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내가 다니는 대학이 등록금을 일방적으로 대폭 인상한다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 상담을 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진지한 얘기를 하는 중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통령이 담화와 계엄사령관의 포고령에는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한다는 둥, "체제전복 세력을 제외한 선량한 일반 국민들은 일상생활에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조치" 한다는 둥 주관적이고 모호한 기준으로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낙인찍고 있었다.
뉴스를 보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와중 민주노총에서 국회 앞으로 집결해 계엄군의 국회 침탈을 저지해야 한다는 공지를 봤다. 주문한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친구들과 함께 국회 앞으로 달려갔다. 국회에 도착하니 장갑차를 시민들이 둘러쌓고 있었고 머리 위로는 계엄군의 헬기가 지나갔다. 다큐멘터리나 영화에서나 보던 민주화 운동, 계엄 쿠데타를 경험하고 있었다. 현장에 있었지만 아직도 실감나지 않는다.
이미 수많은 매체와 성명이 윤석열의 계엄령 선포가 왜 쿠데타이고, 인권과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일인지 다뤘다. 국회에서 계엄을 해제할 수 있으니 국회의원의 출입을 막고 공수부대와 헬기를 투입해 국회를 장악하려 했다. 이름 붙이자면 검(檢)부 쿠데타가 적당할 것 같다. 정치 기본권과 언론·출판·집회의 자유, 영장 없는 체포·구금 등 신체의 자유와 같은 시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 계엄령을 대통령이 자신의 권력이 위협당하자 선포하고 척결, 처단과 같은 말을 서슴없이 꺼냈다.
윤석열에게 생명 존중은 사치였고, 계엄령을 선포한 것 자체가 인권침해였다. 달리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그 상황을 지켜보던 모두가 광주를 떠올렸고 군부 독재의 공포감을 느꼈다. 삽시간에 세계가 충격에 휩싸여 졸지에 러시아나 이스라엘조차도 예의주시하는 굴욕적인 일도 벌어졌다.
우리는 이미 정치적이다
국회가 계엄령 해제를 결의하자 살벌하고 긴장된 국회 앞의 분위기가 살짝 누그러졌다. 경찰로부터 스피커도 성공적으로 사수하면서 국회 정문 앞에 모인 시민들의 자유발언이 시작됐다. 대학생들의 발언이 특히 많았다. "투쟁으로 인사드립니다. 투쟁! 저는 00대에 다니는 평범한 대학생입니다", "저는 술을 마시다가 온 평범한 00대 학생입니다", "저는 내일이 시험인데도 집회에 나온 평범한 00대 학생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평범함을 강조했지만 발언은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윤석열이 무얼 잘못했는지 조목조목 알고 있었고, 목소리는 굳센 결의가 느껴졌다.
한편으론 평범함을 강조해야 하는 상황이 아쉬웠다. 윤석열이 보기에 국회 앞에 모인 우리는 이미 정치적이고 불순한 행위를 하고 있었다. 투쟁으로 인사드린다고 말하면서도 평범함을 강조해야만 하는 상황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노조 혐오와 운동권 혐오, 정부의 종북 몰이와 배후세력 낙인의 결과다. 글의 서두에 필자는 등록금 투쟁을 준비하고 있고, 민주노총의 공지에 따라 움직였다고 언급했다. 과거와 비교하기에는 부끄럽지만, 학생운동과 노학연대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대학가는 정치적인 목소리를 회피하고 소위 '꿘충'이라는 혐오표현으로 운동 세력을 쉽게 거부한다. 대학 온라인 커뮤니티 속에서는 인권과 평화, 진보적인 가치에 대한 악성 댓글은 수도 없이 달린다. 각자도생의 사회 속 대학의 기업화와 서열화가 강해지면서 독재정권과 최전선에서 싸우던 대학은 탈정치화 돼왔다.
'불순분자' 낙인은 잘 싸우고 있다는 증거
탈정치화는 윤석열이 가장 좋아할 현상이다. 기득권의 입장에서 사람들에게 정치를 어렵게 느끼게 하고, 피곤하게 해서 시민들의 관심을 낮춰야 자신들을 비판할 사람도 줄어들고 정권의 안위가 보장된다. 당연한 이치다. 정권을 비판하고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 투쟁의 노하우를 쌓아가고 있는 운동 세력에게 '불순분자', '종북세력' 낙인을 찍으며 '평범한' 사람들과 선을 긋게 만들 수 있다.
대학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촛불의 힘으로 박근혜를 끌어 내려도 한국 사회는 여전히 운동 세력을 폄하하고 노동조합을 혐오했다. 이들은 윤석열이 당선되며 부활했고, 계엄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대로 평범함만을 강조하다가는 다음에는 쿠데타 성공의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저들이 말하는 '불순'함을 전유해버리자고 제안하고 싶다.
우리는 모두가 평등한 사회라는 '불순한' 정치적 목적으로 투쟁해왔고, '불량한' 방식으로 정부와 싸웠다. 우리는 그날 하루 계엄 쿠데타에 놀라 뛰쳐나온 것이 아니다. 후보 시절부터 윤석열이 마음에 안 들었다.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인권을 침해할 때마다 적어도 SNS에 글을 적으면서 규탄해왔다. 그래서 쿠데타를 한 차례 막아낸 것은 그저 하루짜리 분노가 아니라 그동안 행동해온 성과라고 생각한다.
윤석열과 우리는 윤리의 기준이 다르다 '불순분자'라 낙인찍는 것은 그들의 기득권에 균열이 나고 있기 때문이지, 우리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생각하면 '불순분자', '종북세력'이라는 낙인은 우리가 잘 싸우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윤석열 탄핵을 향해서 그리고 민주주의를 다시금 지키기 위해서 직장, 학교, 거리 구분하지 말고 더 많이 정치적 목소리를 내자. 비범하고, 불량하고, 불순해야 완전히 승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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