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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세력 득실한 곳에서 농성을? 그렇게 바뀌고 진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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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세력 득실한 곳에서 농성을? 그렇게 바뀌고 진보한다"

[인터뷰] 박진 전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 下

"마음 같아선 다 쏟아내고 싶다. 하지만 그 화살이 직원들한테 돌아갈 것을 알기 때문에 솔직한 마음을 다 털어놓을 수 없다."

최근 국가인권위원회 문을 박차고 나온 박진 전 사무총장은 인터뷰 시작 전 이 전제를 꼭 언급해달라고 했다. 누군가 반(反)인권위원들의 행태를 고발하면 직원들이 응징을 당하는 현실, 박 전 사무총장이 말한 그 '전제'는 장막에 가려진 지옥 같은 지금 인권위의 현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인권 '운동'이라 이름 붙일 경력만 30여 년, 버티고 싸우는 데 잔뼈가 굵은 인권운동가 박진. 그런 그도 안창호·이충상‧김용원 '반인권 삼위일체' 지도 체제 앞에선 버티지 못했다. 그가 인권위 안에서의 역할을 스스로 내려놓았다는 것은 지금 인권위가 더는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뜻이나 매한가지다.

박 전 사무총장은 차라리 '인권위 암흑기'로 불렸던 현병철 위원장 시절을 그리워했다. "촛불집회같이 정치적으로 엮일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개입했지만 그 외 위원회가 돌아가는 데 대해 크게 반대하거나 국제사회가 우려할 만큼의 행보를 한 적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반면 안 위원장과 두 상임위원은 인권위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는 게 그의 평가다.

'사람 몇 명 바뀐다고 조직이 바뀌겠어'라는 가벼운 우려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안 위원장이 취임하자마자 인권위는 학교 내 학생 휴대전화 수거 문제와 관련해 10년 축적된 입장을 하루아침에 뒤집었다.

이는 앞으로 펼쳐질 인권위 급변 사태의 예고편에 불과한 걸까. '성소수자 혐오' 논란에 휩싸였던 안 위원장은 위원회가 차별금지법과 관련해 국회에 보고한 내용에 대해 "제 의사와 다르게 전달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 전 사무총장은 "차별금지법에 반대 의견을 낸다면 그때부턴 돌이킬 수 없다. 그 인권위는 망해야 한다"며 "나도 가만 있지 않을 것"이라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인권위를 떠나는 날, 그는 안 위원장에게 장문의 편지를 남겼다고 했다. "개인의 의견보다는 조직을 따라달라"는 당부와 함께 "직원들을 지켜달라"는 부탁을 했다. 정작 직원들은 "이젠 우리가 할 수 있다. 그러니 마음 가볍게 가셔도 된다"며 손을 흔들었다. 그는 인권위를 23년 세월 동안 지켜 온 직원들을 믿기로 했다.

박 전 사무총장은 인권 운동에 매진했던 30년의 세월을 훑으며 "인권위는 망가져도 인권은 변화·발전한다"고 했다. "당장은 안 보이는데 긴 시간이 지나면 '내가 주장한 게 이만큼 와 있네' 하는 때가 온다"며 낙관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그는 당장은 "쉬는 게 목적"이라면서도 새로운 인권 의제, 이슈들을 나열했다. "해보고 싶다"고 했다.

다음은 지난 4일 경기도 수원시 모처에서 박 전 사무총장과 함께 인권위 그리고 인권운동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나눈 대화 전문이다.

▲박진 전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의 퇴임식 모습. ⓒ박진

(☞지난 기사 보기 : "안창호 인권위가 차별금지법 반대? 가만 있지 않겠다")

"문서 한 장이 때로는 세상을 바꾼다"

프레시안 : 인권 운동을 업으로 삼게 된 계기가 있나.

박진 : 글쎄, 나는 그렇게 인생을 계획적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다. (MBTI 상) 전형적인 'P' 체질이다. 그냥 나한테 주어지는 일, 그 순간에 흥미 있는 일,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이 있으면 머리로 생각하는 와중에 몸이 벌써 거기 가 있었다. 내가 그런 편이다. 그래서 인권 운동을 업으로 생각했던 게 언제였는지도 기억은 못 하겠는데 어느 순간 보니 내가 했던 일을 사람들이 '인권 운동'이라고 얘기하고 있더라. 다산인권센터에 처음 들어간 게 1997년도였고, 학생운동부터 치면 내가 91학번이니까 얼추 30년 넘었겠다. 30년이면 구렁이 소리 듣는데 벌써 세월이 그렇게 됐다.

