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 뚱뚱한 몸매에 중노동을 시키는 악덕업주, 일을 할 때면 엄청난 양의 땀과 개기름을 흘리는 금융가-이것이 바로 신흥부자가 된 동유럽 유대인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중략) 소설에서 울프는 금융가이자 투기꾼으로 야심, 권력욕, 영원히 방황하는 유대인의 불안, 영혼을 상실한 목표 추구, 거부감을 주는 외모-맹수 같은 자본가, 개성 없는 인간, 괴물-등을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볼프강 벤츠, <유대인 이미지의 역사>, 푸른역사, 2005, 44-45쪽).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켈러만이 1913년에 내놓은 <터널>(Der Tunnel)은 1950년대 말까지도 유럽에서 널리 읽혔던 소설이다. 위 글은 '독일의 반유대주의 연구 대가'로 이름이 알려진 볼프강 벤츠(베를린공대, 반유대주의연구소장)의 책에서 옮겨왔다(Bilder vom Judem, 2001). 소설 속 유대인 금융천재 '울프'는 유럽과 미국을 하나의 터널로 이으려는 야무진 꿈을 지녔다. 그래서 소설 제목도 '터널'이다. 주인공 '울프'는 안 그래도 유대인을 싫어하는 유럽의 보통사람들에게 질투와 반감을 일으키는 '유대인 신흥부자'의 모습을 지녔다.
아래 글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프랑스혁명(1789)이라는 엄청난 격랑을 겪은 뒤 19세기 유럽사회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법적 차별이 없어지는 흐름을 보였다. 그러면서 게토(ghetto)에서 풀려난 유대인들의 경제적 지위가 높아졌다. 일부 유대인들은 사업상의 이득이나 다른 필요에 따라 기독교로 개종하고 유럽 백인사회에 동화되는 모습조차 보였다. 이른바 '세속화된 유대인'의 등장이다. 투기로 기회를 잡은 유대인 신흥부자들도 늘어났다. 하지만 이에 대한 유럽인들의 반감도 만만치 않았다.
19세기 무렵은 '과학적 인종 연구'라고 그럴듯하게 포장한 엉터리 유사(類似) 학문이 유럽 백인들의 관심을 끌던 시점이었다. 고리대금업을 하던 유대인들이 금융권을 주무르는 등 세상이 바뀌게 되자, 불만을 지닌 유럽인들은 "유대인은 우리와 다르다"는 인종적 차이에 눈을 돌렸다. 그러면서 "그들을 이웃에 두고 살 수 없다" 또는 "게토로 돌려보내라"는 볼멘 소리를 냈다. 아돌프 히틀러가 <나의 투쟁>(Mein Kampf, 1925)을 써내면서 "유대인은 언제나 다른 민족의 체내에 사는 기생충"이란 독설을 내뱉고 "독일 인종의 순수성을 지켜야한다"는 주장을 편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나치 학살, 무(無)에서 나온 것 아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사실은 나치 히틀러 집단의 반유대주의 정책과 600만 유대인을 죽였다는 홀로코스트(holocaust)가 그냥 툭 튀어나온 게 아니라는 것이다. 2,000년 동안 이어져온 유럽의 반유대적 토양, 특히 프랑스혁명 뒤 19세기에 불었던 인종주의적 반감에 뿌리를 두었다. 나치의 독성이 훨씬 컸을 뿐이다.
오스트리아 유대인 출신의 역사학자 라울 힐베르크(미 버몬트대, 1926-2007)는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쓴 역작(The Destruction of the European Jews, 1961)에서 나치 집권 12년(1933-1945)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가리켜, "역사상 전례 없는 사건으로 보이겠지만, 대부분 과거에 이미 일어났었다"고 했다.
[나치의 학살은 무(無)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학살은 오히려 순환적 경향의 정점이었다. 이는 반유대인 정책의 세 주역이 추구했던 목표에서 잘 드러난다. 기독교 전도자는 '너는 유대인으로서는 우리와 함께 살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 그 뒤 세속 통치자는 '너는 우리와 함께 살 권리가 없다'고 선포했다. 마지막으로 독일의 나치는 '너는 살 권리가 없다'고 명령했다](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1>, 개마고원, 2008, 43쪽).
