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세균전 연구자들은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세균무기를 본격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여긴다. 특히 미국의 연구자들은 아주 소규모로 적진에다 뿌려 무기의 성능을 실험하는 시도조차 없었다고 본다. 한반도 세균전 의혹을 부인하는 근거를 모아보면 크게 세 가지다. △1950년 무렵 미국은 세균전을 펼칠 기술적 능력을 갖추지 못했고 △공중에서 세균폭탄을 떨어트렸다고 자백한 미 공군 포로들의 진술은 강압과 회유에 따른 것이고(포로석방 뒤 진술을 뒤집었고) △이른바 '중립적인' 국제조사단들이 내놓았던 세균전 '증거'는 공산권의 선전공세에 지나지 않았다.
데트릭 기지에 특수작전국(SOD) 설치
한국의 연구자들도 한반도에서의 미국 세균전 의혹을 대체로 부인하는 쪽이다. 군사편찬연구소 조성훈 연구위원도 그러하다. 그는 미국이 세균전을 펼쳤다는 공산 진영의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여긴다. 미군포로의 자백이나 국제조사단의 주장은 공산권의 선전공세라는 얘기다. 다른 무엇보다 그는 6.25 전쟁 기간 동안에 미군의 세균전 능력이 부족했다는 점을 꼽는다. 주로 미국 쪽 자료들을 바탕으로 한 그의 글에 따르면, 미국이 생물학전(세균전) 분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이 터지기 1년 전쯤으로 본다.
[1949년 5월 미 국방장관 제임스 포레스탈은 데트릭 기지에 특수작전국(SOD)를 설치하도록 인가하여 특별한 생물학전 분야에 대한 연구를 하도록 하였다. 이는 엄격히 실험 규모의 연구와 시험공장 개발 수준이었다. 1950년까지 생물학전 약품을 생산하는 설비도 없었고, 그것을 생산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없었다. 그 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한국에는 단지 3명의 화학전 장교가 있었다고 한다] (조성훈, '한국전쟁에서의 세균전 논쟁 비판'『군사』제41호, 2000).
위 글의 참고 자료는 한국전쟁이 교착상태에 있던 무렵인 1952년 5월 미군 현역 중령이 작성한 미 국방부 내부문건으로 보인다. 눈길을 끄는 부분은 특수작전국(SOD)다. 한국전쟁 1년 전쯤에 미 국방부가 미국의 생화학전 중심기지인 데트릭 기지에서 비재래식 무기를 이용한 '특수작전'을 펼칠 태세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난 글에서 봤듯이, 미 데트릭 기지의 생화학전 무기 개발 책임자 에그버트 블린 육군소장(미 육군 화학부대장)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2주도 안 돼 미 화학부대가 한반도에 상륙했고 그 뒤 꾸준히 부대 전력이 강화됐다"고 밝혔다. 또 다른 글을 보자.
[1950년 9월27일 미 국방장관은 육군에게 파인 블러프 조병창에서 공식적으로 공격적인 생물학전 능력을 수행하도록 지시하였다고 한다. 1952년 초 이곳에서 대인용 생물학전 무기공장(BW Antipersonnel Plant)은 40%가 건설되었고 그 해 10월에 (세균무기를) 생산할 것이 예상되었으나 11월에 완공되었으며, 1953년 12월에 이 공장의 성능실험이 이뤄졌다고 한다] (조성훈, 앞의 논문).
미 중남부 아칸소 주에 자리한 파인 블러프 조병창은 지금도 가동 중인 무기제조공장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일본의 민간 주거지역에 화재폭풍을 일으켜 엄청난 희생자를 냈던 소이탄을 주로 생산해냈던 곳이다. 전쟁 중엔 '화학전 조병창'(Chemical Warfare Arsenal)이었다가 그 뒤 이름이 바뀌었다. 그러면서 생물학무기(세균무기) 생산도 겸하게 됐다. 조위원이 위의 글을 쓰면서 참고한 자료는 미국의 생화학전 전문 연구자 앨버트 모로니의 책(제목은 America's Struggle with Chemical-Biological Warfare, 2000)의 한 부분이다.
