 있다는 우려도 계속됐다. <워싱턴포스트>(WP) 편집위원회는 사설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의 가자지구에 대한 이상한 제안이 당면한 심각한 문제를 가려서는 안 된다"며 가자지구 휴전의 두 번째 단계 진행 여부를 결정할 협상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문은 팔레스타인인 이주 발언은 "위험한 방해"라며 미국 정부가 "모든 측이 수용할 수 있는 현실적인 가자지구의 미래 통치기구를 위한 제안"을 내놔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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