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트라우마가 하나 있습니다. 5.18 그때 (계엄군 들어올 때) 친구랑 광주에 있었거든요. (계엄군이랑) 멀리 있었어요.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총을 쏘는 것 같아서 도망을 갔는데, 친구가 쓰러졌어요. (그때 부상을 당했고) 지금도 그 친구 허파에 총알이 박혀 있어요. 그래서 5.18 얘기만 나오면 막 가슴이 이상하고 몸이 떨려요. 막 눈물이 나고 그랬어요.
그런데 며칠 전 텔레비전을 보는데 갑자기 윤석열이가 나오더라고요. 채널 돌렸다가 '무슨 소리 하는 거지?' 하고 다시 봤는데, 몇 마디 하더니 갑자기 계엄을 한다고 그러는 거에요.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계엄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죠? 정말 무섭습니다."
'윤석열 퇴진' 촛불집회 이틀째인 5일에도 어김 없이 서울 광화문에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참여연대, 전국민중행동 등 84개 시민단체가 속한 '거부권을 거부하는 전국비상행동'이 전날에 이어 이날 두 번째로 개최한 '윤석열 퇴진 시민대회'에 주최 측 추산 2만여 명의 시민이 모였다.
광주 시민 이병철 씨는 자유발언 무대에 올라 20대 부산에서 부마사태를 겪고 외양선을 타는 선원이 된 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경험했다며 정권이 군경을 동원해 국민에게 총칼을 겨누었던 엄혹한 시절을 회상했다. 그러면서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그날 밤도 "놀라서, 너무 놀라서 잠을 못 잤다"고 했다.
"서울 동대문구에 살고 있는 청년"이라고 밝힌 양선경 씨도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 당일 믿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는 "택시를 타고 곧장 국회로 달려가 밤새 '계엄 철폐' '윤석열 퇴진'을 외쳤다"며 "(국회의 해제안 의결로)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정말 살 떨리는 시간이었다"고 토로했다.
시민들은 "살 떨리는" 계엄의 위협에도 일상을 유지하며 윤석열 정권 퇴진에 뜻을 모았다. "서울 홍대입구역 근처에서 붕어빵을 팔고 있다"는 김문호 씨는 주변 노점상들과 '윤석열 퇴진' 국민투표를 받고 있다고 했다. 그는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 이후) 지금까지 4000명이 넘는 손님들로부터 투표를 받았다"며 "투표하면 붕어빵을 하나 더 드리다 보니, 손님들이 자꾸 손님을 데려온다. 손님들이 ('윤석열 퇴진' 투표에) 더 적극적"이라고 말했다.
김 씨는 이어 "붕어빵을 구울 때 불조절은 필수다. 불을 너무 세게 하면 속은 익지 않고 겉만 타버린다. 불을 너무 약하게 해도 붕어빵은 익지 않는다. 붕어빵 틀을 너무 자주 뒤집어도 안 된다"며 "국민 여러분, 우리 국민들의 분노의 온도는 적당하다. 이제는 우리의 이 분노로 윤석열 정권을 퇴진시키자"고 말해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시민들은 또 '대통령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정한 국민의힘을 강하게 비판했다. 집회 첫날 구호였던 '윤석열 탄핵', '윤석열 퇴진', '윤석열 체포'에서 이날은 '탄핵 반대 국민의힘은 해체하라', '국힘 해체' 등을 추가하며 적극 대응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윤복남 회장은 "오늘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가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을 저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계엄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라면서도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통과시키지 않겠다는 말도 안 되는 입장을 밝혔다"며 "헌법 파괴 범죄자인 윤석열의 대통령직을 유지하겠다는 것은 결국 윤 대통령의 반헌법적 계엄을 묵인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고, 이는 내란 범죄의 동조 행위"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한 대표의 입장은 아무리 포장을 한다고 해도 국민에게 총을 겨눈 반헌법적 행위를 눈 감겠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스스로 윤 대통령과 공범이 되겠다고 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발언대에는 각 대학 시국선언 제안자들이 올라 주목받았다. 동국대학교 시국선언 제안자 홍예린 씨는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는 정말 무시무시한 사건이지만, 우리들의 용기를 그만큼 보여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이 용기를 꺼뜨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숙명여대 시국선언 제안자 황다경 씨는 "윤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계엄 선포로 시국선언 준비에 무력감을 많이 느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우리 역사가 쌓아올린 민주주의가 한순간에 무너진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기력해졌"지만 "학우들이 오히려 더 큰 목소리로 참여해 주고 응원해 줘" 시국선언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럴 때일수록 더 많은 학생들이 모여 더 큰 목소리로 외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여대 시국선언 제안자 서희진 씨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대학생은 민주주의를 이끌어내는 주역이었다. 우리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며 "세상은 우리의 목소리로 변화할 수 있고, 그렇게 더 정의롭고 평화롭고 안전한 일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했다. 이어 "오는 7일 여의도에서 대학생 시국선언 대회가 있다"며 시민들과 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주최 측은 오는 6일 집회는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진행된다고 예고했다.