모로니는 20년 넘게 워싱턴에서 국방 관련 콘설턴트로 일해온 생화학전 전문가다. 생화학전에 관한 대중적인 책들을 써내 그런대로 이름이 알려진 연구자다. 모로니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한반도 세균전 의혹을 부인한다. 하지만 위 인용문에서 보듯이 한국전쟁 기간 동안에 미국은 세균전 능력을 키우려 했다는 것은 부인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공사가 늦어지는 바람에 한반도의 적진을 겨냥해 생물무기를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선 다른 견해도 있다. 모로니가 언급한 파인 블러프 조병창 안의 공장 말고도 세균무기를 만들었을 장소로 꼽히는 곳이 여럿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메릴랜드 주 테트릭 기지다. 그 기지 안에는 대규모 연구 실험실이 있고, 엣지우드 조병창(Edgewood Arsenal)도 가깝다. 엣지우드에는 2015년 한국정부의 허가 없이 한국에 탄저균을 택배로 보내 큰 논란을 불렀던 엣지우드 생화학연구소가 자리잡고 있다. 유타주 더그웨이 무기성능시험장도 세균전과 관련이 깊다.)
러시아 문헌의 신뢰도 논란
미국의 한반도 세균전 의혹을 부인하는 미국의 몇몇 연구자들은 한국전쟁 기간 동안 공산권에서 내놓은 '세균전 증거'의 신빙성을 따져보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케스린 웨더스비(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학 교수)와 밀튼 라이텐버그(메릴랜드대 국제안보연구센터 선임연구원) 두 사람은 1998년 일본 <산케이신문(産經新聞)> 기자가 러시아 연방 대통령문서관에서 얻어낸 12개의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세균전 '설'이 공산권의 선전에 지나지 않은 허구라고 주장했다.
이 12개의 문헌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2-1953년 사이에 소련-중국 수뇌부가 주고받았던 문서를 가리킨다. 케스린과 웨더스비는 이 문헌들을 분석한 결과 "한국전쟁 당시 중국과 북한은 소련의 허락 혹은 도움으로 세균전 혐의에 대한 증거를 조작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전예목, '6·25전쟁 시기 세균전 설 제기 과정과 내막', 《군사(軍史)》120호, 2021년 1월 참조).
하지만 이들이 일본 극우 성향의 언론사 기자로부터 건네받은 12개의 문헌의 신빙성에 문제가 없지 않다. 무엇보다 원본이 아닌 사본인데다, 그것도 복사기를 써서 사본을 만든 게 아니라 부분적으로 손으로 베껴 쓴 수기(手記)였다. 원본의 신빙성을 보여주는 서명이나 문서 번호와 같은 기본정보가 없다.
두 연구자(케스린과 웨더스비)는 사본에 나오는 인물·시간·사건 정황이 다른 사료 문헌들의 서술과 어긋나지 않는다면서 사본 내용이 누군가의 의도에 따라 조작됐을 가능성은 적다고 주장한다. 만에 하나 KGB 같은 정보기관이 개입했고 일본 극우 성향의 언론사가 들러리를 섰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12개의 러시아 문헌과 관련된 '한반도 세균전 허구설'은 다른 논란의 불씨로 남았다.
중국군 위생부장이 남긴 회고록
윌슨센터(Wilson Center)는 미 워싱턴에 모여 있는 많은 싱크탱크 가운데 하나다. 그 홈페이지(https://www.wilsoncenter.org)에 들어가 보면, '냉전국제사 프로젝트'(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약칭 CWIHP)라는 항목이 보인다. 지난 냉전 시기에 만들어졌던 각종 문서들을 발굴해내 그와 관련된 사항들이 지닌 의미를 새롭게 분석한다는 프로젝트다. 여기에는 한반도 세균전을 부정하는 글들이 여러 편 실려 있다.
앞에서 12개 러시아 문헌을 분석했던 밀튼 라이텐버그가 쓴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생물무기 사용에 대한 중국의 거짓 주장'(China's False Allegations of the Use of Biological Weapons by the United States during the Korean War)이라는 긴 제목의 글도 그 가운데 하나다. 라이텐버그는 중국 인민지원군 위생부 부장이었던 우즈리(吴之理)가 남긴 회고록을 바탕으로 미국의 세균전 '설'을 조작해 키운 쪽이 중국이라 주장한다.