프레시안 : 오랜 기간 활동가로 살다가 공직사회로 넘어오는 것이었으니 고민했을 것 같다.

박진 :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일이었으니 당연히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몇 분이 추천을 해주셨다. 송두환 위원장님과 면식이 있는 게 아닌데 다른 분들이 송두환 위원장님께 사무총장으로 추천을 해도 되겠냐 묻더라. 송 위원장이 연배에 비해 인권 감수성이 풍부하시고 인품이 좋으신 분이니 같이 해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을 주셨다.

사실 그전까지 한 번도 관직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사무총장직 제안을 받았을 때가 개인적인 아픔이 있던 시기라 아무것도 하기 싫고 쉬고 있었던 때였다. 내가 다시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기도 해서 그때 제안이 좀 귀에 들어온 것 같다.

프레시안 : 다른 활동가들 의견도 좀 들어봤나.

박진 : 아주 가까운 분들과 상의를 했는데 대부분 반대했다. "인권위를 왜 가냐. 공직 사회에서도 제일 힘들다"고 하도 그러시니까 오기가 생겼다. 그렇게 힘들어? 그러면 내가 한번 해볼까. 실수였다(웃음). 농담이다. 힘들긴 엄청 힘들었는데, 내 생애 다시 이런 시기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 힘들었는데, 그래도 좋은 분들을 만나서 결론적으론 좋았다. 송두환 위원장님도 좋았고 우리 직원들도 너무 좋았고, 시민사회 동료들이랑도 늘 좋았다.

프레시안 : 밖에서 인권위를 비판해 오다가 인권위에 들어와 비판을 받는 입장이 된 셈인데. 밖에서 본 인권위와 안에서 본 인권위는 어떤 게 달랐나.

박진 : 외부 활동가든 인권위 직원이든 보는 풍경은 저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 인권이 필요한가라는 근본적 질문은 똑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일하는 방식이 다르다. 활동가들은 어떤 사안이 발생하면 법이나 규정이 있건 없건 간에 돌파를 해내야 한다. 그게 훨씬 더 빠르고 그런 역할이 분명 필요하다. 반면 인권위는 모든 게 문서를 통해서 이뤄진다. 문서를 통해 위원회를 설득하고 심의하고 의결하는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오래 걸린다. 대신 완결성이 높다. 힘이 있다. 그 문서 한 장이 때로는 세상을 바꾼다. 그래서 인권위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프레시안 : 재임하는 동안 동료‧후배 인권 활동가들한테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나.

박진 : 많이 혼났다. '왜 그것밖에 못하냐. 왜 빨리 못하냐. 좀 더 현장과 소통 많이 해라'. 그런 지적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죄송합니다. 언젠가는 해내겠습니다' 해야지 별 수 없다. 그러다가 이제 제가 핍박받는 존재가 된 후부터는 '아이고 힘들어서 어떡하냐' 하셨다. 아마 이충상‧김용원 위원이 없었으면 욕 더 많이 먹었을 것 같은데 두 사람 덕분에 욕을 덜 먹은 것 같다(웃음).

프레시안 : 인권위와 인권운동은 어떤 관계여야 하는가

박진 : 서로 상호 협력하면서 비판하는 관계다. 사실 일방적 비판이다. 그렇지만 비판과 견제 비판과 견제 협력 모든 것이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공무원들은 인내해야 한다. 월급에 다 인내 비용이 저는 있다고 생각한다. 월급을 많이 받으면 많이 받을수록 더 많이 인내하는 것이 맞다. 그래서 사무총장보다는 위원장 인내를 많이 해야 된다.

▲박진 전 인권위 사무총장의 퇴임식 모습. ⓒ박진

"'그분들'이 내가 먹을 욕을 다 가로채갔다"

프레시안 : 2년 9개월간 사무총장 일을 하면서 성과로 꼽을 만한 일이 있다면 어떤 게 있나.

박진 : 기후위기 관련해서 헌법재판소에 냈던 의견이 반영돼서 헌재가 기후 소송에 대해 헌법불합치 판단을 내렸다. 그게 가장 먼저 생각이 난다. 그리고 이태원 특별법 제정도 저희 의견표명이 굉장히 많이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사건 장기화가 심각한 수준이었는데 송두환 위원장이 계시는 동안 많이 개선됐다. 어떤 직원들은 '이게 풀릴 수 있나' 했는데 '어느 순간 풀리더라'라고 했다.

