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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함을 깨닫는 인간만이 멍청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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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함을 깨닫는 인간만이 멍청하지 않다

[안치용의 노벨상의 문장] 도리스 레싱, <앨프리드와 에밀리>

"난 정말 멍청한 여자야. 그걸 이제야 알았어."

"다행히 우리 대부분은 그렇게 고통스럽게 자신의 멍청함을 깨닫진 않는데, 참 불쌍하셔라."

-<앨프리드와 에밀리>(도리스 레싱, 민은영 옮김, 문학동네)

‘문학의 얼굴을 바꾼 작가’로 평가받는 레싱의 생애 마지막 작품인 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에밀리의 대화이다. 소설의 두 주인공 앨프리드와 에밀리는 가상 인물이 아니라 레싱의 부모로, 독특한 방식으로 부모의 이야기를 소설로 만들었다.

<앨프리드와 에밀리>에 나오는 이 대사는 이른바 자아 성찰의 순간을 포착한 것으로 무난하게 이해할 수 있다. 무지로 그동안 인식하지 못한 자신의 현재완료 허물을 돌아보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뜻한다. 다만 주인공 에밀리가 소설과 현실을 막론하고 특별히 멍청한 인물이라서 고통스럽게 멍청함을 깨달았다기보다 멍청한 걸 이제라도 알게 된 특출한 캐릭터라고 해석하는 게 맞다.

레싱의 이 문장은 화자가 우연히 여자일 뿐 이러한 깨달음은 성별을 초월한 경험이다. 여자를 인간으로 바꾸어 써도 문장의 의미가 훼손되지 않는다.

인생에서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것은 종종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 각성이 늦게 찾아올수록 개인적으로 더 큰 충격에 휩싸인다. 깨닫는 게 한계뿐 아니라 허물이면 받는 충격이 더 커진다. 대부분 한계와 허물을 동시에 자각한다.

그러므로 자각은 대체로 회피된다. 자각이 깊이가 더 깊어지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난 정말 멍청한 여자야. 그걸 이제야 알았어."에 대한 "참 불쌍하셔라"로 끝나는 답이 말 그대로 의미는 아닐 것이다. 대부분 사람은 자신의 실수나 무지를 애써 무시하고 신의 도움이라고 할지, 어쩌다 그것이 드러나는 귀한 순간을 의도적 멍청함으로 넘겨버린다. 때로는 그 사실을 평생 모른 채 살아가기도 한다. 드러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보지 않아서이다.

사실 깨달음이 꼭 필요한지도 따져볼 일이다. 멍청함의 폐해가 자신에 국한한다면, 또는 기꺼이 감내할 의향이 있는 소수의 범위에 그친다면 깨달음 없는 삶을 나쁘게만 볼 것이 아니다. 현자만으로 구성된 세상만큼 막막한 세상을 상상하기 힘들다. 차라리 바보만으로 구성된 세상이 더 바람직해 보인다.

멍청함을 지닌 채 (사회적으로) 넓은 범위의 일을 한다면 그건 문제가 된다. 정도 차이이지, 언제나 주변에서 보는 모습이다. 그래서 세상에 문제가 넘쳐난다. 뉴스를 채우는 큼지막한 사건의 태반은 멍청함을 보지 못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대놓고 자랑하는 것에서 비롯한다.

이런 사회적 인물의 공공적 무능과 멍청함과 별개로, 실존적으로, 개인적으로 우리는 모두 멍청함을 뿜뿜하며 살아간다. 멍청함을 깨닫는 행위는 따라서 생각보다 고결한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가를 떠나서 그 불완전함을 마주하는 것은 소수에게나 가능한 어려운 과업이다. 멍청함을 깨닫는 인간만이 멍청하지 않은 인간일 수 있다.

혹은 인용문을 이 해석과 정반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표면적으로는 대부분이 그렇게 고통스럽게 자신의 멍청함을 깨닫지 않는다고 하지만, 레싱이 하려는 말은 그 반대일 수 있다. 즉 대부분이 자신의 실수나 한계 등 멍청함을 깨닫고 깨달음의 과정에서 고통을 경험한다는 반어적 표현으로 보아 무방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스럽게 깨닫지 않는다"는 말은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엔 자신의 실수를 마주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성장통이란 좋은 말이 있긴 하나, 성장과 무관한 고통이 사실 더 많다. 인용문에서 "다행히"라고 한 것은 어쩌면 세상이 다행스럽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기 때문이 아닐까.

<앨프리드와 에밀리>는 고통을 전면적으로 다룬 소설이 아니다. 소설에 고통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고통이 묻어난다. 문학이나 영화에서는 멍청함과 뒤늦은 자각, 그리고 전면적 고통을 다룬 사례가 많다. 영화와 문학에서 취급하는 중요한 주제의 하나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 비극의 맥베스는 권력을 향한 분수를 넘어선 욕망이 고통을 초래하다가 어떻게 예정된 파멸로 귀결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실존적 멍청함은 비극의 흥미로운 소재이다.

주어진 것 이상으로 날아오르려는 욕망에서 결국 실존적 오류를 저지르고 결과는 고통에 그치지 않고 파멸로 이어진다. 파멸의 원인이 오로지 자신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의 이야기는 현재 대한민국의 역사에서도 반복된다. 무능과 멍청함을 욕망과 시운으로 휘감아 우연찮은 상승 기류에 올라탄 야망의 귀결은 추락밖에 없다. 높이 오를수록 더 오래 추락한다. 추락하는 것에 날개가 있는 법이 드물기에 파멸은 불문가지이다.

잠깐 현실과 실용의 이야기를 했다. 문학에선 전술하였듯 멍청함의 자각이야말로, 그 과정의 고통이야말로 영웅 혹은 현자의 휘장이라고 봐야 한다. 알을 깨고 나오는 모습과 닮았다. 고통을 통한 자기 인식과 한계의 각성은 고전 비극의 중요한 특징이다.

고통이 결과인 사람과 과정인 사람은 다르다. 멍청함이 결과인 사람과 과정인 사람 또한 다르다. 멍청함에서 벗어나려면 고통을 겪어야 하지만, 멍청함으로 인한 고통과 멍청함에서 벗어나는 고통은 천양지차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가면, 전자에서는 고통의 원인이 멍청함임을 깨닫지 못한 채 다른 종류의 또는 반대되는 덕목쯤을 그 원인으로 착각하는 사례를 많이 본다. 그럴 때, 멍청함에서 비롯하지 않은 부당한 고통이라고 호소하는 멍청함이 넘쳐나는 부조리한 풍경이 빚어진다. 그런 멍청한 풍경은 보는 것은 또 다른 고통이다. 다행히 다른 고통이 많다. 내 안의 멍청함도 넘쳐나고.

▲Poor Woman Praying(1898) Isidre Nonell(Spanish, 1872-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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