우즈리의 회고록은 1997년에 쓰였으나 2008년 그가 죽은 뒤에 발견됐고, 2013년 11월 중국 잡지인 <얀후앙춘취우>(炎黃春秋)>에 실렸다(炎黃春秋는 1991년 개혁적 성향의 공산당 원로들이 창간한 잡지이다. 비판적 논조 때문에 중국 정부와 마찰을 빚다가 시진핑 집권 뒤인 2016년 사실상 폐간됐다). 지금부터는 라이텐버그의 글과, 이와 관련한 연구논문을 쓴 전예목 연구자의 글을 길잡이 삼아 우즈리가 썼다는 문제의 내용을 간추려 본다.
강원도 평강군에 주둔하던 중국인민지원군 제42군은 '1952년 1월28일 미군의 비행기가 지나간 뒤 곤충이 발견되었다'는 내용의 전문(電文)을 1월 29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부와 위생부에 각각 보냈다. 위생부에는 곤충 견본도 전달하였다. 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제42군의 전문에 큰 관심을 가졌고, 이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고했다.
'미국이 세균전을 펴고 있다'는 중국의 공세가 시작된 것은 펑더화이 사령관이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고한 뒤부터로 알려진다. 중국 베이징 주재 소련대사 쿠즈네초프가 소련 외무상 몰로토프에게 보낸 비밀 전문에 따르면, 마오쩌둥(毛澤東)이 쿠즈네초프를 면담하는 자리에서 미국의 세균전에 대해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고 한다. "미국이 세균전을 펼치고 있다"며 마오쩌둥이 미국을 비난한 것은 펑더화이 사령관의 보고를 들은 뒤부터였다.
펑더화이 사령관의 분노
라이텐버그가 전하는 우즈리의 회고록 내용에 따르면, 그런 상황에서 문제가 생겼다. 중국 인민지원군 위생부장 우즈리는 제42군이 보내온 곤충 견본을 조사했지만, 감염성 세균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에 따라 우즈리는 "미군이 세균전을 폈다는 증거는 없다"고 펑더화이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펑더화이는 매우 강하게 우즈리를 몰아붙이며 모욕을 주었다. 우즈리의 회고록을 보자.
"위생부장은 미 제국주의의 간첩이라서 적을 대변하여 말하고 있다. 전쟁터에서는 1천 명, 1만 명이 죽을 수도 있지만, 세균무기로 단 1명이라도 죽으면 내가 너를 찾아 끝장을 내겠다"(吴之理, 「1952年的 细菌战是一场虚惊」, 『炎黃春秋』 2013年 第11期, 라이텐버그'China's False Allegations' 16쪽에서 재인용).
라이텐버그에 따르면, 펑더화이 사령관이 불같이 화를 냈던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미국이 세균전을 펴고 있다'고 베이징에 올렸던 보고가 틀린 것이라면, 펑더화이는 신중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기 마련이었다. 미국이 세균전을 실제로 폈는지 어떤지 정확히 사실을 확인한 뒤에 베이징 상부에 보고했다면 문제가 없을 텐데, 확실한줄 알았던 위생부장의 세균전 보고가 틀릴 수도 있으니 화를 냈다는 것이다.
라이텐버그가 전하는 우즈리의 회고록 내용에 따르면, 이런 불편한 상황을 벗어나려고 우즈리가 생각해낸 꼼수가 '세균전 증거 조작'이었다. 그는 먼저 페스트 균을 멀쩡한 벼룩들에 집어넣어 감염시킨 다음, 미 비행기들이 공중에서 뿌렸다는 세균폭탄의 벼룩으로 둔갑시켰다. 믿기 어렵지만 이런 내용이 사실이라면, 미국의 세균전을 기정사실로 만드는 증거 조작에 그가 앞장섰다는 얘기가 된다. 우즈리는 (지난 글에서 살펴봤던) 영국인 조지프 니덤(케임브리지대, 생화학)이 중심이 된 '국제과학위원단'(International Scientific Commission, ISC)이 미국의 세균전을 조사하러 현지에 갈 때도 안내자의 역할을 맡았다.
저우언라이, "너희가 속임수 썼는가?"