힐베르크는 1939년 그가 13살 때 부모와 함께 나치 학살을 피해 쿠바를 거쳐 미국으로 도망쳤던 난민 출신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을 점령한 미군이 압수한 나치 독일의 1차 사료들과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자료를 바탕으로 홀로코스트를 다룬 역작을 냈다. 책이 나온 지 60년이 지났지만, 나치 연구자라면 반드시 꼼꼼하게 읽어야할 '홀로코스트 교과서'라 평가를 받는다(문제는 책이 너무 두껍다. 1985년엔 핵심 내용들을 간추린 영어 축약판이 나오기도 했다. 한국어 번역본 1,2를 합치면 1,780쪽에 이른다. 관심 있는 독자분은 공공도서관에서 한번쯤 살펴보시길 권한다).
"유대인들이 기독교도 피 빨아먹는다"
지난 주 글에서 유럽 기독교도들의 가치관에 비춰 유대인들의 고리대금업이 적대감을 일으키는 주요인이었음을 살펴봤다. 그런 반유대 정서는 예수를 팔아넘기고 배반한 유대인들이 회개는커녕 '우린 야훼(여호아)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란 선민(選民)의식을 내세우며 기독교를 거부하는 완고한 태도와 맞물려 유대인 혐오를 더욱 키웠다.
자료를 뒤져보니 유대인의 고리대금업은 900년 전인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도 논란이 됐다. 그 결의문에도 고리대금업이 '기독교도들의 피를 빨아먹는다'는 비난이 담겼다. 두 유대인 역사학자가 쓴 책(Die Geschichte der Juden in Deutschland, 1996)에서 관련 내용을 옮겨본다.
[공의회 결의문은 유대인들이 금전 거래를 통해 기독교도들의 피를 빨아먹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 위협에서 기독교도들을 보호하기 위해 '기독교도로부터 부당한 이자를 강탈하는' 유대인은 충분한 손해배상을 하기 전까지는 앞으로 기독교도들과의 접촉에서 완전히 배제돼야 한다고 했다. 부득이한 경우를 빼고는 기독교도들은 유대인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교회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이스마 엘보겐/엘레오노레 슈텔링, <유대인의 역사: 로마제국에서 20세기 홀로코스트까지>, 새물결, 2007, 52쪽).
유럽의 중세시대는 봉건 영주(왕, 귀족)들끼리 성을 빼앗고 빼앗기는 전투들이 잊을 만하면 벌어지고 여러 세기에 걸쳐 십자군전쟁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며 인구 이동이 잦았던 불안정한 시기였다. 따라서 유대인 대금업자들로서도 할 말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대금업은 위험부담이 크기 마련이고 이자율을 높이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고리대금업 자체가 안 그래도 미운 털이 박힌 유대인을 향한 비난과 공격의 빌미가 되곤 했다.
종교재판에서 '이단'으로 몰려
16세기 초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유대인들의 고리대금업을 비난하자, 많은 유대인들이 죽거나 살던 곳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을 지난 주 글에서 살펴봤다. 그 종교개혁 바람이 불기 앞서, 이미 기독교 근본주의에 빠져 있던 중세 유럽은 다른 신을 믿는 이단자(異端者)를 처벌한다는 명분 아래 (지금 기준으로 봐도 끔찍한) 화형(火刑) 방식으로 유대인들을 죽였다. 이른바 종교재판은 가뜩이나 미운 유대인들을 제거하는 사법적 장치였다.
15세기 스페인의 경우를 보자. 백인들의 눈길로 보면,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으로 이베리아반도에서 무슬림 세력이 쫓겨난 뒤 마지못해 기독교를 받아들인 유대인 '콘베르소'(converso, 개종자)들은 '의심스런 족속'이었다. 1480년에 스페인 의회는 톨레도에서 '격리법'을 공포하면서 동시에 스페인 특별 종교재판소 문을 열었다(1935년 '뉘른베르크 인종법'과 그 뒤의 으스스한 분위기를 떠올린다).
종교재판의 주요 희생자는 유대인이었다. 겉으론 개종한 척 했지만 실제로 유대교를 믿는 이단자를 찾아내 죽였다. 그 참에 미운 유대인들은 걸핏하면 이단으로 몰렸다. 영국 저널리스트이자 역사저술가인 폴 존슨의 책(A History of the Jews, 1987)에서 관련 글을 보자.