그리고 직원들과 대화를 많이 했다. 정보사회 인권 문제나 기업 인권, 기후 위기, 재난 참사, 지역 인권, 평등법과 국가인권정책기본법 만들고 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많이 가졌는데 이런 것을 성과로 기억하고 싶다. 항상 젊은 직원들한테 인권위가 할 일이 너무 많다고, 인권은 '블루 오션'이라고 했다.

프레시안 : 젊은 직원들이 그런 의제들에 대해 관심이 있던가.

박진 : 우리 직원들이 정말 똑똑하다. 그래서 가끔 물어봤다. 인권에 대해 원래 관심이 있었느냐고. 다들 여기 와서 처음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근데 어떻게 이렇게 잘하나 싶다. 그게 공무원이다. 내가 좋은 리더였다는 게 아니라, 공무원들이 일할 기회를 주는 좋은 리더를 만나면 정말 최대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럴 기회를 못 얻으면 어느 때보다도 무능해질 수도 있는 게 관료들인 것 같다.

프레시안 : 직원들한테 또 어떤 이야기를 주로 했나.

박진 : 좀 더 좀 많이 소통하라고 했다. 끊임없이 얘기했던 것 중 하나가 부서 간의 벽 좀 낮추고 시민사회하고 소통도 더 많이 하고 많이 만나라. 회의만이 소통이 아니다. 전화도 자주 하고 피드백도 많이 드리라고 말했다.

프레시안 : 직원들과 사이가 좋았던 것 같다.

박진 : 그건 내 생각이고… 그런데 조건이 그랬던 것 같다. 난 어쨌든 직원들 지키려고 상임위원들하고 갈등 관계였으니까. 사실 우리 직원들이 원래 상임위원들한테 별 관심이 없다. 그들은 인사나 평가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원래 같으면 위원장, 사무총장이 욕을 많이 먹는 자리인데 이것도 그분들이 제가 먹을 욕을 다 가로채신 덕분에 욕보다는 격려를 많이 받았다(웃음).

▲박진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이 21일 오후 경남 거제시 아주동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서 유최안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과 면담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2022.7.21 ⓒ연합뉴스

"혐오세력 득실득실한 데서 얼굴 드러내고 농성, 놀라웠다"

프레시안 : 인권 운동 영역에 30년을 몸담았다. 그때와 지금의 인권 운동이 달라진 게 있다면 어떤 것인가.

박진 : 나는 '낀 세대'다. 86 다음 세대라 항상 86 그늘 안에 있었다. 그래서 예전에는 인권이라 함은 곧 반독재 민주화였다. 자유권 투쟁이 중심이었다. 그러다가 1997년 IMF 사태로 대량 해고가 많아지면서 노동권이 주요 이슈로 슬금슬금 부각됐고 그때부터는 사회권 중심의 활동을 쭉 해왔다. 그리고 지금 가장 정치적인 이슈는 차별과 혐오인 것 같다. 혐오와 차별 문제가 소수자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전 세대가 공감하는 인권 의제가 된 것 같다.

최근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을 보고 '이건 정치물이다'라고 생각했다. 꼭 봐라. 너무 재밌다. 이 무거운 주제를 어떻게 이렇게 캐주얼하게 다뤘나 싶다. 반독재 민주화에서 차별과 혐오, 자기 정체성을 중심으로 하는 인권 문제로 주제가 바뀌면서 이제 세대가 바뀌었구나 싶었다.

인권 운동을 하면서 정말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있다, 정확히 몇 년도인지 모르는데 한 20년 됐을 것이다. 전국의 인권 활동가 모이는 첫번째 대회가 열렸는데, 그때 '사진 안 찍기'라는 규칙이 있었다. 성소수자분들이 있을 수 있는데 잘못하면 아우팅이 될 수 있으니까. 그랬는데 그로부터 한 10년 흘렀나. 박원순 시장 시절에 성소수자분들이 서울시청을 점거해서 농성한 적이 있었다. 그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혐오세력들이 득실득실한 청사에서 얼굴을 드러내고 농성을 해? 10년 전만 하더라도 정말 안전한 인권 활동가들끼리 하는 대회에서도 자기 초상권을 걱정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이렇게 바뀌었다는 게 놀라웠다.

박근혜 시절에 인권위가 후퇴했다고 하는데, 그건 자유권적 시각, 권력 중심적인 시각에서의 이야기고, 인권은 이미 그렇게 변화하고 발전하고 있었다. 그래서 믿음이 있다. 인권위가 잠깐 후퇴는 할 수 있을지언정 인권은 전진하고 진보한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인권 운동에서 또 다른 변곡점이 있었다면?

