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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전북본부는 그동안 정론을 펴며 공론의 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일관되게 노력해왔다.
이러한 <프레시안>의 접근법에 호감을 갖고 있던 차에 <프레시안> 전북본부가 2024년 펴낸 『새만금 잼버리 리포트』 서평을 쓸 기회를 갖게 됐다. 이 책은 <프레시안> 전북본부가 2023년 8월부터 2024년 1월까지 장기간 새만금잼버리 탐사기록을 담은 것이다.
이 책을 보면서 필자의 가슴 속에 꿈틀거리던 취재정신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끼게 됐다. <프레시안>의 접근법 속에서 공론의 장을 살리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된 것이다.
먼저 필자 나름의 공론의 장은 우리의 개국기사에 등장하는 신단수(神檀樹) 철학을 중심으로 삼고자 한다.
단군의 개국기사를 보면 신인(神人)이 있어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었다. 그 신인은 신시에 모여든 3천여 인의 추대를 받아 군장에 오르니 이 분이 단군이다. 다시 이 구절을 풀어보면 신과 같이 뛰어난 지도자가 하늘의 이치를 상징하는 신단수 아래에서 신을 섬기는 도시를 열었다는 것이다.
신시의 시민 3천여 명은 서로 공론을 벌여 유능한 지도자를 군장으로 추대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신시는 신의 뜻, 이성이 지배하는 도시이자 시장이며 시민이 정보를 주고 받는 공론의 장이라는 것이다.
도시국가 공동체의 장인 군장은 독재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토론과 검증을 거쳐 능력을 평가받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무능한 자는 아예 제외되고, 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지도자가 시민의 선택을 받는다. 난데없는 사이비 예언가의 꾐에 빠져 시민이 판단을 흐리거나 군장이 도시국가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그런 무질서가 발생한다면 시민은 그 지도자를 군장의 지위에서 끌어내릴 것이다. 우리의 고대국가는 이렇게 민주적으로 형성되고 민주적으로 운영된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이 같이 주권형성을 위한 공론의 과정을 잘 살펴야 한다.
공론의 장은 신단수 아래 신시이다. 신시는 신의 뜻이 펼쳐지는 제단 터이자 시장이며 광장인 것이다. 서양의 광장, AGORA와 유사하다. 신시는 마한 시대에 소도로 변하고, 고구려의 영고, 동예의 무천 형태로 전해진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형태이지만 그 실제는 공론의 장이다.
민족의 행태는 관습과 문화로 이어진다. 신단수는 오늘날에도 당산나무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마을공동체는 당산에서 동제를 지낸다. 동제는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공론을 거치게 된다. 사실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은 이처럼 우리 역사와 문화 속에 살아 있는데 오로지 서양의 그리스, 로마에서만 찾으려 드니 병폐가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의 공론의 역사를 살피면 공론을 대단히 중요시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마을공동체 규약인 향약 약조를 보면 공론의 과정에 참여하지 않은 자를 추방하기도 했다. 근대 이전의 추방령은 삶의 터전을 잃고 방랑하기 때문에 엄중한 벌이다. 또한 공론의 결과를 따르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곤장 20대 형에 처하거나 회원자격을 정지했다.
오늘날 공론의 장에서도 엄격하게 책임을 지는 자세가 요구된다고 하겠다. 더욱이 판을 치는 가짜뉴스를 물리치기 위해서도 더욱 그렇다고 하겠다.
언론은 공론의 장의 대표로서 주권을 형성하는 장(場)이다. 이에 따라 언론은 책임 있는 보도를 해야 한다. <프레시안> 전북본부가 펴낸 『새만금 잼버리 리포트』는 취재진의 성숙한 취재력, 깊은 인간미, 고귀한 품격이 융합한 결과로 분석할 수 있다. 취재진의 과학적인 취재력과 노마지지(老馬之智)의 깊은 지혜, 얼음처럼 빛나는 통찰력이 돋보이는 역작이다.
필자는 이 같은 취재정신을 선양하며 공론의 장을 지키고자 한다. 자신만이 옳다는 신념이 너무 강해 타인의 입장을 듣지 않는 것은 독선이다. 독선은 공론을 왜곡하며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낳게 될 것이다.
신단수 아래에 신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공론의 정상화를 염원하는 기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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