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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는 왜 유토피아를 만들지 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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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는 왜 유토피아를 만들지 못했나?

[인문견문록] <사회주의, 생동하는 유토피아>

현대를 대표하는 폴란드 출신 유대인 사회학자이자 사상가 지그문트 바우만은 1976년 소비에트연방이 활력을 거의 잃어가던 즈음에 책을 낸다. 책의 이름은 <사회주의, 생동하는 유토피아>(오월의 봄 펴냄, 윤태준 옮김)이다. 그는 책 첫마디에 이런 글을 인용한다. "사회주의는 유토피아의 모습으로 19세기 유럽을 갑자기 덮쳐왔다." 사회주의는 과거 많은 이들에게 유토피아를 의미했다. 바우만은 우리가 어떻게 유토피아를 상실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새로운 유토피아의 설계를 위한 작은 사족 하나를 단다. 그의 논지를 따라가보자.

바우만은 우선 현대인들에게 '실패한 이상주의'와 동일한 의미를 가진 유토피아의 개념을 새롭게 논한다. 그는 이념이라는 고정된 생각의 현실화 여부에만 주목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미래의 일은 인간의 실천에 달렸고 언제나 가변적이다. 역사가 어느 방향으로 틀어질지는 인간은 알 수가 없다. 대신 바우만은 이런 제안을 던진다. "우리가 던져야할 올바른 질문은 그 비전이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에 의해 검증되었는지 반박되었는지가 아니라, 대중의 인식 속에 미리 자리 잡은 그 비전의 존재가 어떤 방식으로 또 어느 정도로 사건들에 영향을 미쳤는지가 되어야 한다."(상기책 인용 미기재시 동일) 성공의 여부만이 우리에게 중요한 유일한 지점이라면 역사 속 실천을 수행할 간 큰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된다. 중요한 것은 실천을 통해 역사를 만들어가고자 했던 사람들의 분투 그 자체였다. 개틀링 기관총이 일본에 좀 늦게 도입되어서 동학군이 이겼다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동학군의 진정한 의미는 승리여부에 있지않고 부당한 외세에 맞섰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바우만은 프랑스 소설가 아나톨 프랑스의 말을 하나 인용한다. "지난 시대에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인류는 여전히 벌거벗은 채로 동굴 속에서 비참하게 살고 있었을 것." 신부이자 철학자 테야르 드 샤르댕은 이렇게 말했다. "결국 과학적으로 이치에 맞는 쪽은 '현실주의자'가 아니라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이다." 바우만은 여러 사람들의 말을 인용한 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유토피아가 수행하는 엄청난 역할에 마땅히 기울여야 할 만큼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서는 사회적 삶을 사실상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바우만은 유토피아가 우리에게 주는 이점 몇가지를 말한다. 먼저 유토피아는 현재를 상대화한다. 현재화되지 않은 유토피아가 존재하기에 누구에게도, 어떤 주장에 대해서도 비판적일 수 있다. 예수에게 하느님 나라가 있듯, 유교에는 요순시대가 있었다. 눈앞의 권력자라 하더라도 유토피아적 대상과의 비교는 피해갈 수가 없었다. 유토피아는 실제 역사 속에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한 적이 있다. 권력분립주의자인 제임스 해링턴의 저서 <오시아나 공화국>에 감명받은 사람들이 미국 헌법을 제정했다. 이렇게 유토피아는 인간의 행위의 결과물이기 이전에 강력한 동인이자 추동력으로 역사 속에 개입한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의 특징은 유동성이다. 고정적 제도, 생각이 흐물해져서 유동적이 된다. 고체가 주던 안정감은 어느새 불안감으로 변했다. 이후 그는 '액체 근대'라는 개념으로 더욱 생각을 발전시킨다. 안정된 것은 모두 사라져간다. 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되면서는 근대의 유동성은 극대화되어간다. 고정된 일자리가 주는 안정감은 자본주의국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성(性) 또한 개인의 선택에 따른 것이라는 젠더이론도 등장했다. 고정된 것이 없기에 자유는 확장되었지만 불안도 극대화된다. 현대인을 특징짓는 대표적 현상은 '불안'이다. 대인공포증은 어느새 흔한 일이 되었었다. 고체적 세계가 사라진 후 자유와 불안이 함께 찾아들었다. 현대 자본주의 국가는 집단적으로 자살하는 중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때 유토피아로 생각되었던 소비에트연방의 실패를 곱씹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적 자유주의의 논리적 확장이었다. 자본주의가 공동체를 파괴했듯 자본주의적 자유주의도 기존의 완고하던 전통적 세계관을 무너뜨렸다. 자유주의는 무엇보다 공동체에 속박당하던 개인에 주목했다. 개인을 속박하는 그 무엇이라도 자유주의의 타도대상이 되었다. 전통 사회가 부여하는 구속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강조점이 경제적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로 옮아가면서 사회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이렇게 해서 사회주의 유토피아에서는 '자유'에 더해서 '평등'이 최상위 가치로 등장한다. 양자는 긴장관계를 조성한다. 저자의 말이다.