한편, 이날 집회에는 2030대 여성 참가자들의 참여가 눈에 띄었다.
김 모 씨(30대·인천 거주)와 유 모 씨(20대·경북 안동 거주)는 'SNS 번개'를 통해 집회에 참석했다고 밝혔다. 김 씨는 계엄 선포 소식과 반응 등을 모두 SNS로 접했다면서 "솔직히 말하면 너무 무서웠다. 아버지 고향이 전라도여서 5.18 광주 학살 이야기를 듣고 자라 더 무서웠다"며 "40여 년이 지나 계엄 선포를 경험하게 되면서 우리의 일상이, 우리의 민주화가 엄청 연약하다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분들 덕에 평온한 일상을 누리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사회 구성원으로, 어떤 빚이라고 해야 하나? 민주화를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나왔다"고 했다.
유 씨는 "그동안 회원들끼리 사회 현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는데, 한밤 중 계엄 선포에 국회 앞 상황과 뉴스를 공유하면서 시간 되는 사람들만이라도 집회에 참석하자는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오늘 집회에 참석하려고 일찌감치 서울에 왔다. 1박2일 할 생각으로 왔다"고 했다.
조 모 씨(20대·서울 마포 거주)는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로 집회결사의 자유까지 박탈당하는 상황이 되니까 일상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더는 참을 수 없"어 집회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조 씨와 함께 온 권 모 씨(20대·경상도 출신 용산 거주)도 "너무 놀랐다. 단순히 무섭다는 느낌 이상이었다. '이제는 죽을 각오를 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며 계엄 선포 당시의 충격을 전했다.
올해 스무 살이라는 이 모 씨와 최 모 씨(인천 거주)도 "가장 안전한 나라가 전쟁 직전의 상황이 됐다"며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가 한국 사회를 후퇴시켰다고 꼬집었다. 이 씨는 "미국과 태국에 있는 친구들이 연말에 올 예정인데, 안전한지 묻고 있다"며 "한국이 위험을 감수해야 올 수 있는 나라가 됐다"고 우려했다. 최 씨는 "정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부모님들도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굉장한 불만을 갖고 있다"며 "계엄 선포 당일 국회 앞으로 달려간 시민들에게 '나라를 지켜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윤석열 퇴진'을 촉구했다. "국민의 소중한 한 표로 대통령이 됐으니까 좀 더 책임감을 갖고 진짜 국민을 위해서 행동으로 보여줬으면 좋겠다", "국민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걸 보여 달라.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와 줬으면 좋겠다"는 완곡한 표현부터 "내란죄를 물어 법정에 세워야 한다", "국회의 탄핵 결의는 이제 의미 없고 내란죄로 형사처벌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등 강력한 의견도 제시됐다.
윤 대통령 비호에 나선 국민의힘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한 시민은 탄핵에 반대한다는 국민의힘에 대해 "위헌을 저지른 대통령을 계속 지키겠다고 결정한 것 자체가 비상식적"이라며 "상식이 통하지 않는 대통령에게 권한을 계속 유지하게 하는 것 자체가 나라를 위험하게 만드는 것이다. 윤 대통령을 탄핵하는 것이 나라를 위하고 국민을 위해 꼭 필요한 일 아닌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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