박진 : 한국 현대사에서 인권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미투(MeToo)' 운동을 꼽을 수 있다. 그전에 있었던 촛불보다도 훨씬 더 강하게 한국을 바꿨다는 생각이다. 촛불항쟁의 한가운데서 느낀 것은, 대통령 하나만 바꾸고 사회 제도는 못 바꾸는 보수적인 혁명이라고 생각했다. 87 민주화 운동을 통해 민주주의 질서가 생겨났는데, 촛불 혁명을 통해선 정권 말고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그래서 답답했다. 그때 촛불 광장에서 한 청년 노동자가 그랬다. "박근혜가 퇴진하면 내 월급이 오르나. 빈곤이 사라지나. 나는 광장에선 기쁘지만 광장을 벗어나 버스를 타면 비정규직 단기 노동자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 말이 너무 가슴 아팠다. 그러고서 딱 일 년 뒤에 미투가 터졌다. 흥분됐다. 요즘 느끼는 지금의 사회적 변화들도 미투로부터 촉발된 것이 굉장히 많다.

사회는 그렇게 발전했다. 그런데 1년 전부터 인권위가 이상해졌다. 인권위에 출근만 하면 초근대화 사회였다. 아침마다 외모 평가를 들어야 하고, 직원들이 결혼했는지 안 했는지 묻는다. 왜 남의 사정들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지…1년 전만 하더라도 그런 일은 별로 없었다. 어느 순간 인권위의 시간이 멈췄다고 느꼈다.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인권은 원래 논쟁적…국민 설득하는 게 인권위의 일"

프레시안 : 안창호 위원장이 인권위원장 자리에 내정된 후로 그간 잠잠했던 차별금지법 논쟁이 불붙은 느낌이다.

박진 : 권을 두고 흔히들 보편적 인권이라고 하지만, 인권은 한 번도 보편적이었던 적이 없다. 인권은 원래 논쟁적이다. 미국 사회에서도 1960년대 되어서야 짐크로법(공공시설에서 백인과 유색 인종을 분리하도록 한 법)이 폐지됐다. 그때라고 논쟁이 없었겠나. 무수히 많은 논쟁을 거치며 사회가 변화하고 발전하고 성숙하는 것이다. 누구나 동의하는 인권보다는, 그렇지 않은 곳에 인권이 있다. 지금 가장 논쟁인 이슈가 성소수자 문제라면, 그에 대한 국민 정서를 설득하는 게 인권옹호자들의 일이고 인권위의 일이다. 보편적 인권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논쟁을 피해가는 보편을 찾는다면 인권위가 할 일은 없다.

프레시안 : 차별금지법에 유독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 '남성이 불순한 의도로 여장하고 여자 화장실에 가도 처벌 못 하는 게 차별금지법이다' 라는 식으로 퍼지는 형국이다.

박진 : 그런 행위가 범죄에 해당하면 그건 법으로 규율하고 처벌하면 될 일이다. 여장을 하든 남장을 하든 그런 것 때문에 누구든 차별받아선 안 된다는 법을 반대하는 논리로 들이대는 게 너무 얄팍하지 않나. 내가 평생 소수자로 살면서 겪는 처참함, 일상이 파괴되는 일을 막는 것과 그런 걸 비교할 게 되나. 며느리가 사위면 어떤가. 도대체 무슨 상관인가.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많이들 반대하는지도 따지고 봐야 한다. 갤럽 여론조사에서도 아니었고 위원회가 조사했을 때도 아니었다.

우리 딸이 학교 다닐 때 '내 남사친이 화장하는 걸 좋아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특이하겠다' 했더니 딸이 이렇게 답했다. '뭐가 특이해? 걔가 좋아하는 건데'라고. 물론 내 딸이라 내 영향을 조금 받긴 했겠지만, 지금 20대는 정말 그런 식이다. 이해를 못 하겠다? 이해하려 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 시대는 바뀌고 있다. 그게 뭐가 문제냐고 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아지는 시대다.

프레시안 : 인권위가 워낙 파행되고 있어서인지 지금의 인권 운동이 '인권위 지키기'로 귀결되는 경향이 없지 않다.

