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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적 음모론자' 윤석열의 '내 차고 안의 용' 증명하기

[박세열 칼럼] 한국식 '딥스테이트론'을 개발한 윤석열

계엄령이 계몽령이라는 '호수 위 달 그림자' 같은 논리마저 박살낸 건 윤석열 본인이다. 그가 포고령 위반으로 싹 다 잡아들이라는 명단의 면면을 보면 이건 계몽이 아니라 흔하디 흔한 치정 복수극에 가깝다.

타깃으로 추정된 인물들은 '김건희 디올백 스캔들'의 최재영 목사(포렌식으로 복구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의 메모), 해병대 박정훈 대령 항명 혐의 재판을 맡은 군 판사 4명, 김건희와 갈등 관계인 한동훈, 윤석열의 대선 경쟁자였던 이재명은 물론, 이재명에게 위증교사 혐의 무죄 선고를 한 현직 판사 등이다. 명태균은 윤석열 부부와 대화 내용이 다수 담긴 '황금폰'을 수사기관에 제출하자 윤석열이 '쫄아서' 계엄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이건 지극히 사적인 계엄이다.

'치정 복수극'을 계몽이라고 우기니, 기왕 이렇게 된 바 우린 계몽주의의 역사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한때 유시민이 김정은을 계몽군주의 면모를 보인다고 평가하자 득달같이 달려들던 무지의 함성은 이제 윤석열 찬양으로 변하고 있다. 계몽군주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절대왕정시대의 유물로 군주 독재를 말한다. 천공 스승, 건진 법사, 현생 미륵(명태균), 버거 보살(노상원)을 거느린 '미신에 빠진 계몽주의자'란 건 존재 그 자체로 언어도단인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17세기 발현한 계몽주의가 음모론과 미신으로 귀결됐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윤석열과 그 일파들의 탄생 비밀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역사적으로도 계몽주의의 끝은 음모론에 가 닿는다. 계몽주의자들은 구체제 전복을 위해 1776년 결성된 일루미나티(Illuminati, 라틴어로 계몽하다, 혹은 계몽된 자) 비밀 결사로 모여드는데, 이후 '유럽 민중의 미몽을 깨운다'며 전쟁을 일으킨 나폴레옹 시대를 거치면서 그 의미는 크게 퇴색되고 만다. 하지만 일루미나티의 '정신'은 살아 남아 최근 유행하는 음모론의 마르지 않는 영감의 샘이 됐다.

미스터리와 오컬트 세계관에서 일루미나티에는 사회 유력 인사, 정치인 셀러브리티 등이 속해 있고, 그들은 현상의 배후에 존재하면서 세계의 전쟁과 재난을 주도하고 움직인다. 트럼프 지지자들 사이에 퍼진 큐아난의 '딥스테이트' 음모론, 프리메이슨 음모론 등 '세계 그림자 정부' 음모론의 원조격이 일루미나티다. 그들의 세계관 속에서 마크 저커버그와 일론 머스크는 '렙틸리언'이라는 파충류형 외계인으로 지구 정복을 노리는 세력의 하수인이고,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은 소아성애자인데다 아동의 피를 섭취하는 흡혈귀로 세계 정복을 꿈꾸는 자들의 노예다.

이 음모론은 한국에 수입되면서 '분단 국가'라는 초현실적 상황을 맞닥뜨리는데, 토착화와 다양한 변주를 겪다가 최근엔 '중국 공산당과 북한의 부정선거 음모론'으로 귀결되었다.

부정선거론을 설파하고 있는 윤석열은 체포되면서 공개한 자필 편지에서 "투개표 부정과 여론조사 조작을 연결시키는 부정선거 시스템은, 이를 시도하고 추진하려는 정치세력의 국제적 연대와 협력"으로 가동된다고 주장했고 윤석열 변호인인 배진한은 "저희는 이 불법선거가 사실 중국과 크게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윤석열은 헌법재판소에 보낸 답변서에서 "전산시스템의 비밀번호 '12345'는 중국 중앙 정부와 지방정부의 연결 번호로서 중국 등 외부에서 풀고 들어오라고 만들어 놓은 듯이 기이한 일치성을 보였다"고 했다.

