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왜 가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언젠가 이 행진이 끝나리라는 희망도 없이 그냥 앞으로 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남쪽 야영지를 버리고 떠나기로 결심한 그 날부터 그들은 이렇게 죽을 때까지 이 우물에서 저 우물로 계곡을 따라서 끝없이 행진해야 할 선고를 받은 것은 아닐까?
-<사막>(르 클레지오, 홍상희 옮김, 문학동네)
그럴 때가 있다. 왜 가는지 알지 못하면서 그냥 앞으로 갈 때가 있다. 언제 끝난다는 기약이 없이 그냥 걸음을 걸을 때가 있다. 산행이나 산책을 할 때 욕심을 내서 평소보다 더 가버려서 간 만큼 더 걷느라 후회하는 상황과 다르다. 힘들 때 후회하지만 귀가한 다음에 뿌듯한 모습과 판이하다.
적고 보니 인생을 뜻하는 듯하다. 모든 이의 인생에 이 인용문 같은 측면이 있긴 할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 그의 상황은 은유나 상징으로서 행진이 아니라 실제의 일이었다. 제국주의가 극성을 부린 20세기 초반 아프리카 베르베르 지역에서 일어난 실제의 사건이기도 하다. 픽션과 논픽션이 겹친다. 프랑스 제국주의 지배에 저항한 베르베르 대족장과 그를 따르는 아프리카인들이 프랑스 군대에 학살당한 역사의 한 장면을 르 클레지오가 소설 <사막>에서 재현했다.
국내에 많은 팬을 확보한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는 1940년 세계적인 휴양지 프랑스의 니스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프랑스이었지만 아버지는 영국인이었다. 영어와 불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그는 처음에 영어로 글을 쓰려고 하였으나 영국이 인도양의 모리스(영어식 표기 모리셔스) 섬을 식민지로 삼은 데에 반감을 느껴 불어로 글을 썼다고 전해진다. 모리스 섬에 예민하게 반응한 데는 그의 가계가 영향을 미쳤다.
"나의 외조부는 인도양의 프랑스령 모리스 섬에서 태어났다. 내가 모리스섬에서 살아본 적은 없지만 스스로 모리스섬 주민임을 잊은 적이 없다. 나는 감성적으로 모리스 섬 주민이라고 생각한다"
프랑스와 영국 중에서 프랑스 혈통을 택했지만 르 클레지오는 자신을 ‘비유럽인’으로, 모리스를 고향이라고 불렀다. 이런 생각은 그의 중기 대표작인 <섬>(1995년)에 반영됐다. <섬>은 모리스를 지시한다.
<사막>은 프랑스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에 그치지 않고 아프리카 정신의 탐구로까지 나아간다. 인용문의 그는 '누르'라는 소년이다. 프랑스 제국주의에 맞선 아프리카인의 행진과 실패, 그리고 그 결과인 학살의 현장을 경험하고 살아남은 인물로 그려진다.
누르의 부족은 베르베르 족의 한 갈래인 투아레그이다. 제국주의에 굴복하지 않고 오랜 기간 외세에 맞서 싸워 프랑스의 골칫거리가 된 부족이다. 니제르, 말리, 리비아, 알제리 등의 서아프리카와 북아프리카 일대의 사하락 사막에 산다. 전사 전통이 강해 '죽음의 전사'로도 불렸다고 한다.
투아레그 사람들은 자신들을 베르베르나 투아레그로 부르지 않고 ‘이마지겐’으로 부른다. 베르베르가 어원상 야만인이란 뜻을 갖고, 이마지겐은 그들 언어로 '자유인'을 의미하니 당연한 생각이다. 소설에서 이들은 '청색 인간'으로 표현되는데, 아마지겐은 일상에서 푸른 터번을 두르고 다녀 사하라 사막의 푸른 인간으로 통했다.
소년의 이름 누르는 이슬람 세계에서 밤의 차가운 빛, 즉 달빛이란 뜻이다. 신의 가호나 인도로도 의미가 확장된다.
그러나 소설 <사막>의 주인공은 소년 누르가 아니라 소녀 랄라이다. 누르와 같은 이마지겐 부족이다. 명시적이지 않지만 두 사람이 비교적 가까운 혈연으로 맺어졌을 것 같은 느낌을 풍긴다. 명시적이지 않은 게 소설은 여백과 함축으로 연결을 제시한다.
선대의 그 행진을 받아서 랄라 또한 길을 떠난다. 누르가 사막을 건넜다면 랄라는 지중해를 건넌다. 누르가 전장에서 패배한 채 동족의 장사를 지내고 사막으로 돌아갔다면, 랄라는 프랑스를 ‘정복’하고 다시 바다를 건너 아프리카로 돌아온다. 두 시대, 두 사람의 이향과 귀향은 ‘남→북’과 ‘북→남’이란 공통적 여정이다.
랄라의 길은 빌헬름 마이스터의 길과 마찬가지로 성숙의 과정이다. 부족의 역사를 해원하는 역사적 맥락을 드러내며 개인의 성장소설로도 읽힐 수 있게 썼다. 원래 길이라는 게 처음엔 없는 길을 걸어서 길이 된다. 없는 길을 걷는 사람은 인용문의 누르처럼 아마 왜 걷는지 모를 때가 많지 싶다. 그 길을 걸은 의미가 후대에서야 밝혀지곤 한다.
그래서 없는 길을 걸어 길을 만드는 일이 힘들다. 그 길이 길이었는지가 후대에나 밝혀질 텐데 당사자는 그 밝혀짐을 확신하지 못한다. 누르 같은 소설의 인물은 작가의 구상 속에서 '빛'으로 설정돼 글 안에서 걷지만, 현실의 우리는 어떤 '선고'나 '구상'이 개입했는지 알지 못한다. 자신이 설령 빛이라 한들 빛은 남을 비추지 자신을 비추지 않는 법이다. 확신 부재의 상황에서 걸어서 길이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걷기를 마다하지 않는 게 역사이자 삶이 아닐까. 마다하지 않아야 하는 게.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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