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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펀드의 특별한 사법 리스크: 풋(Put) 리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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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펀드의 특별한 사법 리스크: 풋(Put) 리스크

[김영수의 사모펀드 이야기] <10>

사모펀드가 거래를 진행할 때는 여러 변호사를 동원하여 철저한 계약서를 작성한다. 큰 법률 회사들마다 사모펀드 전담 부서가 있어 최고급 변호사들이 참여하고, 이들은 엄청난 수수료를 받으며 모든 리스크를 고려하여 빈틈없는 계약서를 작성한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사모펀드들은 재판에서 승률이 그다지 높지 않다. 특히 큰 소송에서 자주 패배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겨도 몇 년씩 시간이 흘러 사모펀드의 입장에서 실질적으로 패배한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사모펀드가 빠르게 높은 수익을 창출해야 하는 특성상 긴 소송 기간이 큰 타격을 주기 때문이다.

아마 계약서가 워낙 철저하게 작성되어 대부분의 경우 소송 없이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에, 재판까지 간 케이스는 승률이 낮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또는 언론에 보도된 패배 사례만 접하다 보니 내가 그런 인상을 받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사모펀드가 재판에서 승률이 낮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모펀드가 쉽게 승소한 재판들은 보통, 사회적으로 평판이 매우 나쁜 '악당' 급의 오너들과의 재판이었다. 반면, 오너들의 사회적 평판이 그나마 양호하거나 스캔들이 없는 경우, 사모펀드가 크게 패배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예를 들어, 홍콩계 사모펀드 어피니티의 사례를 들 수 있다. 어피니티는 한국에 다양한 투자를 진행했지만, 대기업 및 소액주주와의 갈등으로 인해 한국계 파트너들이 줄줄이 사임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어피니티는 2012년에 교보생명에 재무적 투자자로 참여했다. 당시 몇 년 내로 상장을 하지 못하면, 대주주인 신창재 회장이 어피니티의 주식을 사주는 풋옵션을 행사할 수 있는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상장이 실패하면서 풋옵션의 행사 가격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다. 어피니티는 주식을 원래 산 가격의 두 배로 행사하려 했고, 신창재 회장은 이에 반발하며 여러 소송이 이어졌다.

국제 중재 판결에서는 풋옵션은 어피니티에게 있지만, 신창재 회장이 그 가격에 주식을 사줄 의무는 없다고 판결했다. 결국, 결론이 나지 않아 어피니티의 자금은 거의 12년째 묶여 있다. 사모펀드는 5년 내로 높은 수익을 창출하고 자랑해야 하는데, 12년째 이런 상태라면 대패 중의 대패라고 할 수 있다. 소액주주로서 대주주를 계속 압박할 수는 있겠지만, 대주주가 소액주주의 압박을 견디면 소액주주의 투자금은 죽은 돈이 될 뿐이다. 신창재 회장은 이 분쟁으로 인해 회사가 상장을 못하고 있는데, 결국 누가 얼마나 참는가의 싸움이 되고 있다.

최근 신세계에서도 어피니티가 풋옵션 관련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도 풋옵션 행사 조건을 둘러싼 분쟁인데, 신세계 측은 상품권도 매출에 포함시켜 "매출이 증가했기 때문에 풋옵션을 행사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어피니티는 "상품권은 부채지 매출이 아니다"라고 반박하고 있다. 신세계는 상품권을 매출로 잡는 것이 업계 관행이라고 주장한다.

신세계의 정용진 회장은 사회적 평판이 좋지 않은 면이 있는데, 평판이 더 좋았다면 어피니티는 더 어려운 싸움을 벌였을 것이다. 현재 유튜브에서는 신세계가 불리하다는 분석이 많지만,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 정용진 회장이 평소 세평 관리를 더 신경 썼더라면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SK그룹에서도 사모펀드 H&Q가 실망스러운 경험을 했다. 이 외에도 비슷한 사례가 많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나는 사모펀드가 전 인격적으로 모든 것을 걸고 달려드는 오너들을 이기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너들은 세대를 걸쳐 목숨을 걸고 지켜온 기업을 놓고 피 터지게 싸우는 결의를 가지고 있다. 반면, 사모펀드는 투자 수익률만을 따지는 경향이 강하다.

사채업자들이 왜 조폭을 동원하겠는가? 계약서에 허점이 있어서가 아니다. 목숨을 걸고 돈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계약서와 돈은 무력하다. 아무리 자본주의가 계약과 소유권을 중시하더라도 전 인격적인 저항 앞에서는 한계가 있다.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오너들에게 나는 항상 그들의 헝그리 스피릿이 있는지 관찰한다. 그런 결의가 없다면 대부분 중간에 포기한다. 반면, 감옥에 가도 좋다는 각오로 저항하는 오너들은 결국 뭔가를 건져낸다. 이것이 나의 경험이다.

한국 사회에서 반세기 동안 풍파를 겪으며 닦아온 인맥과 영향력, 관계와 백을 동원해 저항하는 토박이 오너들을 외국에서 온 사모펀드가 계약서 하나 들고 와서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당연히 무리다. 법관도 사모펀드가 법률 전문가들이고, 오너는 단순한 사업가로 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사모펀드를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처럼 여긴다. "살을 한 파운드 잘라가라, 그러나 피를 흘리면 안 된다."

교보생명과 어피니티의 분쟁도 알 수 있듯 많은 경우 오너들이 저항하지 않더라도 사모펀드가 풋옵션을 행사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첫째로, 풋옵션을 행사한다는 것은 처음 투자 결정이 실패였음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둘째로, 오너가 맹렬하게 반격할 경우 사모펀드가 쉽게 이기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셋째로, 풋옵션을 행사하게 되면 오너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아 파산하게 되고, 사모펀드는 채권자의 한 사람으로 남게 되어 실제로 받을 수 있는 금액이 거의 없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사모펀드는 어쩔 수 없이 풋옵션 행사를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앞으로 한국의 재벌 그룹들이 사모펀드 자금을 활용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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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미국 MIT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캐나다 앨버타 상과대학 금융학 교수로 재직했다. 이후 도요타그룹 등을 거쳐 현재 캐나다에서 당뇨병치료제품을 만드는 Eastwood Bio-Medical Research Inc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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