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8·15 광복절에 내놓고 대통령실이 명명한 "통일 독트린"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윤석열 정부가 '적대적 통일론'으로 김정은 정권의 '적대적 두 국가론'에 맞불을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윤 대통령은 "자유가 박탈된 동토의 왕국, 빈곤과 기아로 고통받는 북녘 땅으로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확장돼야 한다"며 "한반도 전체에 국민이 주인인 자유민주 통일 국가가 만들어지는 그날, 비로소 완전한 광복이 실현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헌법이 대통령에게 명령한 자유민주주의 평화통일의 책무에 의거해 우리의 통일 비전과 통일 추진 전략을 우리 국민과 북한 주민, 그리고 국제사회에 선언하고자 한다"고 했다.
아마 근래의 역사에서 한국 대통령이 통일 의지를 가장 강력히 천명한 8·15 경축사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통일은 고사하고 한국과 조선(북한)의 적대성만 격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김정은 정권은 동족과 통일 개념을 폐기하고 남북관계가 "적대적이고 교전 중인 두 국가로 교착"되었다는 입장을 분명히 해왔다. 그 이유로 민주든, 보수든 대한민국 정부가 흡수통일을 추구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러한 조선의 선택이 개탄스러운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윤 정부의 통일론은 이러한 조선의 적대적 대남 인식을 더욱 고착화시키고 있다. 윤 정부는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더욱 강하게 부르짖고 있는데, 김정은 정권은 이를 노골적인 흡수통일 시도로 간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윤 대통령은 김정은 정권과 조선 주민을 분리해 전자를 향해서는 반감을, 후자를 향해서는 연민을 쏟아냈다. 그러면서도 조건없는 대화를 제의했다. 이게 양립 가능할까? 대화의 상대인 조선의 정권을 '악마화'하면서 추구한 대북정책의 결과를 우리는 이미 똑똑히 봐왔다.
조선을 "악의 축"이라고 규정해 정권교체를 추구했던 미국의 조지 W. 부시 행정부, '통일몽'에 빠져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라고 했던 이명박 정부, '통일대박론'의 박근혜 정부 시기에 조선은 핵무장을 향해 가속 페달을 밟았었다. 그래도 당시에는 대화가 있었다. 조선이 아쉬운 것도 바라는 것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조선은 크게 달라졌다. 2019년을 거치면서 '안보는 핵으로, 경제는 자력갱생과 자급자족으로, 외교는 중국 및 러시아 중심으로 가겠다'는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남북대화와 북미대화의 문도 굳게 닫아걸었다. 그리고 김정은 정권은 이러한 선택이 만만치 않은 성과를 내고 있다고 자평한다.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해보면, 경제와 식량 문제도 과거보단 나아지고 있다.
윤 정부가 '있는 그대로의 조선'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북한'을 상대로 대북정책과 통일론을 설파하고 있다는 지적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다. 달라진 조선과 한반도 안팎의 정세를 객관적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대북정책과 통일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대북 정보의 편식과 왜곡에 매몰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대화의 상대를 헐뜯으면서 대화를 제의하는 모습에선 일말의 진정성도 느낄 수 없다.
기실 김정은 정권의 '헤어질 결심'도 윤석열 정부의 '통일할 결심'도 하나의 뿌리에 똬리를 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적대성이다. 구체제 해체에 나선 김정은 정권은 적대성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신체제', 즉 '두 국가론'을 들고 나왔고, 이를 '반통일·반민족'으로 규정한 윤석열 정부는 구체제의 적대성, 즉 '흡수통일론'을 더 강하게 부여잡고 있다.
이러한 두 정권의 동상이몽은 한반도 주민들의 불안감과 고단함으로 고스란히 전가되고 있다. 조선의 기아와 빈곤이 과거보단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 한국의 민생과 민주주의·인권·자유의 수준도 눈에 띠게 하락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측 정부는 적대성을 완화하려는 노력보단 오히려 적대성을 정권 유지의 기반으로 삼으려 한다. '변형된 적대적 의존관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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