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정세가 불안합니다. 격차사회와 각자도생이라는 말도 자주 들립니다. 서로를 향한 미움도 깊어집니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남모르게 아낌없이 나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덕분에 우리 공동체는 숨쉴 틈을 찾고 미래의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나눔은 힘이 셉니다. 작은 결심, 조그만 행동이지만 소용돌이가 되고 태풍이 되어 사회를 바꾸기 때문입니다.
푸르메재단이 한국 최초로 장애어린이 재활전문 병원을 세운 것도, 단단한 의지로 나눔을 실천하는 시민들이 있어 가능했습니다. 고사리손으로 저금통을 들고 온 아이, 절약한 생활비를 매달 기부하는 노부부, 병원 부지를 쓸 수 있도록 도와준 지자체 공무원, 의미 있는 일을 위해 거액을 쾌척한 기업인까지 모두가 소중한 인연입니다. 푸르메재단이 최초로 장애인 스마트팜을 짓겠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무모하다고 생각한 사람도 많았지만 발달장애 청년의 좋은 일터가 될 거라는 생각이 모여 현실이 됐습니다.
푸르메재단이 지난 20년간 장애인 재활과 자립, 지역복지 사업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장애인이 행복해야 모두가 행복하다'는 믿음을 함께한 수많은 시민이 계셨기에 가능했습니다. 그 소중한 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푸르메재단 백경학 상임대표의 글을 통해 프레시안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너무 부끄러워요!"
"오랜만에 주교님을 뵈니 너무 많이 늙으셨어요. 눈물이 납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많이 늙었어요. 주교님! 오래 사세요." 배우 윤여정 씨는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김성수 주교님의 손을 잡습니다.
지난 2022년 12월 서울 정동 대한성공회 대성당에서 열린 김성수 주교님의 서품 60주년과 헌정문집 <우리 마음의 촌장님> 출간 기념 북 콘서트에 윤여정 씨가 대담자로 참석했습니다. 눈물을 닦느라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윤여정 씨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1967년도였던 것 같아요. 주교님은 당시 인천 성공회 성당의 신부님이셨어요. 제가 가장 힘들 때였습니다. 쎄시봉 친구들과 주말이면 몰려가 노래도 부르고 사제관에 있는 모든 것을 먹어치웠습니다. 아마 주교님은 적은 월급을 우리 먹는 것 채워놓는 데 쓰셨을 것 같아요. 그런데도 우리에게 단 한 번도 미사에 참석하라고 말하지 않으셨어요. 그때 주교님에게서 진짜 사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김성수 주교님이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여정이는 불쌍한 아이예요. 고향이 개성인데 어머니가 딸 셋을 데리고 잠깐 피난 나왔다 돌아가지 못했어요. 당시 아버지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에요. 삶이 얼마나 고달팠을지 그저 마음속으로 짐작만 합니다. 마치 제 딸 같아서 더 정이 가요."
이런 사연으로 김성수 주교님이 윤여정 씨를 양딸로 삼았는지 모릅니다. 주교님 눈에는 일흔다섯의 윤여정 씨가 여전히 1967년 당시의 스무 살로 보이나 봅니다.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 그것도 노래로만 살아갈 수 없었던 시절, 윤여정과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조영남은 총각 신부님 사제관을 찾아가 노래 부르며 노느라 밤을 꼬박 새우곤 했다고 합니다. 젊은 날 서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인연이 지금까지 50년 넘게 이어져 좋은 친구, 때로는 아버지와 딸로 아름답게 늙어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내 최초 발달장애인 특수학교 설립
김성수 주교님은 1974년 우리나라 최초의 발달장애인 특수학교인 '성베드로학교'를 성공회대 안에 만들었고, 유산으로 받은 강화도 온수리 땅에 발달장애인 작업장인 '우리마을'을 건립하는 등 평생을 발달장애인을 위해 바치셨습니다.
2019년 10월 7일 새벽에 발생한 누전으로 강화도 '우리마을' 안 콩나물공장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발달장애인 50명이 지난 10년간 일해온 일터였습니다. '우리마을'과 콩나물공장이 없었다면 세상에 나오기보다는 집안이나 시설에 갇혀 생활했을 사람들입니다. 콩나물공장에서 일하는 사람 중 절반이 40대 중반 이상입니다. 부모님이 연로하거나 이미 세상을 떠나 사회의 돌봄을 받아야 할 처지입니다. '우리마을' 그룹홈에 살며 콩나물공장에서 일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2001년 세워진 콩나물공장에서 하루 4시간씩 최저임금을 받으며 행복하게 일해온 이들에게 화재는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습니다. 폐허더미에 주저앉아 울고 있을 장애인 직원들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그 아픔을 딛고 1년 4개월 만에 다시 문을 연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기적이 따로 없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김성수 주교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얼마나 고생하셨어요.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주교님께 반갑게 인사드렸습니다. 환하게 웃으며 기뻐하실 것으로 예상했는데 주교님 낯빛이 어두웠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큰 걱정이에요. 불 끄러 온 소방관들이 폐허로 변한 공장을 보고 매일 119원씩 돈을 모았대요. 불 꺼준 것도 고마운데 새 공장 지으라고 돈까지 모아줬으니 면목이 없어요.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이 늙은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넙죽 그 돈을 받는 것뿐이었어요. 원장 신부는 복구비 마련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 내가 혼자 한 것처럼 밖에 알려졌으니 부끄러워요, 정말 부끄러워요."