[(종교재판은) 1481년 1월에 시작되어 8년 동안 7백 명 이상을 화형시켰다. 종교재판소가 문을 닫기까지 총 34만 1,000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다. 이 중 3만 2,000명 이상을 화형에 처했다. 2만 226명은 1540년 이전에 1급 종교재판소 소속 5명의 재판관에 의해 사형에 처해졌는데,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다. 스페인에서 종교재판을 거쳐 화형에 처하는 의식을 아우토다페라 부르는데, 1790년까지 아우토다페를 통해 희생자가 계속 나왔다] (폴 존슨, <유대인의 역사>, 포이에마, 2014, 388쪽).
프랑스혁명으로 '해방'된 유대인
역사학자들은 유럽의 유대인에게 '평등'이라는 숨통을 터준 것은 프랑스혁명(1789) 시기로 본다. 프랑스혁명의 지도자들은 자유·평등·박애를 내세우며 봉건 잔재를 쓸어낼 때 유대에게도 '완전한 평등'을 약속했다. 1791년 9월27일 프랑스 국민의회는 유대인을 게토(ghetto)란 특정 지역에 머물도록 한 규제를 폐지했고, 직업의 자유도 보장했다. 유대인은 이제 '모세 신앙을 지닌 프랑스 시민'쯤으로 받아들여졌다. 프랑스혁명 정신이 유럽으로 퍼지면서 다른 지역의 유대인들에게도 희망을 안겼다. 자료를 보면, 그런 변화를 가져오는 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도 한몫 거들었다.
[로마 교황의 지배 아래에 있던 아비뇽(1791), 니스(1792) 그리고 라인강 연안지역(1792-1793)에서 게토와 유대인 격리 지역이 해체됐다. 혁명이 네덜란드로 퍼지고 그곳에 바타비안 공화국이 설립되자, 그곳에서도 1796년 법을 통해 유대인들은 완전한 권리를 얻었다. 1796-179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탈리아의 많은 게토들을 해방시켰고, 프랑스군대와 유대인들은 (게토의) 오래된 벽을 맨손으로 허물었다](폴 존슨, 522쪽).
문제는 나폴레옹 체제의 몰락이었다.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영국과 프로이센의 연합군에게 패배하자, 복고(復古) 바람이 불었다. 유대인 해방에 관한 법률들도 폐기됐다. 그나마 조금씩 넓혀가던 유대인들의 평등이 도로 물거품이 됐다. 유럽 각국에서 유대인들이 게토에서 풀려나 법률적으로 평등을 보장받은 것은 19세기 중후반에 이르러서였다. 독일의 경우 1871년 빌헬름1세와 비스마르크에 의한 통일국가가 들어서면서 유대인은 법률적 차별에서 벗어났다(하지만 사회적 차별심리는 그대로였다).
사업상의 필요에 따라 기독교로 개종하고 백인사회로 동화되려는 모습을 보이는 유대인들도 늘어났다. 경제활동의 자유를 얻게 된 유대인들이 잘 할 수 있던 업종은 역시나 대부업이었다. 유럽 경제사에서 사설은행은 18세기에 나타난 새로운 경제현상이라 말한다. 19세기 들어 사설은행들은 몸집이 커졌고, 사실상 고리대금업이 주업종인 사설은행을 운영하던 가문들의 경우 유대인들이 많았다. 그 대표적인 보기가 로스차일드(Rothschild) 가문이다(이에 대해선 이 글 아랫부분에서 다시 살펴본다).
종교에서 인종으로 옮겨간 반유대 정서
큰 틀에서 보면, 18세기 말 프랑스혁명을 계기로 19세기 들어 유대인에 대한 법률적 차별이 없어졌다. 그러나 유대인을 향한 유럽 백인들의 차가운 눈길은 그대로였다. 유럽사회에 오랫동안 뿌리 깊게 박힌 반유대인 정서가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혁명을 거치면서 물리적 게토는 무너졌지만, 유대인을 겨냥한 '사회심리적 게토'는 그대로 있었다고 보면 틀림없다.