"자유에게는 그와 동등한 힘이 부여된, 평등의 원리라는 동반자가 생겼다. 이제 하나가 아닌 두 개의 최상위 가치가 존재하고, 그들의 양립 가능성이 조금의 과장도 없는 논쟁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제 이율배반이 하나의 규칙이 된다." 문제는 자유와 평등의 충돌을 막을 성질이나 원리가 유토피아에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점이다. 특히 프루동의 사상은 자유를 극한의 지점까지 밀고 갔다. 프루동을 경시하는 경향도 있지만 아직도 그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가라타니 고진을 비롯해 온건한 사회주의 성향의 사상가들 다수가 프루동의 자장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저자의 프루동에 대한 언급이다. "프루동 이후로, 사회주의 사상에 집요하게 계속되는 한 가지 흐름은 정의와 평등을 '밑에서부터', 종속과 굴복의 모든 족쇄로부터 자유로워진 개인들의 자발적이고 자연적인 행동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간직해 왔다." 바우만은 프루동에 대해 거리를 유지한다. "무제한적인 개인의 지유를 바탕으로 국가 수준의 통합된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이야기다." 프루동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깊게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다른 진영의 사회주의자들은 강력한 국가기구가 사회정의를 가져오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마르크스 같은 사람들이다. 두 진영의 사람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평가에서도 극적으로 갈렸다. 프루동은 자본주의를 인간성의 본궤도로부터 이탈한 비정상으로 보았다. 이들은 자본주의 이전의 공동체 게마인샤프트(공동사회)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반면 마르크스를 위시한 이론가들은 자본주의의 전통적 사회의 파괴를 일면 긍정적으로 보았다. 자본주의의 잠재력이 극한으로 발현되고 나서야 그 생산력을 기반으로 사회주의가 등장할 수 있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경제적 재구성에만 주목한 마르크스의 사상은 한계도 분명했다. 사회주의 담론에 있어서 경제적 재구성만 강조하는 것에 대해 바우만은 비판적이다. "(경제적 재구성은-필자주)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궁극적인 이상으로 크게 다가올 최종 목표인 '인간 영혼의 궁극적인 해방'을 위한 전제조건이지만 결정적 요인이 되기는 어렵다."

자유와 평등, 사회주의 전망을 둘러싼 자발성과 비자발성은 사회주의 유토피아가 결코 해결하지 못한 난제였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약자를 보호하는 것과 자유 사이의, 박탈을 방지하는 것과 자유 사이의 화해는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확실히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중심적인 이율배반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가 현실 사회주의에서 절망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현실 사회주의는 양자가 잘 조화를 이룬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질 못했다. 약자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보다 나은 사람들에 대한 강압이 수반되었다. 필자는 북한의 수령제나 마오의 대중노선이 양자의 화해를 전략적으로 실행하려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행위의 폭력만이 폭력의 전부는 아니다. 문화혁명, 수령제는 이념적 폭력이었다. 현실의 모호함을 돌파하기 위해 미래의 정신적 건강을 담보로 삼는 것이다. 결국 현실 사회주의 어느 국가도 양자의 조화를 보여주는데 실패했다.

사회주의는 단발의 총성과 전쟁으로 성취될 수 없다. 바우만이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에 주목하는 이유다. 헤게모니가 최종적으로 관철되는 장은 보통 시민들의 민속철학인 '상식'이다. 일반 시민들의 상식이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전장이자 목표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바우만은 지식인의 역할을 거듭 강조한다. 액체 근대가 초래한 불안에 휩싸인 대중은 일상 너머로 나아가기 어렵다. 지식인만이 그 탈주를 감행할 수 있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칸트의 '규제적 이념'으로 설명한다. 규제적 이념은 구성적 이념과 달리 현실화되기 어렵지만 언제나 북극성으로 등장해 지향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리킨다. 규제적 이념으로서의 사회주의 유토피아는 우리에게 실현된 적이 없다. 이 사실이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아직도 추구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바우만도 비슷하게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생각한다. 책 말미에 인용하는 로마서 구절을 보면 그의 생각이 읽힌다.

"보이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하겠는가?"(신약성서 로마서8장 24절)

▲ <사회주의, 생동하는 유토피아>(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윤태준 옮김, 오월의봄 펴냄) ⓒ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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