이런 주장을 지지하는 부정선거론자들은 중국 공산당과 북한 세력이 그들의 꼭두각시인 이재명 등 '숙주'를 이용해 수백만 명을 동시에 속이는 부정선거를 저질렀다고 믿는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을 망하게 해서 중국과 북한에 헌납하기 위함이다. 한국의 계몽파들은 중국 공산당과 북한 노동당이라는 딥스테이트라고, 그 조직의 수족인 이재명 일파는 '렙틸리언'들이라고 믿는 듯하다. 또한 조선족이 한국으로 대거 침투해 한국 땅을 집어 삼키려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계몽령을 내려 군인들이 선관위를 털어 중국인들을 체포했는데, 그들이 비밀리에 주일미군 기지로 압송됐다'는, 실소가 나올만한 가짜뉴스를 신성한 헌법재판소에서 버젓이 인용한다.

이런 류의 스토리는 많다. 이를테면 문재인은 코로나 팬데믹 때 군인들을 생체 실험에 동원했고(무려 윤석열 정부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을 지낸 극우 유튜버의 주장), 부산 문현동에 있던 일본군 해군 어뢰 공장에 일제가 숨긴 금괴 1000톤을 몰래 탈취했다거나(너무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을 받았는지, 나중에 금괴 200톤으로 수정된다.) 코로나 백신에 인간을 조종하는 나노 로봇을 집어 넣었다는 식의 스토리 말이다. 어쩌면 이 사회 곳곳에 숨겨졌다고 (일부 사람들에게) 믿어지는 '집게손가락' 형상은 딥스테이트,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가 심어 놓은 어떤 심볼이 아닐까?

계몽주의에서 뻗어나온 일루미나티류의 사이비 음모론 광신도들이 계몽주의자를 자처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계몽주의와 음모론의 만남은 이렇게 대한민국 땅에서 '한국 버전'으로 현현한다. 윤석열은 "저는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와 국민 주권이 위기 상황임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계신 국민들께, 상황의 위급함을 알리"기 위해 계엄을 했다고 주장했다. 본인만이 알고 있는 사실(?)을 국민 '계몽'을 위해 알리고자 분연히 나섰다는 것이다.

윤석열은 국민이 "국제법이 금지하는 군사도발과 전쟁을 하지 않고 공격과 책임 주체도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 다양한 회색지대 하이브리드전을 주권 침탈의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했다. '공격과 책임 주체가 뚜렷이 드러나지 않은' 전쟁을 감지했다니, 대한민국은 윤석열의 위대한 직감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인가?

물리적 형체가 없는 주장에 반박하기란 매우 어렵다. 칼 세이건은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을 통해 '내 차고 안의 용'(The dragon in my garage)이라는 비유를 들어 그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지 설명했다. 여기 두 명이 '차고 안의 용'을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

"우리 집 차고에는 불을 뿜는 용이 살고 있습니다. "

"보여주세요. 용은 어디에 있습니까?"

"용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이 용은 보이지 않는 용이라고 말하는 것을 잊었군요."

"그렇다면 차고 바닥에 밀가루를 뿌려서 용의 발자국이 찍히는 것을 봅시다."

"좋은 생각이지만, 이 용은 하늘을 납니다."

"적외선 감지기를 사용해서 보이지 않는 불을 탐지해 봅시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지만, 보이지 않는 불은 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용에게 스프레이 페인트를 뿌려 봅시다."

"좋은 생각인데요, 우리 용은 물질로 되어 있지 않아서 페인트가 묻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고 물질로 되어 있지 않고 날아다니며 뜨겁지 않은 불을 뿜는 용이 있다는 것, 그리고 용이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윤석열이 주장하는 "국제법이 금지하는 군사도발과 전쟁을 하지 않고 공격과 책임 주체도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 다양한 회색지대 하이브리드전을 주권 침탈의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까? "선거 조작으로 언제든 국회 의석을 계획한 대로 차지할 수 있다든가 행정권을 접수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면 못할 일이 뭐가 있겠느냐"는 윤석열의 주장에 "선거 조작이 원래 없었다면?"이라는 의문을 단다는 건 미몽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어리석은 국민이나 할 일이다. 그렇게 우린 미몽에 갇힌 국민이 된다. 미몽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칼 세이건은 해법은 이렇다.

"용이 존재한다는 가설을 일단 부정하고 장래에 물리적 데이터가 쌓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겉보기에 제정신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서로 똑같은 이상한 망상을 공유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고찰하는 것이다."

▲윤석열.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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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열

정치부 정당 출입, 청와대 출입, 기획취재팀, 협동조합팀 등을 거쳤습니다. 현재 '젊은 프레시안'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쿠바와 남미에 관심이 많고 <너는 쿠바에 갔다>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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