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즈음하여 한국 스포츠의 부끄러운 속살이 드러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이번엔 배드민턴 금메달리스트 안세영 선수의 폭로로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사실 이번 대회 예상 성적은 금메달 5개로 15위 안팎이었지만 우리 선수들이 너무 잘 한다. 반면 협회는 엉망이다.
선수 보호는 뒷전, 임원들은 공짜 해외여행
이번 배드민턴 여자 국자대표 안세영 선수의 주장은 크게 세 가지다.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가 바로 한국 스포츠 고질적 병폐의 총합이라는 점이다.
우선 협회가 선수를 보호하지 않는다. 2022년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서 무릎 부상의 고통을 딛고 금메달 획득 후 협회가 주선한 진료에서 2~5주 재활이면 다시 뛸 수 있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게 아니었다. 심각한 부상이었음에도 곧 대회에 출전해 결국 악화됐다. 이번 올림픽도 그 고통을 안고 뛰어야 했다. 안세영은 "7년을 참았다"며 "내 원동력은 분노"라고 했다. 그의 분노는 선수 보호는 뒷전인 협회에 대한 실망에서 시작됐다.
선수 보호는 뒷전인 협회 임원들은 선수 앞세워 공짜 해외여행을 다녔다. 2018년 중국 대회에 선수 6명은 이코노미석 타고 출전했는데 임원 8명은 두 배 비싼 비즈니스석으로 갔다. 반대여야 하지 않나? 2017년 호주 대회에 역시 비즈니스석 타고 행차한 임원들은 8강전 앞두고 우승 어렵다며 조기 귀국했다. (아마 호주가 재미없어서 일찍 귀국했을 것이다.) 선수들은 결국 우승했다. 대표팀 선발 등 행정도 문제가 많아 선수가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진실을 밝혀달라고 글을 올리고, 선수들이 협회를 직접 고소하기도 했다.
'노예계약' 규정으로 선수들에 군림
두 번째, 안세영은 성인이자 삼성생명 소속의 실업선수임에도 협회가 황당한 규정으로 선수를 소유하듯 좌지우지하며 부리려 했다는 점이다. 대표팀 소속이 아니면 세계배드민턴연맹 주관 대회 출전을 불허한다. 국제대회 출전하려면 결국 1년 내내 대표팀에 묶여있어야 한다. 그래서 안세영은 작년 한 해 세계대회만 14번 출전했다. 무릎 부상 중임에도 매달 1.6회 꼴로 국·내외 대회에 출전한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 자격으로 국제대회에 출전하려면? 규정엔 국가대표로 5년 봉사하고 27세가 되어야 한다. '또는'이 아니라 두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 자격이 주어지고 그마저도 협회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노예계약이다. 재미있는 것은 2018년 이전엔 남자 31세, 여자 29세 이하 선수는 개인 자격으로 국제대회 출전이 금지돼 있던 것을 선수들이 소송에서 이겨 바뀌었다는 점이다. 어쨌든 현재 22세인 안세영은 앞으로 5년간 국가대표가 아니면 국제대회 출전이 불가능하다.
무능한 협회, 실력 없는 지도자들
세 번째, 안세영은 대표팀 훈련방식을 지적했다. 단식과 복식은 훈련방식도 달라야 하는데 동일하다는 것이다. 당연한 지적이다. 예를 들어 야구는 선수들 포지션에 따라, 축구는 공·수 구분은 물론이고 선수 개개인에 따라 맞춤훈련을 해야 한다. 대표팀 경력 7년의 안세영이 결국 "수년째 바뀌지 않는 훈련방식"을 비판했다. 국제대회 자주 출전하는 선수들은 다른 나라 선수들 훈련 모습 보면서 국내 감독, 코치들의 수준을 쉽게 파악한다. 또 외국 선수들은 개인 코치와 트레이너도 대회에 함께 오는데 국내 선수들 경우는 (거의) 금지되어 있다. 협회는 형평성 문제라고 둘러대는데 실은 그걸 허락하는 경우 선수 관리가 복잡해지기 때문에, 사실은 귀찮아서 싫어하는 것이다.
한국스포츠 발전 좀 먹는 '국가대표 최우선 시스템'
얼마전 대한축구협회의 홍명보 대표팀 감독 임명 논란에서 보듯 우리나라 스포츠단체들은 대표팀이 최우선이다. 졸지에 감독을 빼앗긴 울산현대는 축구협회에 위약금은커녕 끽소리도 못했다. 프로팀, 실업팀, 학교팀과 선수들은 말 그대로 '졸'이다. 이번에 안세영이 불만을 토로했듯 협회와 대화나 소통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특히 협회들이 국가대표를 최우선시하며 팀에 손해를 강요하다 보니 스스로 저변을 갉아먹는 꼴이다. 기초가 튼튼해야 하는데 실은 사상누각이다. 이번에 문제가 됐듯 여자핸드볼을 제외한 모든 단체종목은 전멸하듯 출전도 못했다. 다른 국가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팀도 적고, 선수도 적다. 팀과 선수가 없으니 국내대회는 재미(?)가 없다. 대표팀 성적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생각해 볼 점 하나. 요즘 여성 스포츠인구가 급격하게 늘었다. 테니스, 골프도 인기고 여자축구도 인기다. 그 힘든 마라톤도 대회 가 보면 절반 가까이 여성이다. 이렇게 좋은 것인데 왜 운동부엔 가지 않을까? 스포츠인구는 늘어나는데 왜 선수 숫자는 계속 줄고 있을까? 각 종목 협회들은 이런 고민을 해야 하지 않을까?
협회는 왜 존재하는가? '선수들 지원'이다. 지원만 잘 하면 된다. 그런데 실상은 어떠한가. 선수들을 "아이들"로 보고 소유물로 여기며 통제하려 든다. 그리고 자신에게 익숙한 '과거의 관행'만을 우선시한다. 바꾸는 걸 귀찮아 한다. 그래서 안세영이 올해 초 '기존 후원사 신발 대신 다른 신발을 신겠다', '컨디션 관리를 위해 비즈니스석을 타고 싶다', '선후배 문화를 지금까지 참아왔지만 더는 참을 수 없다'고 요구했으나 사실상 모두 무시당했다.
체육계는 시대적 변화를 앞서지는 못해도 쫓아가기라도 해야
선수들 앞세워 해외여행 다니는 임원들은 '라떼는 말야'로 말을 시작하는 '꼰대'들이 대부분일 것이고, 안세영 같은 MZ세대가 예전에 없던 요구를 하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협회의 본분은 지원이다. 기존 관행이나 현재의 규정과 맞지 않을 경우 이를 조정 또는 혁신하는 방안을 모색해야지 규정집 들어밀며 "안 돼"로 답하는 버릇은 이제 좀 없애야 한다.
어수선한 와중,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선수들의 선전 덕에 금메달 목표치인 5개를 일찌감치 뛰어넘자 "해병대 훈련 덕분"이라고 자화자찬했다고 한다. 그는 지난 겨울 요즘 선수들은 정신력이 부족하다며 국가대표 선수들을 강제로 해병대 극기훈련에 집어넣은 바 있다. 어떻게 훈련시켜야 하는지 아는 게 없는, 실력 없는 지도자가 꼭 선수들 정신력 탓하고, 체력 강조하면서 매일 똑같은 훈련만 시킨다. 미래가 암담한 한국 스포츠, 꼰대들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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