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뀌는 기간도 아닌데 요즘 유난히 부고장이 많이 날아온다. 예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시절에는 장에 가서 노란 봉투 사 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난리가 났었는데, 요즘은 SNS를 통해 금방 전달된다. 과거와 다른 점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코로나-19 이후로 계좌 번호가 함께 오는 것이 참 편하다. 가까운 사이면 달려가지만 그렇지 않으면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혹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하고 문자를 보내면 끝이다.(사실 오늘 아침에도 꼭 가야 하는 상가가 있었는데, 어제 정신없이 일하느라 SNS를 읽지 않아서 실수를 했다.) 어느 지인으로부터 “삼가고인의명복을빕니다”라고 띄어 쓰지 않고, 마침표를 찍지 않는 것이 예의라는 문자를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은 모두 민간 어원설이고, 국립국어원에서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쓸 것을 권장하고 있다.
우리 옛말에 ‘문지방 너머가 저승’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 그 말이 맞는 말 같다. 같이 있던 사람이 순식간에 저승으로 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운전 미숙(?), 급발진 등으로 인해 갑자기 9명이 유명을 달리하기도 하고, 친했던 제자의 남편이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나기도 하였다. 한결같이 하는 말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까지도 곁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저승으로 떠나버리니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다.
저승은 여러 가지 말로 부른다. 후생(後生), 타계(他界), 명부(冥府), 음부(陰府), 명도(冥途), 명토(冥土), 황천(黃泉), 유계(幽界), 유명(幽冥) 등이 있고, 극락과 지옥(사실은 이것들은 저승의 하위개념이다. 기독교에서는 천국과 지옥이라고 한다.) 불교나 도교의 영향으로 ‘어두울 冥 (명) 자’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명부니 음부니 하는 말은 관부(官府)에 비견하고 있는 단어들이다.
‘저승’이라는 말은 원래 ‘彼生(피생 : 저쪽의 삶)’을 이르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이승’은 ‘此生(차생 : 이쪽의 삶)’을 이른다. ‘생(生)’이 ‘승’으로 바뀐 것이다. 과거에는 이러한 변화를 겪은 단어들이 많다. 예를 들면 ‘중생(衆生) > 즘생 > 짐승’과 같은 것이 있다. 이와 같이 ‘이승’이나 ‘저승’은 ‘이생’과 ‘저생’이 바뀐 말이다. 이제 사전적 개념을 살펴보자. 저승은 ‘사람이 죽은 뒤 그 영혼이 가서 산다는 세상’, 이승은 ‘지금 살고 있는 현실 세계나 일생 동안을 이르는 말’이라고 나타나 있다. 예문을 통하여 그 의미를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태호네 집에서 그의 주막까지는 마치 이승과 저승의 거리만큼 아득하게 느껴졌다.
김 씨는 이승에서의 마지막 숨을 들이쉬는지 턱을 까불며 가족들을 쳐다보았다.
이승을 하직하고 저승으로 가다.
그는 저승의 문턱에서 되돌아왔다고 주장한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승과 저승은 삶을 기준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중심으로 표현한 말이다. 현재의 삶이나 일생을 말하면 이승이고, 죽어서 또 다른 세상에서 사는 것을 저승이라고 한다. 그래서 저쪽의 삶(彼生)이라고 하는 것이다. ‘저쪽의 삶’이 어떠한지는 가보지 않아서 모르겠다. 다만 죽음이 끝이 아니고 또 다른 시작이라는 관점으로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순(耳順)을 넘기고 고희(古稀) 쪽으로 가까이 다가와 보니 돈도 명예도 다 의미가 없는 것들이다. 친구들 말대로 ‘건강한 놈’이 제일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하는 말도 있지만, 종교인들에게는 이승은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저쪽에는 육신이 없으니, 최소한 육체적 고통(두통, 치통 등)은 없을 것이 아닌가? 하지만 육체적 고통보다는 정신의 고뇌가 사람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짧은 인생길인데, 굳이 ‘도토리 키 재기’는 왜 하는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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