유럽의 보통 사람들이 유대인 하면 머릿속에 떠올리는 이미지(△예수를 팔아넘긴 죄를 우치지 않고 △선민의식을 내세우며 기독교로의 개종을 거부하고(또는, 이로움을 좇아 개종한 척하고)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과 같은 고리대금업으로 먹고사는 사악한 유대인이란 이미지)는 좀체 바뀌기 어려웠다. 유대인은 (법적 평등을 보장받았다 해도) 백인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반유대주의 연구자들에 따르면, 19세기 이후 유럽인의 반유대 정서에는 기독교-유대교 갈등이라는 종교적인 측면도 물론 있지만 그보다는 인종주의적인 측면이 더 짙어졌다고 한다. 시민적 자유에 대한 개념이 보편화되면서 종교적 차이에서 비롯된 반유대주의의 비중은 줄어들었어도, 그만큼의 빈 공간을 인종주의적 차이에 따른 반유대 정서가 메웠다는 얘기다.
이는 프랑스혁명 뒤 나폴레옹이 유럽의 여러 나라와 전쟁을 벌이면서 저마다 민족감정이 높아진 정치상황과 맞물린다. 이른바 근대적 민족주의의 탄생이다. 언어·영토·문화적 동질 집단을 이루자는 민족주의 바람이 세차게 불면서 유럽은 저마다 하나로 모아진 민족국가로 나아갔다(이를테면, 비스마르크의 독일과 가리발디의 이탈리아 통일과정이 그러했다).
민족 감정이란 잣대로 볼 때, 유럽 백인의 눈에 비친 유대인은 나와 다른 타자(他者)였다. "유대인은 우리와 다르다"는 인종적 차별의식은 중세의 종교적 억압만큼이나 강력한 힘으로 유대인들을 내리눌렀다. 19세기 들어 유대인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올라갈수록, 백인들 사이의 반유대 정서도 따라 높아졌다. 이는 유럽의 대중소설이나 희곡 등 문학작품에서도 나타난다. 이 글 맨 앞에 옮긴,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켈러만의 소설 <터널>도 한 보기다.
"유대인은 비열한 인간"
독일뿐 아니라 프랑스 사회에도 인종주의적 반유대인 정서가 짙게 깔려 있었다. 프랑스 평론가 상탈 메이에플랑튀뢰(프랑스 캉노르망디대, 공연예술)가 쓴 평론 '연극과 영화 속의 반유대주의와 호모포비아'에 따르면, 유대인을 '비열한 인간'으로 멸시하고 배척하는 연극들이 19세기부터 프랑스 연극 무대 위에 올라 관객들을 끌어 모았다.
[(19세기) 프랑스 국립민중극장의 설립자이자 연출가 겸 내노라 하는 배우였던 피르망 제미에는 셰익스피아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유대인 샤일록의 이미지를 자기방식대로 선보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훗날 여러 배우가 이를 재연했다](장프랑수아 마르미옹 편, <바보의 세계: 한권으로 읽는 인류의 오류사>, 윌북, 2021, 313쪽).
유대인을 악덕 고리대금업자로 그린 작품 설정은 유럽 작가들 사이에 오랜 기간에 걸쳐 줄곧 이뤄졌다. 그만큼 소비자(독자 또는 연극 관람객)의 인기를 끄는, 이른바 '잘 팔리는' 소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연극에서 악역으로 나오는 사람은 베니스의 악덕 대부업자 샤일록뿐이 아니었다. <베니스의 상인>의 가상인물인 샤일록보다 몇 천배나 부자로 동시대를 살았던 실존인물인 유대인 금융부자들도 연극 무대에서 조롱 받는 단골메뉴였다.
[반유대주의적 희곡은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당대 인물을 모델로 삼았기에 더욱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연극들은 영국 유대인 대부호 로스차일드 남작, 독일 유대인 대부호 이르쉬 남작 등을 '대중의 조롱과 모욕을 받는 최고로 희화화된 인물'로 나타냈다. 대중(관객)은 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들에게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쏟아 부었다](장프랑수아 마르미옹 편, 312쪽).
