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9일부터 「보호출산제」가 시행에 들어간다. 우리 사회가 가서는 안될 길에 들어서는 날이다. 이 법에 의해서 보호받는다고 정의되는 아동들은 이 법을 통해 그들의 생부모로부터 분리 당하고, 자신의 출생의 진실에 대한 기록이 은폐되고 성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접근을 요청할 수 있다. 그것도 생모가 거부하면 자신의 출생의 진실을 영원히 알 수 없게 된다. 이 시스템을 통과한 아동은 입양이나 시설보호에 배치된다. 자신들의 생부모와 분리 당하고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을 소거 당한 채로 입양이나 시설보호라는 생의 경로에 오르게 된 아동들은 일생 동안 잦아들 일 없는 상실과 혼란의 협곡을 걸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는 모성과 아동에게 촘촘한 돌봄의 시스템을 만들어 주는 대신 이 법을 택했다. 분리와 상실을 통해서 당신을 구원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모성에게 건네고, 생부모와 분리와 뿌리와 정체성 소거가 너에게 주는 선물이자 운명이라고 아동에게 말해주는 셈이다. 이 법은 여성과 아동에게 결국에는 폭력의 상흔과 트라우마를 남기는 법일 뿐이다. 착잡하기 그지 없다.
입양인들을 지원하는 <뿌리의집>은 2014년 캐서린 조이스의 책을 번역해 「구원과 밀매」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원제에서 「The Child Catchers: Rescue, Trafficking, and the New Gospel of Adoption」을 "Child Catchers"를 번역할 길이 막막했다. "아동 포획틀"이라니! 너무 끔찍했다. 결국 부제에 언급된 Rescue(구조)와 Trafficking(인신매매)를 묶고 이런 사태가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의 추동력에 기반하고 있는 점을 감안해, 「구원과 밀매」라고 제호를 붙였다.
우리 사회의 보호출산제 입법 논의 과정에서 보호출산제가 캐서린 조이스가 말하는 Child Catcher(아동포획틀)와 쌍둥이처럼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캐서린 조이스는 입양이 아동 양육 위기에 내어 몰린 여성들을 돕는다는 명목 아래 아동을 생모로부터 분리해내어 입양에 배치하는 시스템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 복음주의 계열의 입양실천을 'Child Catcher(아동 포획틀)'로 명명했다.
그러면 대안은 무엇일까?
첫째, 헌법재판소의 낙태에 대한 합헌 판결에 어울리는 임신의 중지에 대한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함으로써, 원치 않는 출산에 내어 몰리는 사태를 먼저 예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의도하거나 차분히 계획하지 않은 임신과 출산은 임신거부증, 영아살해, 아동유기 등 심각한 양육 회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예방하는 일이 임신 중지가 가능하도록 하는 일이고, 이 제도가 잘 정착되면, '보호출산제'의 필요성은 현저히 감소하게 될 것이다.
둘째, 이 법은 영아살해의 위험에서 아동을 구하기 위한 법이라고 하지만, 영아살해는 임신 거부증이나 산후우울증, 조현병 등 질환과 관련이 있다. 이런 경우들은 보호출산제라는 법제가 있어야만 이런 위험으로부터 분리 보호가 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 상황에 걸맞는 해법 자체를 찾으면 된다. 또 이런 사태 때문에 여성의 임신 출산 사실을 말소하거나, 아동의 출생의 진실을 지워버리는 조치가 반드시 따라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위기 가운데서 출산한 여성들이 자신의 출산 사실과 아동의 출생의 진실을 은폐하는 일에 반드시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셋째, 극심한 경제적 곤경에 처한 임신 갈등 여성의 선택지로 이 보호출산제가 제안되고 있다. 경제적 곤경이 양육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 있고, 결국 아동은 유기나 살해의 위험에 내몰릴 수 있다는 것이다. 살해의 위험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은 양육의 곤경을 헤치며 자식을 양육해내겠다는 정상적인 모성에 대한 오해에 불과하다. 해법은 다른 것이 없다. 경제적 곤경을 해소해주는 것이 답이다. 이 경우, 가장 큰 문제는 주거의 문제다. 임신 시기에, 즉 출산 이전에 아이와 함께 살 주거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최선의 해법이다.
