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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스물 넘긴 부하 죽음에 10여년 '분투'한 그였지만 결국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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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스물 넘긴 부하 죽음에 10여년 '분투'한 그였지만 결국 떠났다

[프레시안 books] 17명의 이야기 <산재일기>(아를 펴냄)

한 명의 노동자를 소개한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울산에 있는 현대중공업 하청업체에 취업했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다. 당시 두 살, 그리고 네 살 자식이 있었다. 인정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렇게 3개월 일하니 현장 관리자가 되었다. 이후부터는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일을 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챙겼고 일은 확실히 마무리했다. 돈이 자연히 따라왔다. 그때까지는 조선소가 열심히 하는 만큼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곳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터졌다.

"니 똑바로 일 해라잉."

갓 스물을 넘긴 직원에게 이런 농담을 던지고 다른 작업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가 자리를 뜬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바로 그 자리에 컨테이너 크기의 물체가 떨어졌고, 그 직원은 그 아래 깔려 사망했다.

황망한 것도 잠시였다. 회사는 일이 급하다며 시신을 수습한 뒤 곧바로 작업을 지시했다. 부하 직원의 피가 흥건했다. 순간 부아가 치밀었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 생각했다. 밑에 있는 직원들에게 작업 중지를 지시했다. 그리고는 그들과 함께 고인이 된 직원 장례식장으로 향했고, 삼일 동안 빈소를 지켰다. 그게 동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회사는 그런 그를 마뜩잖게 생각했다. 삼일장을 치르고 회사에 돌아온 날, 회사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그가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한 이유다.

ⓒ매일노동뉴스(정기훈)

노동계를 떠난 노동자를 다시 소환하는 이유

이 노동자는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 위원장이었던 하창민 씨다. 그는 그렇게 시작해서 10년을 노조활동에 매진했다. 노조를 시작한 이유가 산업재해여서 그런지, 그는 하청노동자들의 산재에 유독 집중했다.

그런 그도 지금은 소위 말하는 '이 바닥', 즉 노동계를 떠났다. 그럼에도 굳이 이 늙은 노동자를 다시 소환하게 된 이유는 한 권의 책 때문이다.

극작가 겸 연출가 이철의 희곡 〈산재일기〉(아를 펴냄)는 산업재해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있는 17명의 인물들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 책은 2022년 고 노회찬 의원 4주기 추모 연극으로 처음 무대에 오른 <산재일기>의 희곡이다.

이철 작가는 17명을 총 50여 시간에 걸쳐 인터뷰했다. 하창민 씨는 극작가가 만난 17명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이 책에서 하창민 씨가 지목한 현장의 산업재해 원인은 간단하다.

"똑같은 블록(선박 부품)을 (작업) 해. 똑같은 (블록) 시리즈가 있어. 1호기 2호기 3호기. 이게 이제 100원에 내가 처음에 업체에서 받았다 하면은 그다음 (하청업체는) 80원이야, 그다음에는 60원. 그다음에는 50원, 이렇게 되는 거야. 그러면 (원청인) 중공업에서 볼 때는 똑같은 작업을 하기 때문에 능률이 난다는 거야. 사실 능률이 나, 능률이 나. 그런데 아무리 노력을 해본들 똑같은 거야. 왜? 또 (하청으로 내려갈수록 가격이) 까지기 때문에. (내려)가면 갈수록. 그걸 (그러면) 어디서 많이 (만회를) 하느냐? 공기를 단축시키는 거야. 그러니깐 1시간 할 거를 30분 안에 끝내야지 먹고사는 거야 사실은. 거기서 안전이 어디 있냐고, 안전이." 68p

하청의 하청, 그리고 하청으로 물량이 내려오면서 그에 따라 각 하청업체 사장들이 이윤을 남기기 위해 공기, 즉 공사기간을 줄이는 방법을 택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공기를 단축할수록 현장에서 죽어나가는 노동자들은 늘어난다는 점이다. 하청으로 내려갈수록 산재 사망사고가 늘어나는 이유다.

