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반구 전역에 걸쳐 지정학적 대결의 파고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한반도 안팎에서도 주목할 만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이 '가난하고 고립된 핵개발국'에서 '가난과 고립에서 탈피하는 핵보유국'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변화이다.
또 윤석열 정부 들어 대한민국(한국)이 미국 주도의 거대한 군사 네트워크에 급속히 편입되면서 이웃 국가들인 북·중·러와의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것도 한국의 달라지고도 위험한 지정학적 풍경이다. 이 와중에 남북관계는 '구질서'는 급격히 무너지고 '신질서'는 감조차 잡지 못하면서 날개 없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관련 기사 : 구질서는 무너지고, 신질서는 감도 못 잡고)
이뿐만이 아니다. 오늘날 한반도는 '구냉전'의 잔재를 청산할 기회는 유실되고 '신냉전'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반도 차원의 구냉전 청산은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북미·북일관계 정상화, 평화통일지향적인 남북관계 수립 등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들 과제는 더 이상 거론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미션 임파서블'처럼 간주되고 있다.
동시에 한반도는 신냉전의 한복판에 서 있다. 우선 한반도 비핵화가 유실된 자리엔 불가역적인 핵시대가 똬리를 틀고 있다. 이는 신냉전의 가장 큰 특징이다. 냉전 시대에 한반도에선 미국의 핵독점이 있었던 반면에, 오늘날에는 미핵과 북핵이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또 냉전 시대에 '불안한 평화'라도 가능하게 했다던 탄도미사일방어(ABM) 조약이 미국의 일방적인 탈퇴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지도 20여년이 흘렀다. 이 사이에 공격용 무기와 방어용 무기의 경쟁이 격화되면서 '힘에 의한 평화'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도 신냉전의 핵심적인 양상이다.
이 와중에 냉전 시대에도 볼 수 없었던 한·미·일 삼각동맹과 북·중·러의 연대가 가시화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인도·태평양을 연결하는 미국 주도의 거대 군사 네트워크가 고개를 들고 있고, 북·중·러는 국제질서의 다극화 추구로 맞불을 놓고 있다.
한반도 안팎의 달라진 지정학의 양상은 동맹의 변화에서부터 발견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미일상호방위조약은 동맹 체제의 우위에 있는 미국이 한국과 일본에 적극적 안전보장을 제공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런데 중국의 부상, 조선의 핵과 미사일의 고도화, 러시아의 불법적인 우크라이나 침공 및 전쟁의 장기화가 맞물리면서 이들 나라에 대한 한미일의 위협 인식 '동조화'가 나타나고 있다. 이는 한미·미일동맹뿐만 아니라 한미일의 군사협력에 있어서도 구조적 변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대목에선 역사의 아이러니를 발견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미국의 ABM 조약의 탈퇴를 비롯한 MD 구축의 최대 구실은 '북한위협론'에 있었다. 하지만 조선의 핵개발이 초기 단계에 있었고 미국이 주고받기식 협상을 선택했다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런데도 MD 구실을 잃지 않으려고 했던 미국은 대북 협상보단 '북한위협론' 활용에 경도되고 말았다. 그리고 어느덧 조선의 핵과 미사일 능력은 미국 본토에까지 다다르는 수준에 이르렀고, 미국은 한일을 향해 '우리도 방어해줘'라며 3자 MD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22년 11월 캄보디아 프놈펜과 2023년 8월 미국의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채택된 공동성명은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준다. 프놈펜 성명에선 "북한이 한반도 그리고 그 너머에서 평화와 안보에 중대한 위협을 야기"하고 있다고 규탄하면서 "북한으로부터 날아 들어오는 미사일로 야기될 위협에 대한 각국의 탐지·평가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북한 미사일 경보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고자 한다"고 했다.
또 캠프 데이비드 '공약'에선 한미일이 "공동의 이익과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지역적 도전, 도발, 그리고 위협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응을 조율하기 위하여, 각국 정부가 3자 차원에서 서로 신속하게 협의하도록 할 것을 공약한다. 이러한 협의를 통해, 우리는 정보를 공유하고, 메시지를 동조화하며, 대응조치를 조율하고자 한다"고 했다.
이러한 합의의 결과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최근 실시된 '프리덤 엣지' 한미일 연합훈련이다. 다영역 차원에서 실시된 훈련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그 핵심이 바로 해상 MD 작전이다.
기실 해상 MD는 조선과 휴전선을 맞대고 있고 종심이 짧은 한국 방어와는 거의 무관하다. 일본 및 미국 방어용 성격이 짙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미일동맹에 '다 걸기'를 해온 윤석열 정부는 이 훈련에 적극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해상 요격미사일인 SM-3 도입도 결정하고 말았다.
이에 뒤질세라 조선은 이 훈련 기간에 '다탄두 각개목표 재돌입체(MIRV)' 시험발사를 실시했다고 발표했다. MIRV는 하나의 탑재체(payload)에 여러 개의 탄두와 기만체를 탑재해 MD를 무력화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이는 미국과 소련이 극심한 군비경쟁을 벌일 때 등장한 냉전의 상징물이다. 그런데 조선이 이 무기에 손대고 있다. 실제 개발 및 배치 여부는 지켜봐야겠지만, 한반도가 신냉전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또 하나의 징표가 아닐 수 없다.
한반도에서의 구냉전은 강대국들에 의해 부과된 성격이 짙은 것이었다. 하지만 신냉전은 이에 못지않게 남북한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더하다. 근친증오로 돌변한 남북관계는 언제든 무력 충돌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기가 고착화되고 있고, '동맹의 체인'에 엮여 원하지 않는 분쟁에 휘말릴 위험마저 잉태하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하여 남북의 지도자는 각기 미국 및 일본, 중국 및 러시아와의 관계가 역대 최상이라고 미소만 지을 것이 아니라 이러한 선택이 잉태하고 있는 위험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구냉전을 청산하지는 못할망정 신냉전의 위험까지 한반도 주민들에게 떠안기는 것이야말로 지도자의 책임성을 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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