박진 : 지금은 내가 인권 운동의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제3자로서 말하겠다. 아무래도 가시화된 영역이 그러니까 그 지적도 맞다고 본다. 그렇겠지만 인권 단체들이 이제는 스펙트럼이 너무 다양해졌다. 어디는 고공농성 연대 투쟁 가고, 누구는 이태원 참사 유가족과 같이 있고 누구는 기후 운동하고 정말 다양하다. 그래서 드러나는 모습만으로 지금의 인권 운동 양상이 어떻다고 판단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리고 인권 운동가들이 인권위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결국 인권위가 제 역할을 해야 사회적 약자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렇게라도 견제하지 않으면, 지금 인권위는 차별금지법 반대 의견을 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정말 그렇게 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박진 : 정부는 반대할 수 있다. 국회도 반대할 수 있다. 정무적 판단을 하는 곳들이니 그건 어찌할 수 없다.(동의한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인권위가 그래선 안 된다. 아무리 인권위가 망가진다 하더라도 해선 안 되는 게 있다. 헌법과 국제인권규범을 정면으로 거스른다면 그때부턴 돌이킬 수 없다. 만약 지금 인권위가 정말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의견을 낸다? 그럼 그 인권위는 망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나서서 인권위를 가만 안 둘 거다. 그런데 언젠가 차별금지법은 반드시 만들어질 것이다. 그런 미래를 생각해도 차별시정기구로서 인권위를 망치는 행위 아닌가? 인권과 인권위 미래를 망치는 결정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개신교계 임의 단체인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 조직위원회'가 동성결혼 합법화와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2024.10.27 ⓒ연합뉴스

프레시안 : 인권위가 무력하니 보호를 받아야 할 약자들이 위축되고 절망감에 젖어 드는 느낌이다. 이런 절망감을 타파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나.

박진 : 그래도 인권위를 찾아야 한다. 먼저 포기하고 인권위 가봐야 소용없다고 한다면 더 가망이 없어진다. 정말 나도 우리 국민, 시민한테 너무 죄송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그럼에도 진정서 내셔라, 기각되고 각하되어도 가져오시라고 하고 싶다.

프레시안 : 동료‧후배 활동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박진 : 우리 딸이 내 장점으로 꼽는 게 '주제 파악을 잘 한다'는 것이다. 감히 내가 무슨 말을 하겠나. 그냥… 활동가들 지금 정말 힘들 것이다. 열심히 한 만큼 결과물도 있고 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니 답답할 것이다. 그런데 조금 긴 시간 경험했던 것을 반추해보니, 언젠간 풀렸다. 놀랍게도 지금 당장은 안 보이는데, 긴 시간이 지나면 '내가 주장했던 게 이만큼 와 있네?' 하는 순간이 온다. 그런 낙관을 가지면 지금 당장의 어려움보단 이겨낼 힘이 생기지 않을까. 아까 20년 전의 인권 활동가 대회에서 서울시청 점거 농성까지 변화 말씀드린 것처럼, 사회는 변한다. 문정현 신부님이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어느 날 와보니까 이만큼 사람들이 오더라'는 것이다.

프레시안 : 아직 사각지대로 남이 있는 인권 영역이 있다면? 또는 꼭 다뤄야 하는 인권 의제가 있다면?

박진 : 사무총장으로서 마지막 현장 방문지이기도 했던 한국옵티칼 문제를 눈여겨 보고 있다. 외국인 투자기업은 기업이 '먹튀'하고 떠나면 노동자들이 방법이 없다. 그래서 외투 기업들에 대한 기업 감시, 사회적 책임을 강제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본다. 지금은 그 방법이 전무한데 이에 대한 정책을 할 수만 있다면 해보고 싶다. 그것 말고도 하고 싶은 건 너무너무 많다. 지방 인권조례가 다 무너지고 있는데 이를 막기 위해선 상위법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인권기본법이고 학생인권법이다. 그런 법들을 제정해야 한다. 그리고 번번이 일어나는 재난 참사를 대응하는 상설적 재난기구를 설립하도록 하는 법안을 만들고 싶다.

프레시안 : 다시 활동가로 돌아가겠다는 말로 들린다. 향후 계획이 있나.

박진 : 지금은 쉬는 게 목적이다. 너무 지쳤다. 나를 돌보고 싶다. 그러다 충분히 쉬면, 인생이 작정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른다. 뭔가 또 닥치면 하지 않을까 싶다.(끝)

▲박진 전 인권위 사무총장. ⓒ프레시안(서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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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어리

매일 어리버리, 좌충우돌 성장기를 쓰는 씩씩한 기자입니다. 간첩 조작 사건의 유우성, 일본군 ‘위안부’ 여성, 외주 업체 PD, 소방 공무원, 세월호 유가족 등 다양한 취재원들과의 만남 속에서 저는 오늘도 좋은 기자,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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