라이텐버그의 주장에 따르면, ISC의 7인 조사위원 가운데 소련인 주코프-베레즈니코프는 우즈리가 내민 '페스트 벼룩'이 조작된 증거라고 의심하며 미국의 세균전 의혹을 믿지 않았던 듯하다(주코프는 731부대의 세균전 범죄를 다룬 1949년 하바롭스크 전범재판의 조사관으로 활동했던 이력을 지녔다). 주코프는 소련으로 돌아가 스탈린을 만났을 때 그런 그의 의심을 전했다고 한다. 그에 따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중국 쪽에다 '세균전이 사실인지 의심스럽다'는 내용의 비밀 전문을 보냈다. 그러자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놀라 사실확인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우즈리의 회고록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소련쪽 전문을 받은 뒤) 저우언라이는 황커창(黃克誠) 총참모장과 홍쉐즈(洪學智) 부사령을 불러 "너희가 속임수를 사용하였는가?"하고 물었다. 홍쉐즈는 "그렇지 아니 하였다면 보고할 것이 없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저우언라이는 "(세균전 선전을) 즉시 철회하라"고 명령하였다] (吴之理, 앞의 글).
라이텐버그가 전하는 우즈리의 회고록 내용에 따르면, "중국 수뇌부만 (미국의 세균전 설이 조작됐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하부 조직은 이를 전혀 몰랐다. 그렇기에 이후 중국의 필자들이 (나아가 전세계의 필자들이) 미국이 '세균전'을 실시하였다는 내용을 기술하였다"고 밝혔다. 믿기 어렵지만 이런 내용이 사실이라면, 미국의 한반도 세균전 의혹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북한이 1951년부터 줄기차게 내세운 세균전 의혹을 국제문제로 키운 것은 중국 쪽이지만 뒤끝이 찜찜하다. 위 글에 따르면, 소련 수뇌부도 미국의 한반도 세균전 '설'이 그야말로 '설'에 그친다는 것을 잘 알게 됐다는 것이다.
헝가리 기자 티버 머레이가 남긴 글에 따르면, 1952년 3월 북한 보건성 부상(副相)인 로진한은 머레이에게 "우리는 (한반도에 파견돼 주둔 중이던) 중국인민지원군을 통해 세균 공격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Tibor Méray, 'The Truth about Germ Warfare' Franc-Tireur, 1957. 전예목, '6·25전쟁 시기 세균전 설 제기 과정과 내막', <軍史(군사)> 120호, 2021년 1월 참고).
그렇다면 북한도 중국의 조작에 속은 채 미국의 세균전을 비난했던 것일까.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북한은 나름의 방역 전문가들을 현장으로 파견해 피해상황을 조사하고 세균에 감염된 것으로 의심되는 환자들을 격리시키는 등 바삐 움직였다. 특히 김일성은 미국의 세균 무기가 빈번하게 정기적으로 살포될 것을 매우 두려워했다고 알려진다. 이런 정황으로 미뤄, 북한은 미군의 '세균무기' 살포가 사실이라고 굳게 믿었다고 보인다. 북한 지도부나 보건행정 관계자가 우즈리가 남겼다고 알려진 문제의 회고록을 읽었다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그렇다고 우리쪽 세균 희생자가 살아나느냐?"며 화를 냈을 것이다.
우즈리 회고록에 누군가 손을 댔다면?
여기서 짚어볼 부분이 있다. 위에서 '라이텐버그가 전하는 우즈리의 회고록 내용에 따르면'이란 표현을 거듭 되풀이한 까닭이 있다. 우즈리가 남긴 회고록이 진품이냐, 내용이 사실이냐는 논란 때문이다. 진품이라 하더라도 내용이 사실과 거리가 멀 수도 있다. 회고록에 나오는 당사자들은 이미 저세상 사람들이 됐다. 펑더화이(1898-1974)는 1966년 문화혁명 때 홍위병에게 조리돌림을 당하는, 그야말로 인간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수모를 겪었고 1974년 베이징에서 죽었다. 그가 살아있다면, 또는 우즈리의 회고록과 관련된 기록을 남겼다면, 교차 검증이 가능하겠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이미 고인이 된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1898-1976)도 마찬가지다.
