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길에 들른 한 프랑스 마을에서였다. 숙소에 짐을 부린 뒤 식당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부동산에 내걸린 매매 공고에 눈길이 갔다. A부터 G까지의 등급이 쓰여있는 색깔을 달리한 막대들, 저게 뭐지?
알고 보니 이 공고는 모든 주거용·상업용·공공 건물에 에너지 효율등급을 매겨 공개하도록 한 유럽연합(EU) 지침에 따른 것이다. 부동산을 통해 임대나 매매 계약을 하는 과정에서 누구나 확인할 수 있도록 공고에 이 등급을 포함해야 한다.
A부터 G까지의 7개 등급은 해당 건물의 제곱미터(㎡)당 에너지 소비량과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따져 계산된다. G등급일수록 에너지 효율성이 낮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등급이 낮을수록 냉·난방비가 더 들 수밖에 없다. 유럽에서는 에너지 효율성 등급이 G 또는 F 등급인 건물에 대해서는 단계적으로 임대차를 금지할 방침이다.
귀국한 뒤 한 기후정의 활동가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한국에도 유사한 제도가 있다고 한다. 건축물 에너지효율등급 인증제도가 그것이다. EU와 유사하게 건물의 에너지 소비량을 숫자로 환산해 등급(1+++, 1++, 1+. 1~7 등 총 10단계)을 부여하고 1등급 이상에 대해서는 취득세와 재산세 감면 등의 혜택을 준다. 그런데 실제 인증받은 건수가 매우 적다. 지난해 관계부처 합동 '탄소중립 녹색성장 국가전략 및 제1차 국가 기본계획'에 따르면, 2024년 6월까지 등급을 받은 곳이 주거시설의 경우 4212개소에 불과하다. 제도는 2001년 도입돼 20년도 훌쩍 넘었는데도 말이다.
한국의 더딘 걸음과 달리 유럽연합의 건물 에너지 효율성 증진 및 온실가스 배출 감소를 위한 노력은 이어지고 있다. EU이사회는 지난 4월12일, 건물 온실가스 배출 감축을 위한 '건물에너지성능지침(Energy Performance of Buildings Directives, 이하 지침) 개정안을 최종 승인하였다. 에너지 성능이 낮은 건물의 개보수를 촉진하여 2050년까지 유럽의 모든 건물의 온실가스 순 배출량을 '0(zero)'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제시하였다. 이를 위해 회원국은 2035년까지 모든 주거용 건물의 에너지 사용을 20~22% 줄이기 위한 계획을 마련하여 2026년까지 제출해야 한다.
이처럼 건물 규제를 강화하고 있는 이유는 건물의 에너지 소비량이 많고 그만큼 온실가스도 많이 배출하기 때문이다. 주택, 아파트와 같은 주거용 건물에서부터 사무실, 공장, 매장과 같은 상업용 건물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건물 없이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어렵다. 건물 안에서 인간은 적정 온도 유지를 위한 냉·난방과 급탕, 조명, 환기 등을 위해 에너지를 사용하기 때문에 건물 부문은 주된 에너지 소비처로 꼽힌다.
세계건축및건설연맹(GlobalABC)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건물 부문은 2022년 기준 전체 최종 에너지 수요의 30%(주거용 21%, 비주거용 9%)를 차지했다. 건축 자재 생산에 필요한 에너지를 포함하면 이 수치는 34%로 증가한다. 건물 운영 및 건설로 인한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2022년에 전 세계 배출량의 37%를 차지하면서 최고치를 기록하였다.
한국의 사정도 비슷하다. 2018년 기준 건물 부문 온실가스 배출량은 국가 배출 총량의 24.6%를 차지하였다. 이 배출량은 2018년 이후 약간 감소하다가 최근 반등하였다. 환경부 온실가스종합정보센터가 2024년 말 예정된 '2022년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 통계' 확정에 앞서 공개한 자료를 보면, 건물 부문 잠정 배출량(직접배출량 기준)은 전년 대비 3% 증가한 4860만톤으로 집계되었다. 한 국가 안에서도 도시지역일수록 건물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가 많은데, 서울의 경우 지역 내 온실가스 배출량의 68.7%가 건물에서 나온다.
건물에서 사용하는 에너지 소비량과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서는 건물의 에너지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바늘구멍으로 황소바람 들어온다고 하였다. 주거 취약계층일수록 냉난방에 같은 에너지를 쓰고도 여름엔 더 덥고 겨울엔 더 추운 상황을 견뎌야 한다. 바닥과 벽면의 단열을 강화하고 창호를 바꿔야 한다. 정부는 2023년 4월 확정된 '국가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계획'에서 건물 부문의 탄소중립 실현을 위한 대책으로 2030년까지 160만 호에 대한 그린 리모델링 계획을 제시하였다. 매년 20만 건 가까운 규모의 집수리를 해야 한다는 것인데, 2022년까지 추진했던 그린 리모델링 누적건수(7.3만 건)의 거의 세 배다. 속력을 더 내도 목표 달성이 어려운 상황인데, 정부는 집행 실적 부진과 고금리 상황을 이유로 오히려 민간 건축물에 대한 그린 리모델링 이자 지원 사업 신규 접수를 2024년부터 중단하였다.
그린 리모델링 사업이 건물의 에너지 효율을 개선하여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효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에너지 효율 개선으로 냉난방에 필요한 비용을 줄여 주거환경을 개선할 수 있고, 나아가 이 사업을 위한 일자리도 만들 수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10억 원을 투자했을 때 직·간접 고용 창출 규모는 빌딩에너지 효율 개선 사업에서 11.6명이다. 전기차 확대(6.9명), 산업 효율성 제고(8.8명)보다 많고, 대중교통 수단 확충(11.9명)과 비슷하다. 다른 녹색전환 부문과 비교할 때 일자리 창출 효과가 크다.
비단 일자리 양의 문제만이 아니다. 건설노동자들이 어떤 건물을 어떻게 짓느냐의 문제와도 맞닿는다. 한 번쯤 건설노동자들로부터 "저 건물 내가 지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떤 좋은 건물을 짓는지, 는 노동자들의 자존심이다. 공사과정에서 무더기로 철근을 누락해 붕괴된 이른바 순살 아파트를 보며 자랑스러워할 건설노동자는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건물 부문의 녹색 전환을 위한 저탄소 건축 자재 사용의 확대, 에너지 효율 향상을 위한 건물 개보수, 온실가스 배출 제로 건물 건설 등의 사업은 전체적으로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것만이 아니라 주거 취약계층의 에너지 복지를 확충하고 건물과 건설 부문의 일자리를 늘리며 관련 노동자들이 노동을 통한 자존심을 높이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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