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자체 핵무장론은 미국이 제공하는 확장억제에 대한 불신과 궤를 같이 한다. 2024년 하반기에 실시된 중앙일보와 동아시아연구원(EAI)의 공동 기획 여론조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이 조사에 따르면, 미국이 제공하는 확장억제에 대한 불신은 2023년 26.2%에서 2024년 47.4%로 급증했고 한국의 자체 핵무장에 대한 지지 여론도 58.5%에서 71.4%로 크게 높아졌다.
확장억제는 '네가 나의 친구를 공격하면 내가 너한테 보복할 거야'라고 위협함으로써 적대세력이 자신의 동맹국을 공격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개념이다. '절대 무기'로 불리는 핵무기로의 보복 위협이 대표적이다.
미국은 세계 최강의 핵보유국이고, 한국은 비핵국가이며, 한미동맹의 '공동의 적'인 조선은 핵무기를 갖고 있다. 그래서 미국은 조선이 한국을 핵무기로 공격하면 핵 보복을 가하겠다고 경고한다. 그런데 이를 못 믿겠다는 한국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확장억제에 대한 불신은 허망함을 내포하고 있다. 이렇게 질문해보자. '사후 세계를 믿는가?' 산 사람을 알 수 없고 죽은 사람은 알려줄 수 없다. 그럼 조선이 한국에 핵을 사용하면 미국이 핵으로 보복하겠다는 약속은 지켜질까? 평소에는 알 수 없고 전쟁이 나서 조선이 한국을 향해 핵무기를 사용해봐야 알 수 있다.
사후 세계가 궁금해 죽을 수 없듯이 미국의 확장억제를 검증하기 위해 전쟁을 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미국이 핵 보복을 해줄까라는 궁금증은 사후 세계에 대한 궁금증만큼이나 허망하다.
이러한 확장억제의 특성은 핵무장론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미국이 서울을 구하기 위해 워싱턴을 포기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미국이 대북 핵 보복을 가할지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은 대한민국 어딘가에 이미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확한 질문은 '미국이 서울을 초토화한 조선을 상대로 미국 대도시의 희생 가능성을 무릅쓰면서 핵 보복을 가할 것이냐'이다.
핵무장론자들이 수시로 호명하는 프랑스의 정치인 샤를르 드골의 발언 취지도 정확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핵무장론자들은 "드골이 파리를 지키기 위해서 뉴욕을 포기할 수 있느냐"라고 반문하면서 자체 핵무장을 선택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곡해다. 드골이 존 F. 케네디에게 핵우산 신뢰성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한 시기는 케네디가 1961년 5월 31일〜6월 2일에 파리를 방문했을 때였다.
당시 두 정상의 대화를 담은 비밀문서에 따르면, 드골은 케네디에게 "만약 소련이 핵전쟁을 개시하면 미국이 보복할 것이라고 확고히 믿는다"고 말했다. 동시에 그는 "소련이 재래식 공격을 가해오면 미국이 과연 핵무기를 먼저 쓸 수 있겠느냐"는 문제를 제기했다.
드골은 소련의 선제 핵공격에 대한 미국의 핵 보복에 대해서는 믿음을 갖고 있었지만, 소련의 재래식 공격에 맞서 미국이 핵무기를 먼저 사용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이러한 의문은 소련을 비롯한 바르샤바조약기구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비해 재래식 군사력에 있어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던 것에 대한 불안감을 반영한 것이다. 동시에 소련의 재래식 무기 사용에 미국이 핵 보복으로 응수하면 미국 본토도 소련의 핵 보복에 노출될 수 있는데 미국이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겠느냐는 의구심이 내포된 것이다.
그런데 냉전 시대 유럽과는 달리 오늘날 한반도에선 한미동맹의 군사력이 조선을 압도하고 있다. 2025년 세계 군사력 순위에서 한국은 3년째 5위를 유지하고 있고 조선은 34위를 기록해 3년째 30위권에 머물러 있다는 미국의 군사력 평가기관인 글로벌파이어파워의 분석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여기에는 핵무기 전력이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북핵 대처 역량은 미국의 확장억제와 한국의 막강해진 전략적 타격 능력을 통해 유지할 수 있다.
기실 미국의 확장억제에 대한 한국인들의 불신과 관계없이 확장억제는 작동하고 있다. 조선이든, 그 어떤 나라든 한국에 핵공격을 가하는 나라는 없기 때문이다. 또 확장억제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억제가 목적이지 핵 보복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핵 보복 경고는 상대를 억제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핵 보복을 가한다는 것은 확장억제가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미국의 확장억제 상대는 한국이 아니라 조선이다. 한국은 보호의 대상이고 조선은 억제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의 선제 핵 사용시 미국의 핵 보복 다짐을 한국이 믿느냐보다 조선이 믿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런데 조선은 믿는 정도가 아니라 피해망상에 휩싸여 있다. 미국이 유사시 핵 보복을 가할 것이라고 여길 뿐만 아니라 여차하면 선제 핵공격도 불사할 것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볼 때, 우리는 차분해지고 지혜로워져야 한다. 조선이 생존을 위해 만들었다는 핵무기를 사용하는 순간 조선의 핵보유 목적은 잿더미가 되고 만다. 일각에선 김정은 정권의 오판 가능성을 거론하는데, 미국의 확장억제에 대한 한국의 불신은 조선의 오판 가능성을 줄이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확장억제에 대한 불신을 줄이고자 미국 전략자산 전개와 한미연합훈련을 강하게 할수록 조선의 핵능력도 강해진다는 것은 이미 톡톡히 경험한 바이다.
핵무장론자들은 '핵에는 핵으로만 맞서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한반도에선 이미 미국 핵과 북핵이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그래도 한국의 핵보유가 대안이라고 말하지만, 한국이 조선에 필적할 만한 핵무장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자체 핵무장은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 대안은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를 가져와야 하는데, 정반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단기간 내에 상당한 수준의 핵무장에 도달할 수 있다는 '과대망상'은 이게 실현되지 않으면서 마치 세상이 곧 무너질 것 같은 '피해망상'만 남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대안이 뭐냐는 반문이 나올 것이다. 대안의 논리는 자체 핵무장론을 깨끗이 접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 또 대북 억제는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현실 인식도 필요하다. 미국의 확장억제에 대한 불신보다는 신뢰를 표하는 게 여러 모로 이롭다. 북핵 동결과 감축을 목표로 삼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재개하면서 비핵화를 대신해 비핵무기지대(비핵지대)를 공론화해볼 가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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