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글날, 글쓰기, 영화 만들기
어제(글 쓴 시점에서)는 한글날이었다. 빨간 날. 아쉽지만 이번 휴일은 나에게 무급휴일이다. 쉬어도 임금으로 계산해주는 직장에 다니지 못한다는 것이 서운한 하루다. 최근 2~3년간은 빨간 날을 유급휴일로 계산해주는 직장에 다녔었다. 지금은 그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뭔가 가지고 있던 것을 빼앗긴 느낌. 박탈감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도 느껴진다.
한글의 위대함은 어디 있을까? 나는 그것을 평등정신의 실현에 있다고 본다. 이제 문자는 지배 계급의 전유물이 아니다. 누구나 정보와 네트워크에 접근할 수 있고, 누구나 자신의 삶을 기록하여 역사의 저장소에 올릴 수 있다. 양반 상놈 구분치 아니하고, 남녀 노소의 구분도 없이 공평하게.
편리한 도구 덕에 글을 읽는 국민은 절대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글을 쓰는 국민은 상대적으로 여전히 소수인 것 같다. 많이 늘었으면 좋겠다. 아니 남 이야기할 것 있나. 나부터 글을 좀 더 써봤으면 좋겠다. 아인슈타인의 짧은 글들을 모아놓은 책을 전자책으로 본 적이 있다. 한여름 조선소에서는 점심시간이 꽤 긴 경우가 있는데, 그러한 애매한 시간에 읽기에 좋은 글이었다. 그의 물리학 이론과 공식은 한 줄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한 명의 지식노동자로써 소소히 남긴 일상의 말과 글들은 쉽고 간결하고 재미가 있었다. "나이가 마흔이 넘으면 글을 읽기보다는 쓰기를 더 많이 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는 의견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독서만 반복하는 일은 정신과 영혼을 타인에게 의지하려는 수동적 경향을 만들어 내는 것 같으니, 마흔이 넘어서는 창작을 통해 스스로 판단하는 힘을 길러 나가는 일이 필요해 보인다고 했다.
프로이트 전집의 어느 페이지에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과 심리학자 프로이트가 전쟁의 원인과 평화의 방법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는 편지글을 본 적도 있다. 그는 호리병이 늘어진 실험실에서 폭발물 제조만 연구하는 영화 속의 괴짜 과학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특수상대성이론. 그 원리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특수란 단어에는 알 수 없는 친근감이 느껴졌다. 나는 특수용접기능사라는 기술 자격증이 있고, 특수공무집행방해라고 적힌 범죄 이력도 하나 있다. 특수라는 명칭이 붙은 두 개의 공식 문서 보유자인 셈이다. 이것은 나와 아인슈타인의 특수한 인연일까. 뭐 어쨌든.
어쭙잖은 글로 어느 문학상에 당선되고 수상소감문에 이런 이야기를 올렸었다.
가끔 올림픽 경기를 보면 이런 해외 선수들이 있습니다. '유럽의 어느 중학교 문학교사 올림픽에 출전하여 동메달 획득' ' 남미의 한 공장 노동자 올림픽에 출전하여 아쉽게 예선 탈락'.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것이 가능한 그 나라의 현실이 무척 부럽게 느껴졌습니다. 일하며 운동하고 그 능력을 테스트해볼 경쟁에도 한 번 나서 볼 수 있는 사회의 공기는 어떤 것일까? 일하는 사람은 일만 하고, 운동하는 사람은 운동만 하고, 글 쓰는 사람은 글만 쓰고. 그러면서 각기의 영역에서 무조건 일등만을 목표로 하는 이 사회와의 차이는 무엇일까? 프로만 존재하고 아마추어는 없는 스포츠의 세계와, 작가와 독자의 세계가 철저히 구분된 글쓰기의 세계는 어쩜 같은 모습이 아닐까 하고 생각됩니다. 그런 세계는 참으로 재미가 없는 세계가 아닐까요. 사회운동가가 글을 쓰는 동안은 작가인 셈입니다. 배관공이 버튼맨이 글을 쓰는 동안 그는 작가요, 노동의 현장에선 다시 노동자인 것이라 봅니다. 전업으로 그 영역에 매달려 최상의 기량을 보이는 프로의 세계가 있다면, 일상의 공간에서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는 풍부한 아마추어의 세계도 있다고 봅니다. 그것이 서로 공존하는 것이 아름다운 세계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모두가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세계, 모두가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고 그 가운데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자신만의 특별한 공간을 발견하는 일. 근사하지 않은가. 타인의 삶을 그저 동경하고 늘 관객으로서 대리만족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가 저마다 자신의 인생을 그려내고 그곳에서 자신과 세계의 연결고리를 찾아가는 재미. 그러한 모습이 가득하다면 그거참 아름다운 세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영화의 언어 또한 마찬가지라 보인다. 한글의 사용처럼 영상의 촬영과 편집이 이젠 더 이상 소수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고도의 과학기술이 아니게 되었다. 이제 나도 나의 삶을 영상으로 표현할 수 있다. 나를 주인공으로. 나의 삶을 기록하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를 엑스트라로 그려 낼 수 있다. 세상은 우리의 일상과 우리의 노동을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무엇으로 그려대기 일쑤다. 하지만 마음먹기 나름. 이젠 우리가 스스로 무대의 주인공이 되어 보려 한다. 여기 그런 영화가 있다. 여성대리운전기사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 <밤의 유령>(감독 이창우)이다.
