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국제고의 고시엔 대회 우승 이후 한국에서 일본 고교야구와 학원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관련 기사도 꽤 많이 나왔다. 물론 대부분의 기사는 교토 국제고의 기적적인 우승을 다룬 것들이었다.
하지만 내 눈을 사로잡은 건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한 한국 학원 스포츠와 다른 일본 학원 스포츠의 특별한 점을 거론한 기사들이었다. 이런 글을 읽으면서 선수들의 활약상을 고시엔 대회 지역예선부터 지켜보는 일본과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 '최강야구'에서나 야구 유망주들을 볼 수 있는 한국의 차이점이 궁금해졌다.
일본 학원 스포츠 문화를 바꾼 부카츠
일본 학원 스포츠의 최대 자양분은 누가 뭐래도 부카츠(部活)다. 부카츠는 일본 중·고등학생들이 지식 편중 교육에서 탈피해 교과 외 활동에 참여하도록 장려하기 위해 시작됐다.
1968년에 시작된 부카츠에는 스포츠뿐만 아니라 미술, 음악, 영화, 음악 등 다양한 활동이 존재한다. 하지만 각종 스포츠 활동부는 부카츠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과 유사한 치열한 입시경쟁이 펼쳐지는 일본에서 진학 명문교들은 부카츠를 외면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1972년 부카츠를 의무화시켰다. 이 때부터 일본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1주일에 1시간씩 무조건 부카츠에 참여해야 했다.
스포츠와 관련해 부카츠의 순기능은 컸다. 부카츠 의무화 덕분에 일반학생들이 운동부에 많이 가입하다 보니 스포츠의 교육적 가치가 매우 커졌다. 일본 고교에서 가장 인기있는 운동부인 야구부 감독은 이후 현직 교사가 맡는 비율이 늘어났다. 일본을 대표하는 엘리트 야구 선수를 배출하는 것 이상으로 건전하게 야구를 즐기는 학생들을 육성하는 게 고교 야구부의 또 다른 목표가 됐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는 야구부에서만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적지 않은 고교 운동부에는 이 때부터 일반 학생과 엘리트 선수를 꿈꾸는 특기생들이 함께 참여했다. 이를 통해 일반 학생들은 스포츠에 대해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꼭 경기에 직접 참여하지 않아도 운동부에 가입할 수 있었다. 일반 학생들 가운데는 기록원도 있었고 여학생 매니저도 존재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일반 학생들은 매우 자연스럽게 스포츠 팬이 됐다.
반대로 특기생들은 일반 학생들과의 교류를 통해 단순히 스포츠 선수로의 미래가 아닌 일반 사회인으로서도 진로를 모색할 수 있었다. 일본 학원 스포츠에서 '엘리트 스포츠 선수로 성공하지 못해도 인생의 실패자는 아니다'라는 얘기도 이를 계기로 조금씩 설득력을 갖게 됐다.
물론 부카츠는 긍정적인 면만 있지 않았다. 부카츠가 내신성적에 반영되면서 경기 결과에 목을 매는 과열 현상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이를 개선하기 위해 2002년 부카츠를 자발적 선택과목으로 전환했다. 부카츠가 선택과목이 되면서 부카츠를 담당하는 일반교사들은 초과근무 수당을 받지 못했다. 이 와중에 부카츠 담당 일반교사들의 초과근무로 인한 과로사 문제가 대두되기도 했다.
특기생만 있는 스포츠 vs 일반학생과 공존하는 스포츠
하지만 이 같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부카츠가 일본 학원 스포츠에 남긴 유산은 크다. 일본 만화 <슬램덩크>가 이를 잘 보여준다.
<슬램덩크>의 최대 매력은 다양한 캐릭터를 가진 등장인물에 있다. 특기생으로 미국 대학농구 진출을 꿈꾸는 선수, 농구부 여자 매니저, 전력 분석원, 일반학생이지만 식스맨으로 활약하는 선수, 특기생이지만 학업성적이 뛰어난 선수 등이 주요인물로 등장한다.
이런 인물들은 실제로 일본 고교 운동부에 존재하는 구성원들이다. 165cm로 키가 작아 벤치 멤버이지만 농구가 좋아 전력 분석원 역할을 하는 박경태, 취미로 농구를 하는 '안경 선배' 권준호, 농구 실력 이상으로 학업 성적이 뛰어난 채치수 같은 캐릭터는 일본 고교 농구부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물론 농구부 여자 매니저로 등장하는 이한나 같은 학생은 실제로는 매우 드물다.
