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열린 한일중 정상회담은 경제협력 복원 의지와 지정학적 이견 표출이 엇갈린 자리였다. 3국 모두 경제적 도전에 직면한 상황에서 역내 국가들이 협력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동시에 미중 전략 경쟁, 한미일 군사협력, 북핵 문제 및 북러 밀착, 대만 문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지정학적 문제에 대한 이견을 좁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반도 비핵화 문제는 이를 관통하는 프리즘이다. 한일은 비핵화가 공동의 목표임을 공동선언에 담고자 했지만, 중국이 난색을 표해 각각의 입장을 밝히는 수준에 머문 것이다. '한반도 비핵화'가 명기되지 않은 것은 2012년 이후 처음인 만큼, 큰 후퇴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후퇴는 다차원적이다. 한반도 비핵화가 3국 정상회담 공동선언에 담긴 때는 2019년이 마지막이었는데, 그만큼 그 이후로 3국을 포함한 관련국들의 이해관계와 입장이 달라졌다. 왜 그럴까?
2018〜2019년에 있었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허망하게 좌초된 것이 직접적 원인이다. 이를 거치면서 조선은 '안보는 핵으로, 경제는 자력갱생으로, 외교는 중국·러시아 중심으로 가겠다'는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이 와중에 미국과 한국에서 정권교체가 일어나면서 바이든 행정부와 윤석열 정부는 사실상의 한미일 동맹 구축에 박차를 가해왔다. 이는 중국과 러시아의 전략적 우려를 자극해 반작용을 불러왔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인 이들 나라는 한미일의 책임론을 강하게 제기하면서 대북 제재 완화와 "조선의 합리적인 안보 우려 해소"로 맞불을 놓아왔다.
무엇보다도 미중 전략 경쟁과 러-우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중국과 러시아는 지정학적 고려를 북핵 문제에 강하게 투영해왔다. 미국이 아시아와 나토의 동맹국들을 규합해 중·러를 상대로 공동의 전선을 강화하자 중국과 러시아도 조선의 핵보유를 전략적 '부채'보다는 '자산'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은 조선의 핵무장을 사실상 용인하고 있고 심지어 러시아는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에서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이를 포착한 조선도 이들 나라와의 관계 개선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로 인해 1990년대 이후 조선의 핵과 미사일 활동은 절정에 달하고 있는데, 북중·북러 관계도 강화 추세에 있다.
이러한 상황 전개는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그렇다. 우선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지정학적 환경 개선이 중요하다. 지정학의 악화는 북핵의 질적·양적 강화의 자양분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중국의 입장과 역할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미국 주도의 봉쇄 정책의 대상이자 모든 관련국과 대화와 소통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나라라는 독특한 성격을 갖고 있다. 또 조선 및 러시아와의 전략적 협력에 나서면서도 3자 결속에는 거리를 두고 있다.
이는 곧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환경 개선이 대중국 봉쇄 전략의 이완과 대화와 협상의 중재·촉진자로서의 중국의 역할 모색이 맞물려야 가능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16년째 산소마스크를 끼고 있는 신세인 6자회담의 재개가 그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다.
둘째는 '비핵화를 통한 관계 개선'에서 '관계 정상화를 통한 비핵화 모색'으로 접근법을 달리해야 한다. 이는 주로 한미일의 접근법을 말한다.
지난 30년 간 대북 협상 및 접근의 교훈은 조선이 핵을 포기하면 정치적·경제적·외교적 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방식이 실패했고 앞으로는 더더욱 그럴 것이라는 데에 있다. 이에 반해 한미일이 비핵화는 장기적이고 궁극적인 목표로 유지하면서도 조속히 대북 관계 개선에 나서면 조선의 전략적 판단에도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끝으로 비핵화에 대한 새로운 어법이 필요하다. 필자가 일관되게 주장해온 비핵무기지대(비핵지대)가 바로 그것이다. 둘 사이에 가장 큰 차이는 전자엔 합의된 정의가 없는 반면에 후자는 국제 규범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는 데에 있다. 즉, 비핵화는 주로 조선의 핵과 미사일 폐기에 한정된다면, 조약 형태인 비핵지대는 미국 등 핵보유국의 의무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이는 비핵화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는 조선에 수용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이라는 점에서 실용적이다. 비핵지대 조약에는 중국과 러시아의 핵 불사용 및 불위협도 포함된다는 점에서 한국의 안보에도 이롭다.
어느덧 비핵화는 '엇갈림의 언어'가 되었다. 한미일 정부 등은 여전히 비핵화를 강조하지만, 이들 나라의 전문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비핵화가 불가능해졌거나 먼 훗날에야 도모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미국 내에서조차 '중간 단계'나 '군비통제'라는 말이 나온다.
하여 '사즉생'의 접근이 필요하다. '선 비핵화'를 핵심으로 삼은 기존의 방식을 과감하게 접고 비핵화라는 용어를 비핵지대로 대체하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그래야만 폭주를 거듭하고 있는 조선의 핵 고도화를 제한하고 장기적으로나마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한반도'를 도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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