#2. 바디캠으로 바라본 여성대리기사의 일상 / 밤
단춧구멍만 한 바디캠 앵글 저편으로 우리 영화의 무대가 펼쳐진다. 그 무대는 때로는 지루함으로, 때로는 지친 피로함으로, 때로는 분노할 현실로, 때로는 끈끈한 형제애로 둘러싸여 있다. 비극이 벌어지기도 하며, 잔잔한 감동을 실어주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행인 1, 노동자 2가 아니다. 내가 주인공으로 선 이 세계에서, 나는 나의 인생과 내 주변을 둘러싼 세계의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이런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나는 이 위험한 밤의 세계에서 누군가의 귀갓길을 책임지는 소중한 사람이다. 이 일터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술을 한잔 걸친 사람들이다. 대부분 알코올의 힘으로 감정이 고양된 사람들. 한잔 걸친 탓일까? 그들은 쉽게 마음을 열고 밤의 유령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길 즐긴다. 가족 걱정, 동료에 관한 이야기, 업무에 대한 불만, 사회의 현실에 대해 잔잔한 대화들이 매일매일 이어진다. 이것이 나의 일상 나의 노동이다. 지루하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하지만 그럭저럭 흘러가는 세계.
우리 인생의 단조로움을 덜어주기 위해서인지, 이 다큐멘터리의 지루함을 덜어주기 위해서인지. 고맙게도 악랄한 빌런들이 출현하기도 한다.
영화가 시작되고 전반 15분이 지날 무렵. 첫 번째 빌런이 나타난다. 말쑥한 양복을 입은 노신사. 경유 비용 3000원에 대한 실랑이 끝에 불쑥 폭언을 내뱉는다.
"됐어요. 그냥 말하지 마. 짜증 나니깐."
(긴 침묵 후) "거 XX 기분 좋게 가야지 에이."
"그래서 대리하는 것들은 평생 대리만 하는 거야"
(콜택시 회사에 전화한다) "아니 어디서 이런 개 뭐 같은 기사를 보내 가자고... 아니 솔직히 그 운전도 개X같이 하는데,.. 내 지금 3년 단골인데 왜 이런 기사를 배차를 했을까? ... 운전을 개X같이 하고 있어 지금... 야 끊어! (고함)"
악역의 출연시간이 1분여 정도이지만, 그의 존재감은 강렬하며 그 대사는 오래 잊히지 않는다. 만일 극영화였다면 어땠을까. 이것이 연기력 충만한 어느 악역 배우의 대사였다고 생각해보자. 카메라 앵글이 자연스레 빌런의 얼굴을 비추고 거친 표정에서 악담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물론 그 연출을 바라보는 것도 화가 나는 일이겠지만 솔직히 바디캠의 영상보다는 마음이 좀 덜 불편했을 것 같다. 오직 정면의 핸들만 바라보는 바디캠의 앵글 속에서 음성으로만 전달되는 저 빌런의 거침없는 욕설과 모욕. 그리고 긴 침묵. 정말이지 참아주기 힘들었다.