소방관들의 기부 소식이 들불처럼 퍼져나가자 '우리마을'의 좋은 이웃인 천년고찰 전등사에서도 팔을 걷고 나섰습니다. 주지 스님과 신도들이 기금을 모았습니다. 이웃의 초등학생들은 용돈을 모아 기부했고 지역주민은 바자회를 열었습니다. 콩나물 재배 기술을 전수하고 생산된 콩나물 제품을 비싼 가격으로 구매해주던 '착한 기업' 풀무원은 이번에도 새 공장시설을 무상으로 지원해 힘을 보탰습니다. 이렇게 차곡차곡 모인 재건기금이 30억 원을 넘었습니다.
기적의 주인공이 바로 주교님이라고, 당신이 평생 장애인을 위해 베푸셨으니 그 공덕이 되돌아온 것이라고 말씀드리자, "어디 가서 그런 소리 마세요"라고 정색하며 화를 내셨습니다. "주교님, 가지신 것을 모두 내놓아 우리마을이 생긴 것 아닙니까" 하고 제가 말하니, "내 손으로 벌었다면 차마 내놓지 못했을 거예요. 부모님이 남겨주신 재산이니 가능했지요. 못난 나를 하느님께서 불쌍하게 여기고 늘 도와주시는 거지요" 하셨습니다.
겸손을 생명처럼 알고 실천해온 노인 소매의 솔기가 많이 닳았습니다. 팔꿈치에 가죽을 댄 재킷입니다. 영국인 장인어른으로부터 물려받아 50년을 넘게 입으신 옷이라고 합니다. 역시 우리 주교님이시지요.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고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상선약수(上善若水)가 떠올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김성수 주교님의 삶이 욕심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더불어 살아간 노자의 사상과 많이 닮았습니다.
평생을 인내와 겸손으로 살며 많은 이에게 감동 줘
사람 만나는 일을 하다 보니 늘 크고 작은 일에 감동 받고 때론 실망합니다. 큰 감동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나옵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나눔은 그만큼 빛나기 때문입니다. 희귀난치병을 가지고 태어난 딸이 세상을 떠나자 푸르메재단을 찾은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의 손에는 사망보험금이 들려 있었습니다. 비록 자신의 딸은 죽었지만 건강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장애어린이를 치료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함께 자리했던 사람들은 모두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누구라고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큰 부자나 신문에 자주 나오는 대기업 대표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감동보다는 실망이 많습니다. 푸르메재단이 세워진 직후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신 김성수 주교님을 모시고 한국을 대표하는 자동차회사를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매년 많은 사람이 사고와 질병으로 중도장애인이 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 재활병원이라곤 신촌 세브란스 재활병원밖에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푸르메재단에서 환자를 내 가족처럼 생각하는 아름다운 재활병원 건립 캠페인을 벌이고 있을 때였습니다.
독일 뮌헨에 본사를 둔 BMW는 인근 재활병원과 협약을 맺어 공장에서 일하다 재해를 입은 직원들뿐 아니라 교통사고로 다친 시민들의 재활치료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BMW가 기금을 마련했듯이 한국을 대표하는 자동차회사도 재활병원 건립에 동참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그 회사 총수는 비자금 사건이 일어나자 8000억 원을 사회공헌기금으로 출연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굴지의 자동차회사가 재활병원 건립에 함께한다면 명분도 있고 빛이 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부회장은 '무엇이든 도와드리겠다'는 자세로 주교님을 맞았습니다. 면담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습니다. 평생 장애인과 살아오신 주교님은 부회장에게 "장애인 환자의 재활을 돕는 병원 건립을 도와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면담 끝에 약속받은 것은 "한번 검토해 보겠다"는 형식적인 답변뿐이었습니다.
재벌총수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구조상 부회장이 확답을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랜 기다림 끝에 빈손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 화가 났습니다. "매년 수조 원의 영업이익을 내는 대기업이 정말 이럴 수 있습니까?" "빈손으로 보내려면 왜 불렀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제가 울분을 토했습니다. 제 하소연을 조용히 듣고 계시던 주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뭔지 아세요. 앵벌이예요. 사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을 위한 공익적인 앵벌이지요." 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주교님이 이어 말씀하셨습니다.
"절대로 부자가 앞장서 가난한 사람을 돕지 않습니다. 겨우 살 만하거나 조금 부족한 사람이 베푸는 법이에요. 한번 거절당했다고 낙담하지 마세요. 열 번 전화해야 한번 만날 수 있고, 열 번 만나야 겨우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오늘 잘 설명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성공한 셈이에요" 하고 오히려 저를 위로하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주교님께 큰절을 올렸습니다.
살아오면서 선한 기운을 받을 수 있는 분이 곁에 계시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평생 인내와 겸손으로 살아오신 김성수 주교님을 뵐 때마다 저도 당신에게 전염돼 조금씩 얼굴이 붉어지고 머리가 숙여집니다. 당신이 계셔서 참 다행입니다.
*백경학 푸르메 상임대표는 CBS와 동아일보 기자로 일한 뒤 영국에서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을 계기로 푸르메재단을 세웠습니다. 푸르메재단은 시민 1만 명과 넥슨 등 500개 기업과 함께 2016년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을 건립하고, 2022년 경기도 여주에 푸르메소셜팜을 여는 등 장애어린이의 재활치료와 발달장애 청년의 자립을 위한 사업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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