넷째, 보호출산제는 출생통보제의 도입과 연동되어서 입법되었다. 의료기관의 출생통보를 통한 출생등록, 즉, 가족관계등록 제도가 실현될 경우, 의료기관에서 출산하지 않은 사람들이나 의료기관에서의 출산을 회피하는 사람들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가 사실상 보호출산제를 낳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종의 부수적 효과 혹은 풍선효과가 생길 거라는 우려에 기반한 입법이었다.
그러나 이런 우려로 출생등록을 회피할 길을 동시에 열어준다는 것은 자가당착적이다. 출생통보제 입법의 원칙에 입각해서 모든 아동의 출생등록이 국가의 책무인 만큼, 결과가 극대치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맞다. 출생등록 회피라는 예측되는 우려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병원외 출산 위험군에 대한 섬세한 해결책들이 먼저 모색되어야 한다. 보건소와 행정복지센터와 미혼모단체를 비롯한 민간 네트워크들과의 연계를 통해 그들을 위한 맞춤 서비스를 개발하고, 찾아가는 복지서비스를 통해 사각 지대에 놓인 이들을 포착하고 안전한 임신 출산 양육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보건복지부는 1년에 보호출산제의 서비스를 제공받게 될 아동을 300명으로 예측하고 있는데, 이걸 최소화하기 위한 제도적 정책적 노력을 먼저 기울여야 한다. 보호출산제를 도입하더라도 실제로 아동유기나 영아살해는 완벽하게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섯째, 보호출산제는 생부모는 자신의 가족관계등록부 상에 출산 사실을 등재하지 않는다. 이는 생부모의 이익에 따른 선택이다. 이 생부모의 이익이 아이에게는 출생의 진실을 지우고, 자기가 아닌 자기로서 인생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점에서 어마어마한 고통을 주는 인권훼손이다. 한 사건을 통해서 한 사람에게는 이익을 주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인권훼손을 끼치는 매우 차별적 법제다.
헌법 13조는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다. 아마도 연좌제를 배척하는 헌법 조항인 듯 한데, 만약 이 헌법 조항을 보호출산제와 연결하여 해석하는 일이 용인된다면, 친족인 생부모의 이익 실현이 아이에게는 불이익이 되는 처우를 법제화하고 있는 것이 보호출산제이다.
또 현행법에 따르면 자식은 친족간 성폭력이나 가정폭력 등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부모나 조부모 등 직계존속을 고소할 수 없다. 이 법이 근원적으로 직계비속에 대한 차별조항이라는 논란이 있지만, 그래도 가정폭력인 경우 고소가 가능하다는 점이 열려있다. 아동에게 출생등록을 해주지 않기로 생부모가 선택하는 행위는 결과적으로 아동에게는 용인하기 어려운 가정폭력의 하나이다. 엄마와 아빠의 가족관계등록부에 나의 출생등록이 등재되지 않는 것은 생부모에게는 이익이지만, 아동에게는 불이익이자 차별이며 심대한 심리적 폭력이다. 이걸 제도적으로 보장한다는 점에서 보호출산제는 아동에게는 법제적으로 폭력을 행사한다.
여섯째, 보호출산에 관한 법(위기 임신 및 보호출산 지원과 아동 보호에 관한 특별법) 17조는 출생의 진실이 담긴 출생증서를 아동이 보고자 할 때, 생부모의 동의가 있어야만 한다. 자신의 신원(출생의 진실)을 알 권리는 부모의 동의와 상관없이 접근 가능한 것이 한국의 현행 법제이다. 내 딸은 내 허락이나 동의 없이 자신의 가족관계등록부를 발급 받을 수 있다. 나와 내 아내의 동의 여부라는 권력 아래 내 딸은 놓여 있지 않다. 그러나 보호출산제를 지나서 인생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은 계급적으로 이 땅의 이등시민이 된다. 부와 모의 동의 여부에 따라 자신의 출생의 진실에 대해 접근할 수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국가의 공적 시스템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부모도 사적 개인이며, 이 점에선 이웃집 아저씨나 아주머니와 다르지 않다. 내 출생의 진실을 알고자 할 때 이웃집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안 된다고 하면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이런 점에서 보호출산제는 사적 개인인 생부모에게는 특권을 부여하고 이 법의 세례를 받고 나머지 생의 여정을 살아가는 아동(나중엔 성인)은 그들의 권력 아래에 놓인 이등시민을 만드는 폭력적 시스템이다.