"그래서 대리하는 것들은 평생 대리만 하는 거야"
우리 사회에서 참으로 흔하게 발설되는 우리 노동에 대한 모욕이다.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형태의 모욕이 흔할까? 각기 문화마다 이런 식으로 직업에 대한 멸시와 차별이 있을 순 있겠지만, 한국사회만큼 강한 곳이 또 있으려나 싶다. 경쟁시험을 요구하지 않는 직업, 학력이나 특별한 자격을 요구하지 않는 직업, 자격증을 얻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한 직업은 우리에게 친근함이나 편안함으로도 충분히 다가올 수 있을 터인데, 그러기보다는 멸시와 차별의 대상으로 먼저 읽힌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래서 너는 000인 거야'라고 말하는 000안에는 이 사회를 유지하는 필수적 노동들이 빼곡히 배치된다. 입고, 먹고, 자는 일들. 살아 숨 쉬는데 필요한 모든 노동이 '그래서 너는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이라고 모멸과 멸시를 담아 내뱉어진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는 모든 일상을 타인의 노동으로 온전히 유지하면서도, 그 소중한 타인의 노동을 이런 식으로 모욕한다. 그건 나의 가족, 이웃, 친구와 동료, 그리고 나 스스로를 모욕하는 행위가 아닌가. 왜 그럴까.
두 번째 빌런은 직접 출현하지 않았다. 두 번째 빌런은 영화가 시작된 후 35분 무렵 출연자와의 인터뷰에서 간접적으로 전해진다. 이번엔 여성대리운전기사에게 성매매를 요구하는 승객이다.
'제가 일당을 챙겨 줄테니깐...나랑 한잔하시겠습니까?'
빌런은 성매매를 직접 요구하진 않았다. 하루 일당을 챙겨 주겠다느니, 거절하시면 나는 20만 원을 아끼게 되니 좋다니 하며, 은근슬쩍 성매매의 가격에 대해서까지 언급했다. 졸렬한 동시에 영악한 인간. 아. 세상에 이런 자들이 보통사람의 모습으로, 평화로운 나의 일상에, 내 친구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공포스럽기 그지없다. 가면을 쓰고 칼을 든 채 주인공을 뒤쫓는 어느 영화만큼이나 무섭고 서늘한 장면이다.
#3. 영화와 같은 삶, 그보단 우리네 삶과 같은 영화
이 다큐멘터리는 2023년 3.8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노회찬 재단에서 부산지역의 여성 대리운전 기사 30명에게 장미꽃과 함께 바디캠을 선물한 것을 계기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부산의 여성 대리운전 기사들은 영화에서 보듯이 여러 가지 어려움을 저마다 가지고 있었고 작은 도움이나마 서로 나누기 위해 상호부조 모임을 구성했는데, 그 활동은 영화에도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노동을 영화로 기록하기로 했다. 그들의 안전을 위해 부착한 바디카메라는 영화의 중요한 도구 중 하나가 되었다. 이듬해인 2024년 3월엔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최초의 상영회를 하기도 했다. 영상으로 담은 담담한 일상의 나열을 보며 동료들은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단조롭고 지루한 화면, 흔들리는 영상. 손으로 들고 찍는 기법을 핸드헬드라고 부른다고 하던데, 바디캠을 통한 이것은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궁금하다. 체스트 헬드라고 하면 되나? 한 곳만 응시하는 영상의 지루함, 끊임없이 흔들리는 앵글의 불안함은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관통하는 이들의 일터가 어떤 곳인지 그 모습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늦은 밤 화장실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 뛰어다니는 모습, 화장실 입구를 찾기 위한 다급한 부탁의 목소리가 바디캠을 통해 전달된다. 영화의 앵글이 초점도 없이 위아래로 흔들리고, 영화를 지켜보는 나도 함께 다급해진다.
영화의 흐름에는 특별한 개연성이 없다. 그저 일상을 일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내가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습인 것을. 갑자기 찾아오는 질병과 죽음, 연인과의 이별, 난데없이 나타나는 숱한 빌런들. 그렇다. 우리 인생은 아무런 개연성도 없고 부드러운 전개과정도 없이 일어나고 사라진다. 이 영화처럼.
60분의 짧지 않은 노동의 기록. 첫 작품을 완성하신 것에 축하의 박수를 드린다. 멈추지 말고 또 다른 삶의 기록들을 계속 만들어 보여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문득 나도 영화 속의 대리운전 기사들처럼 인사를 드려보고 싶다.
"좋은 콜 받으세요~"
(<밤의 유령>은 오는 21일부터 25일까지 열리는 제26회 부산독립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습니다. 이 글을 쓴 양성민 씨는 2024년 전태일 문학상 르포 부문 수상자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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