글 위에서 우즈리가 회고록 집필을 1997년에 마쳤으나 2008년 그가 죽은 뒤에 발견됐고, 2013년 11월 중국의 개혁성향 잡지인 <얀후앙춘취우>(炎黃春秋)에 실렸다고 했다. 우즈리의 회고록에 의심스런 눈길을 던지는 사람들은 '혹시나 누군가가 회고록 발견 뒤 원고의 일부 내용을 의도적으로 고쳐 가공 첨삭했을 가능성은 없을까'를 생각한다. 다들 아는 얘기지만, 미 CIA나 소련 KGB 같은 기관들은 정보 조작에 관한 한 신에 가까운 솜씨를 지녔다. 우즈리 회고록의 내용 일부를 입맛에 맞게 손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밀튼 라이텐버그는 우즈리가 남긴 회고록에 바탕을 두고 한국전쟁 시기에 북한을 비롯한 공산권이 그토록 미국을 비난했던 세균전 '설'이 선동용 '거짓 주장'(false allegation)이라 여긴다. 하지만 누군가 회고록 내용에 손을 댔을 가능성을 떠올린다면, 얘기가 또 달라진다. 미국이 731부대의 전쟁범죄에 면죄부를 주었다는 비난을 무릅쓰고 세균전 정보에 그토록 매달렸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더욱 그러하다. 아시아·태평양전쟁 바로 뒤에 일어난 한국전쟁의 전선이 한반도 중부로 거의 굳어진 상황에서 지난날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가 건네준 세균전 정보를 실전에 실험해보고 싶은 유혹을 누르기는 쉽지 않다.
같은 맥락에서, 미국의 한반도 세균전 의혹에 관한 논문을 쓴 전예목 연구자도 앞의 라이텐버그의 주장(중국 인민지원군 위생부장 우즈리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세균전' 증거가 조작됐다는 주장)이 미국에 의한 '세균전' 설을 '완전히 부정할 수 있는 근거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전예목은 아래와 같은 두 가지 가능성을 짚었다.
[앞의 논의를 종합하여 봤을 때, 가령 세균전 '증거'의 조작을 입증하는 것만으로는 증거가 불충분하게 발견될 수 있는 소규모 실험적 '세균전'을 미국이 감행하였을 가능성과, 공산 측에서 증거를 과장하였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세균전' 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다](전예목, 앞의 논문).
이제 글을 매듭지어야겠다. 미국의 한반도 세균전 의혹을 둘러싼 진실은 (여러 주장과 '설'이 맞서 있기에) 제대로 판단하기 어렵다. 숲에서 소리가 들리지만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유타주 더그웨이 문서보관소 안에서 '특급기밀'로 분류된 미국의 생화학전 관련 문서들과 그밖의 숨은 자료들이 공개되더라도,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세균무기를 살포했는가를 둘러싼 논란은 그치지 않을 것 같다. 분명한 것은 731부대 '악마의 의사들'로부터 얻어낸 생체실험 세균전 정보를 바탕으로 미국은 생화학 전력을 빠른 시간 안에 키워냈다는 사실이다.
키운 힘은 쓰고 싶어지고 돈을 댄 쪽이나 개발한 쪽에서나 무기의 효과가 어느 정도인가 확인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래서일까, 미국 안에서조차 아주 소규모의 세균무기 실험이 이뤄졌다. 뉴욕시 지하철, 샌프란시스코 해변 같은 곳에서다. 흑인들과 제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 신자들이 세균 모의공격의 실험대상이 됐다. 미 정보기관 CIA도 얽혀 있다. 반미 성향의 해외 정치인은 세균 독극물로 제거될 대상으로 꼽혔다. 데트릭 기지의 연구자(박사)가 '위험인물'로 찍혀 뉴욕 맨해튼 고층 호텔에서 창문 밖으로 내던져지고 '자살'로 꾸며졌다는, 영화 속에나 나올법한 이야기도 들린다. 연구자의 아들(하버드대 심리학박사)은 아버지의 죽음이 한국전쟁에서의 세균전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긴다. 다루기 조심스럽지만, 다음 글에선 이런 대목들을 살펴보려 한다.(계속)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