하청 노동자들은 이런 구조적 문제를 잘 인지하고 있다. 다만 먹고 살려다보니 어쩔 수 없이, 목숨을 걸고 일하는 식이다. 하창민 씨는 이런 구조를 깨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비정규직 문제를 자기 일로 같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노동조합이 살 수가 없다. 당신들을 위해서 하는 이야기다. 현장에 거의 뭐 80%가 하청이 일을 하고 있잖아요. 원청 정규직들은 소위 말해서 일하지도 않고 돈 많이 받고 하청은 뼈 빠지게 일하면서 쇳가루 다 마셔가면서 일해도 절반밖에 못 받고, 이 골을 메울 수 있는 건 정규직들이 나서야 될 일이거든요. 제가 찾아갔죠. 같이해야 됩니다. 이거는. 원하청이 함께해야 되고 노동조합도 결합을 시켜야 되고.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간극을 줄여나가야 된다. 문제는 딱 하나예요. 현장을 잡지 못하는 거. 파업의 효과라는 거는 생산을 멈추는 거잖아요. 80%가 하청이 일하고 있는데 어떻게 타격을 받아요." 66p

구조를 바꾸려면 노동자들의 단일한 목소리가 나와야 하지만, 파업권도 단체교섭권도 없는 하청노동자들로서는 요원한 일이다. 하창민 씨는 그 목소리를 하나로 모으는 활동을 10년 동안 해왔던 셈이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는 실패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이런저런 이유로 노동판을 떠나야만 했다. 생활고는 물론이고 정규직 노조와의 갈등도 컸다. 자연히 사람에 대한 회의도 커져갔다.

▲ <산재일기> ⓒ아를

'하창민'과 같은 존재들,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철 작가와 함께 하창민 씨를 만난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활동가는 이 책에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만날 당시 그는 채소 배달일을 하고 있었다. (현재는 경주에서 용접공 일을 하고 있다. 다시 자신의 과거 일로 돌아간 셈이다.) 배달 일 때문에 약속시간에 3시간이나 늦은 그였다.

"파김치가 되어 있는 그를 보면서 서글펐다. 화가 났다. 멀리 배달을 보낸 그의 사장에게가 아니었다. 자신의 안녕만을 위해서였다면 하지 않아도 됐을 싸움, 자기보다 낮은 처지에 있는 노동자들을 위해 뛰어든 싸움에서조차 밀려난 희망 없는 현실에, 입장이 다르다거나 방향이 틀렸다거나 하는 공허한 지적에 그가 입었을 마음의 상처들에 화가 났다. 그가 활동했던 노동조합 사무실은 누추했지만 초라하지 않았고 집회가 열리면 열두어 명밖에 모이지 않았지만 당당했다. 그는 자신의 일을 좋아하고 그 일터를 바꾸고 싶어 했던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회사나 동료들과 갈등이 이는 걸 원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피해 가지도 않았다. 굽히지 않았고 부정의한 일이면 바로잡고자 했으며, 거침없되 여렸던 그는 내가 책으로 배우면서 그려본 노동자 계급의 이상형 같은 사람이었다." 174p

생각해보면, 기자생활을 하면서 비정규직 권리를 위해 활동하는 수많은 활동가들을 만났다. 때로는 노동현장에서, 시민단체에서, 노조 상층부에서.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소명을 다하는 이들도 있으나, 그렇지 않은 이들도 상당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이유로 '그곳'을 떠나 다른 삶을 살아간다. 하창민 씨도 그중에 한 명이다.

2021년 1월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되면서 산업재해가 발생하게 되는 구조적 배경, 숫자에 가려진 피해자들의 사연이 주목받게 되었다. 산재 통계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눈들이 많아진 셈이다. 그 효과로 조금 더 노동자들이 살기 좋아진 세상이 된 것은 분명하다.

안타까운 감정도 든다. 수면 아래 갇혀있던 '산업재해'를 끄집어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하창민' 같은 존재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할까. <산재일기>를 읽어 내려가면서 들었던 의문이다. 이 책에서 나오는 17명의 다양한 사람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산업재해 이야기는 단어 하나하나가 가슴에 꽂혔다. 산업재해 통계에 가려진 또다른 ‘존재’를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는 이유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이기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싸움에 나선 사람을 여럿 만났다. 녹취를 정리하며 그들 각자의 싸움과 그것이 쌓인 역사를 가늠해보곤 했다. ~ (중략) ~산업재해라는 사건에 대응하는 여러 개인의 싸움은 보상과 처벌이라는 영역에서의 싸움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고라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평생 견디고 버텨내는 일로도 싸움은 계속된다. 사고 이후를 겪어내는 삶 말이다. - 14p,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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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환주

2009년 프레시안에 입사한 이후, 사람에 관심을 두고 여러 기사를 썼다. 2012년에는 제1회 온라인저널리즘 '탐사 기획보도 부문' 최우수상을, 2015년에는 한국기자협회에서 '이달의 기자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기획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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