한국의 보호출산제의 입법 경로의 배후에도 미국복음주의 입양운동의 세례를 받은 "입양구원론자"들이 역할을 했다. 입양기관들, 일부 입양부모단체들, 베이비박스 세력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입양의 무게 중심을 "개인적 선의"와 그에 따르는 의도치 않은 부수적 효과인 "빛나는 이미지(The Glowing Image)"에 두고 있다. 보호출산제의 입법화는 그들의 이런 낭만이 관철된 법제라 할 수 있다. 이 보호출산제라는 '아동 포획틀'을 거쳐 부모도 모르고 출생의 진실에 기초한 자기 정체성을 빼앗긴 채로 긴 삶의 여정을 위해 혼란과 외로움으로 가득한 협곡에 들어서는 아동의 숫자가 많아지면 그들은 자신들이 입법을 주도한 일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이 '아동 포획틀'에서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을 빼앗긴 아동(후에는 어른이 될)들의 혼란과 비애를 디디고 서서 말이다. 아동과 모성의 분리와 상실의 총량이 커지면, 이 시스템은 정당성을 획득하게 될 것이고 시스템의 유지와 발전을 위한 국가 예산은 증액될 지도 모른다.
그들의 의견을 편파적으로 경청한 보건복지부는 2024년 하반기에만 해도 42억 원의 국가 예산을 이미 마련해두었다. 이 법제에 가담한 국가기관들과 공공기관들은 아동과 모성의 분리가 성공적으로 작동해야 자신들이 정당성과 미래를 담보해낼 수 있게 된다. 막스 베버의 관료제 국가에 대한 비판에 비춰 말하면, 그들은 국가도 인민도 안중에 없고, 오직 자신들이 봉직하는 기관들의 인적 구조의 확장과 승진의 기회 만들기,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해줄 예산의 증액에만 혈안이 될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대안을 찾아 설계하고 보호출산제를 폐기시키는 일을 통해 모성과 아동이 삶을 더 따뜻하게 보듬어 내는 일은 그들 존재와 충돌할 수 밖에 없다.
임신 출산 양육의 위기에 내어 몰린 여성에 대한 진정한 연대와 돌봄은 위기 그 자체를 해소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미국 프린스턴대학 윤리학 교수 피터 싱어는 그의 책 <죽음의 밥상>에서 돼지를 방목하면, 돼지가족은 임신한 엄마 돼지를 위해 두 개의 출산 움막을 마련한다고 한다. 임신한 엄마 돼지는 두 개의 움막을 살펴 본 후 한 곳을 선택해서 출산한다. 하물며 돼지들도 출산에 즈음하여 새로 태어나는 새끼들과 엄마 돼지가 함께 안전하게 거할 처소를 사전에 마련한다고 하는데, 한국의 여성들 중에는 주거 문제를 비롯한 경제적 위기와 온갖 사회적 압력과 곤경이 해소되지 않은 채로 임신과 출산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 분들이 있다. 그들의 위기가 보호출산제의 탄생의 근거이다.
출산율 0.7의 시대, 멸국의 비탈길을 내리닫고 있는 나라에서 아이를 환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이를 엄마와 함께 누일 환대의 공간, 즉, 보호출산제가 말하는 모성의 심리적 경제적 곤경이 해소된 사회적 둥지를 마련해주는 것이 해답이라고 생각한다.
아동 포획틀에 다름 아닌 보호출산제는 귀태로 폐기되어야 한다. 모성과 아동을 지켜낼 수 있는 대안 입법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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