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들이 담긴 물 두 통을 마시고 나서 휘적휘적 가세나"
-후안 라몬 히메네스, <플라테로와 나>
"플라테로야, 만일 내가 어느 날 이 우물 속으로 뛰어 들어간다면, 그건 자살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 말을 믿어줘, 다만 별들을 더 쉽게 따기 위한 것이야."
-<플라테로와 나>(후안 라몬 히메네스, 염승섭 옮김, 부북스)
20세기 스페인이 낳은 세계적인 시인 후안 라몬 히메네스는 고향인 안달루시아의 모게르에서 그곳의 사람과 삶을 따뜻한 마음을 담아 성찰한 결과를 1914년에 <플라테로와 나>라는 목가적인 산문시로 풀어냈다. 히메네스는 스페인의 생텍쥐페리이며 소설에 <어린 왕자>가 있다면 시에는 <플라테로와 나>가 있다고 말할 정도로 스페인 사람들이 히메네스에 갖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플라테로는 당나귀이다. 자신이 기르는 당나귀 플라테로와 깊은 유대를 맺고 대화하는, 예컨대 인용문처럼 "플라테로야" 하고 다정하게 부르는 모습에서 동화적인 감성을 느끼게 된다. 실제로 전체가 아니라 일부가 편집돼 어린이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당나귀는 독자의 상상과 달리 작가가 키운 특정한 당나귀가 아니다.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모게르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희멀건 당나귀 종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에 가깝다. 작가는 사람들에게 가혹하게 혹사당하는 이 당나귀 종에 감정을 이입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스페인에서도 가장 가난한 고장이고 역사적으로 격동의 현장이었던 자신의 고향 안달루시아 사람들에 대한 애틋함과 애정을 플라테로에 투영한다.
따라서 <플라테로와 나>를, 당나귀와 주인 사이의 특별한 우정을 그린 서정시로 한정하지 않고 인간 세상에 대한 염려와 힘겨운 삶을 이어가는 동시대 고향 사람에 대한 애정을 담은 사회시로도 보아야 한다.
나아가 인용문은 또 다른 경지를 논한다. 이 시집에서 작가는 별과 영원을 자주 언급한다. 풍진으로 얼룩지고 남루함을 모면하지 못하지만 끝내 별과 영원에 정초하는 삶의 태도야말로 시인의 본질이자 특권이기도 하다. 당나귀의 부석한 털끝에서 생명으로서 보편적 공감을 끌어내고, 인간의 고단한 일생에서 냉철한 사회성을 모나지 않게 포착한 연후에, 시인은 시선을 별과 영원으로 돌린다. 찰나의 깨달음은 덧없는 영원과 상응하기 마련이다.
시인은 하늘의 별을 따려 들지 않고 낮게 임재한 지상의 별을 따고자 한다. 별은 하늘에 떠 있고, 물에도 떠 있으며 다시 시인의 망막에 맺힌다. 땅으로 낮게, 우물 안으로 은밀하게 자리한 별은 시인만이 그릴 수 있는 영원의 상(像)이다.
시인이 별을 잡으면, 그래서 영원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영원과 접하게 되면, 그 순간 우물의 별은 소멸하고 세상에 잠시 머문 시인의 물리적 외양 또한 존재를 중단한다. 볼 수 있지만 잡을 수 없고, 접할 수 있지만 지속하지 않는 별의 이데아. 영원은 순간의 기투에서 도달하는, 결코 남과 공유할 수 없는 법열 같은 것이 아닐까. 시인 같은 이에게만 주어지는 별빛과 달빛으로 휩싸인 니르바나.
중국이 자랑하는 시인 이백에겐 그 명성 때문에 이 법열의 죽음이 전설로 따라다닌다. 지금은 중국에서 두 번째로 넓은 담수호이지만 이백이 살아 있을 때 중국에서 가장 큰 호수였던 후난성(湖南省)의 둥팅호(洞庭湖)에서 그가 호수에 뜬 달을 잡으려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은, 이백과 잘 어울리는 이야기이긴 하나 사실은 아닌 듯하다. 만일 그가 정말로 달을 잡으러 호수에 뛰어들었다면 <플라테로와 나>의 인용문처럼 영원에 뛰어들었다고 말하여 틀리지 않을 것이다.
月下獨酌(월하독작)
花間一壺酒(화간일호주) 꽃 사이에 술 한병 놓고
獨酌無相親(독작무상친) 서로 친한 이 없이 홀로 마신다
擧杯邀明月(거배요명월) 잔을 들어 밝은 달을 맞이하고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 그림자 마주하니 세 사람이 되었네
月旣不解飮(월기불해음) 달은 원래 술 마실 줄 모르고
影徒隨我身(영도수아신) 그림자는 내 몸을 따라 하지만
暫伴月將影(잠반월장영) 잠시 달과 그림자를 벗하여
行樂須及春(행락수급춘) 기어이 이 봄을 즐긴다
我歌月徘徊(아가월배회) 내가 노래하면 달은 서성이고
我舞影零亂(아무영영란) 내가 춤추면 그림자도 어지러이 춤추는데
醒時同交歡(성시동교환) 깨어 있을 때는 함께하며 기뻐하지만
醉後各分散(취후각분산) 취한 후에는 각각 흩어져
永結無情遊(영결무정유) 무정하게 놀다 길게 맺어
相期邈雲漢(상기막운한) 멀리 은하수에 서로 기약한다
중국에서 시선(詩仙)으로 불리는 이태백이 이 시를 읊었을 때의 풍경이 눈에 선하다. 우연찮게 인용문과 이백의 시가 서로 맞닿은 느낌이다. 月下獨酌, 즉 달 아래 홀로 술을 마시는 이백의 앞으로 호수와 꽃과 술이 있을 테고 뒤로는 당나귀 한 마리가 무심하게 시선의 '독작'을 바라볼 것 같다. 달과 별을 바라보는 한 누구나 시인이다는 이야기를 히메네스나 이백이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더불어 지상의 삶 또한 지속되어야 한다. 당나귀는 달빛과 별빛이 등 위로 쏟아지는 징후를 제 아래 고단한 그림자로 짐작하며 무게의 굴레를 기꺼이 감수한다. 한 번쯤 직접 하늘을 우러러 별을 달을 보는 게 나쁘지 않겠다. 그러곤 "별들이 담긴 물 두 통을 마시고 나서" 우물이나 호수에 뛰어드는 일은 저들에게 맡기고 휘적휘적 가던 길을 가세나 플라테로야. 1956년 노벨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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