일본 만화에 자주 등장했던 고교 야구부 여자 매니저도 극소수였다. 심지어 이들은 2017년 이전까지 고시엔 그라운드도 밟을 수 없었다. 2024년 여름철 고시엔 대회에서 도카이다이사가미(東海大相模) 고교의 여학생 매니저로 기록원 역할을 하며 덕아웃에 등장한 오카무라 니와가 화제가 된 이유였다. 한국 고교 운동부에는 엘리트 선수로 성공을 꿈꾸는 특기생만 존재하는 것과는 달리, 일본 고교 운동부에는 이처럼 다양한 학생들이 공존하고 있다.
물론 일본 고교 운동부 가운데에도 특기생으로만 구성된 경우도 적지 않다. 2024년 기준으로 3715개에 달하는 일본 고교야구 팀 가운데 약 10% 정도의 야구 명문교는 실력이 출중한 야구 특기생으로만 구성돼 있다. 이런 학교의 야구부는 현직 교사가 아닌 스타 출신 야구인이 지휘봉을 잡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나머지 일본 고교야구 팀에서는 일반학생들이 적지 않다.
엘리트 선수 배출이라는 목표만 존재하는 한국 고교 스포츠와 달리 일본 고교 스포츠 대회가 학생들의 축제가 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차이는 한국과 일본의 고등학교의 구기 종목 팀 보유 숫자와도 관련이 깊다. 전체 일본 고교의 80%에 육박하는 학교가 야구팀 또는 축구팀을 운영하고 있지만, 한국은 전체 고교 중 채 10%도 안 되는 소수의 학교만이 축구팀이나 야구팀을 운영한다.
<슬램덩크> 모티브에서 야구 테마 펍까지…문화가 된 일본 고교 스포츠
일본에서 고교 스포츠는 '나'의 이야기지만 한국에서는 '그들'의 이야기다. 한국 고등학생들이 직간접적으로 운동부를 경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은 고교 스포츠에 대한 얘깃거리가 대중들에게 크게 회자되지 않는다. 시속 150km의 공을 던지는 투수 유망주나 엄청난 기록을 세운 경우가 아니라면 미디어에서도 잘 다루지 않는다. 이런 분위기는 20년 전 당시 성남고의 괴물타자 박병호(현 삼성 라이온즈)가 4연타석 홈런을 쳐 잠깐 화제가 됐을 때나 지금이나 거의 변하지 않았다.
반면 일본은 고교 스포츠에 대한 소식이 끊임없이 전해진다. 고교 운동부 응원단의 특별한 응원방식이나, 스타는 아니지만 사연이 있는 운동부 학생들의 시시콜콜한 스토리가 끊임없이 소개된다. 일반학생으로 고교 스포츠에 참여한 경험이 있던 일본인들이 이런 스토리에도 관심이 크기 때문이다.
<슬램덩크>에서 투지 넘치는 포인트 가드로 등장하는 송태섭 캐릭터도 이런 배경 속에서 만들어졌다. 1978년 오키나와의 헨토나 고교(辺土名 高校) 농구부는 전국대회인 인터하이 대회에서 3위에 올랐다. 평균 신장 169cm에 불과한 이 팀의 성과는 전국적인 선풍으로 이어졌다. 작은 신장이지만 헨토나 고교의 템포 빠른 공격농구에 매료된 <슬램덩크>의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이 기억을 토대로 송태섭 캐릭터를 만들었다. 송태섭의 고향이 오키나와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일본 고교 스포츠의 꽃인 야구는 다양한 문화를 만들었다. '내 청춘의 기억'으로 요약될 수 있는 일본 고교야구의 문화는 도쿄에 있는 고교야구 테마 펍에서 찾을 수 있다. 펍의 이름은 고교야구사카바 규지엔(高校野球酒場 球児園)이다.
이 펍은 고교 야구에 열광했던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의 놀이터다. 이 곳에는 올해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역사상 최초로 한 시즌 50홈런 50도루를 기록한 오타니 쇼헤이의 고교시절 사진부터 일본 고교야구 명문고의 모자, 유니폼과 배지 등이 빼곡하게 전시돼 있다. TV화면에는 과거 고시엔 대회를 수놓은 수많은 스타들의 플레이와 열광하는 팬들의 모습이 계속 나온다. 심지어 종업원이 내가 응원하는 고교야구 팀과 가장 인상 깊었던 고교야구 명승부를 쓸 수 있는 설문지도 준다.
이 곳에서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은 TV 화면에 나오는 고교 야구 경기를 보면서 학창시절로 돌아간다. 추억을 기반으로 그 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들과 얘기 꽃을 피운다. 고교 야구가 하나의 문화이자 일본인의 일상생활이라는 말을 실감케 해 준다.
저출산으로 인한 학령인구 감소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고교 스포츠의 기반을 닦아 놓은 일본이 부러운 이유다. 단순히 안정적인 스포츠 선수 저변이 아니라 다양한 종목에서 폭넓은 스포츠 팬덤이 존재할 수 있는 일본 스포츠의 저력은 일반 학생도 참여하는 고교 운동부 시스템에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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