우연찮게도 연극 무대에서 악역을 하는 배우들 가운데 유대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몇몇 열혈 관객들은 너무 연극에 몰두한 나머지, 극중에서 밉살스런 악역을 맡은 유대인 배우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했다. 그들은 '비열한 유대인 놈들!'이라며 모욕적인 말을 무대 쪽으로 쏟아내곤 했다. 어디까지나 연극이고 '예술 행위'라고 하더라도, 생계를 위해 '악역'을 떠맡은 유대인 배우는 이중적인 모욕을 삼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팔레스타인 불행의 씨앗, 유대인의 전쟁자금
바로 윗글에서 프랑스 평론가 상탈 메이에플랑튀뢰는 '영국 유대인 대부호 로스차일드 남작'이 연극 무대에서 조롱 받았다고 했다. 그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3대 직계인 네이던 로스차일드(1840-1915)를 가리킨다. 유대인으로는 처음으로 영국 왕실로부터 남작(Baron) 작위를 받았다. 많이 알려졌듯이, 로스차일드(Rothschild, 독일 발음으론 '로트실트')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출신의 유대인 대부업자 가문이다. 마이어 암셀 로트실트(1744-1812)는 다섯 아들 가운데 맏아들을 뺀 나머지 네 아들을 런던·파리·비엔나·나폴리로 보내 은행을 차리도록 했다. 그들은 모두 떼돈을 벌었고, '로스차일드 금융왕조'를 일궈냈다.
반유대인 정서 탓일까, 로스차일드의 축재 방식을 둘러싼 '더러운 소문'은 한둘 아니다.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졌다는 소식을 하루 먼저 알고 "영국이 졌다"는 헛소문을 일부러 퍼뜨린 다음, 폭락한 채권을 헐값에 사들여 20배 이상 폭리를 취했다는 이야기도 꽤 오랫동안 나돌았다. 유대인의 자본 축적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 유럽 백인들의 정서에 그럴듯하게 맞아 떨어지는 이야기라서 더 널리 퍼졌을 것이다. 사람들은 '유대인은 돈 냄새를 기막히게 잘 맡는 배금주의자'니까 당연히 그랬을 것이라 여기지만, 사실이 아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대영제국에게 전쟁자금을 대줬고 △그 대가로 전쟁 뒤 영국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길을 터주었고 △유대인 금융자본과 대영제국의 유착은 오늘 우리가 보는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유혈분쟁의 씨앗을 뿌렸다. 이 대목은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귀환운동인 시오니즘(zionism), 유대인 출신의 프랑스 장교가 독일 간첩으로 몰린 드레퓌스(Dreyfus) 사건 등 여러 관련 이야기들이 얽혀 있기에, 다음 주로 넘기려 한다.
"나치, 반유대 정서를 재배치했을 뿐"
이제 글을 매듭지어야겠다. 프랑스혁명을 거쳐 19세기 들어 유대인들은 법적으로 평등을 찾았지만, 유럽 백인들이 그들을 가두어 놓으려는 사회심리적 게토는 여전했다. 유럽의 뿌리 깊은 반유대 정서는 문학이나 예술에서 그대로 나타나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문학 속 가상의 인물인 '베니스의 상인 샤일록' 대신에 실제로 활동하는 유대 금융인들의 탐욕이 풍자적으로 그려졌다. 그런 반유대 정서는 20세기 중반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를 낳는 토양이 됐다. '독일 반유대주의 연구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볼프강 벤트(베를린공대, 반유대주의연구소장)의 분석을 보자.
[나치의 반유대주의 선전은 이미 완결된 형태로 존재하는 유대인 혐오 관념을 이용했다. 나치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인물과 이미지를 새로 포장하거나 재배치하기만 하면 됐다.(중략) 부와 권력을 가진 유대인은 이미 보편적인 이미지였으므로, 나치는 출판과 예술을 통해 그러한 이미지를 쉽게 확산시켰다](볼프강 벤트, 46-47쪽).
앞에서 유대인 역사학자 라울 힐베르크의 글에서도 짚었듯이, 독일 나치 정권의 반유대주의 선전과 유대인 혐오·학살은 느닷없이 그냥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2000년을 이어온 유럽 땅의 반유대인 정서가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을 위해 내세웠던 나치의 폭력적인 인종주의로 이어졌다. 유럽사회의 오랜 반유대인 정서는 홀로코스트와 맞닿는다. 다음 글에서는 유럽 땅을 벗어나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려는 시오니즘 운동과 드레퓌스 사건이 무슨 관련이 있으며, 나치 히틀러 집단은 유대인을 어떤 눈길로 바라봤는가를 살펴보려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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