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위기를 알리는 경고음이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세계의 석학들이 대의민주주의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잇달아 표명하고 있는 가운데 최근 미국의 한 여론조사기관에서 충격적인 보고서를 내놓았다. 미국 퓨리서치센터가 2023년 2월~5월 세계 24개국 성인 3만 86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59%가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 불만스럽다'고 응답했다. '대의민주주의 체제가 매우 좋다'는 답변은 2017년에 비해 독일(46%→37%), 인도(44%→36%), 영국・캐나다(43%→31%) 등에서 10%포인트 하락했다. 반면, '강력한 지도자가 의회・법원 등의 견제를 거치지 않고 결정하는 정부 체제를 선호한다'는 비율은 2017년에 비해 인도(55%→67%), 멕시코(27%→50%), 브라질(27%→36%) 등에서 대폭 상승했다. 우리나라도 23%에서 35%로 늘어났고, 독일은 6%에서 16%로 뛰어올랐다.
이같은 조사 결과는 왜 유럽과 미국에서 극우 세력이 득세하는지를 설명해 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독재체제를 선호한다는 비율이 26%에 달했다. 퓨리서치센터는 "형식적으로 선거는 치르지만 실제로는 독재국인 '선거 독재국가'(electoral autocracies)가 창궐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 2018)의 저자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보루는 헌법이나 제도가 아니라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의 규범"이라고 지적했다. 헌법에 보장된 권력을 선출된 독재자가 마구잡이로 휘두를 때 민주주의는 전제주의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선거가 독재자의 집권 명분을 주기 위한 요식행위를 전락한 대표적인 사례로는 2차 세계대전의 주범 히틀러를 빼놓을 수 없다. 지금도 남미와 인도, 동유럽 등 세계 곳곳에서 '선거 독재국가'의 민낯을 연일 목도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인류가 고안해 낸 정치체제 가운데 현재로서는 최상의 대안으로 꼽힌다. 그 효능감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국민이 민주주의의 작동을 체득하고 자신의 의견을 직접 대변할 수 있는 해법은 없을까?
시민의회(citizens assembly)는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혁신하고 난관에 봉착한 정치개혁의 돌파구로 등장하고 있다. 선거를 통해 엘리트를 선출해 온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추첨으로 대표를 뽑자는 발상이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추첨으로 500명의 평의회를 구성한 것에서 기원한다. 무작위 추첨 방식은 로마를 거쳐 중세 피렌체 도시공화국과 17~18세기 영국과 미국에서도 활용되었지만 점차 선거가 보편화되면서 정치시스템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시민의회가 역사의 무대에서 다시 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2004년 캐나다에서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는 선거제도 개혁을 위해 시민의회를 소집했다. 단순다수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는 브리티시 콜럼비아주의 1996년 선거에서 자유당은 42%를 득표해 75석 중 33석을 차지했지만, 39%를 득표한 신민당은 이보다 많은 39석을 가져갔다. 이에 자유당 대표 고든 캠밸은 득표율과 의석수의 엇박자를 고치기 위해 시민의회를 창설하겠다고 공약하게 된다. 2001년 선거에서 자유당은 57.62% 득표로 79석 중 77석을 차지해 정권을 잡았지만 약속대로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시민의회를 구성한 것이 최초의 사례로 꼽힌다.
승자독식의 다수결 선거제도를 개혁하기 위한 시민의회는 이후 캐나다 온타리오주와 네덜란드 등으로 확산되었다. 북유럽 아이슬란드와 아일랜드에서는 개헌을 위한 시민의회가 소집되었고,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2020년에 나란히 기후시민의회가 열려 관심을 모았다. 특히 인구의 80%가 가톨릭 신자인 아일랜드에서는 3차례 소집된 시민의회에서 도출된 권고안 가운데 동성결혼 허용, 신성모독 폐지, 낙태 금지 조항 폐지 등이 국민투표에서 통과해 헌법이 개정되었다.
시민의회는 합의회의, 시민배심원제, 공론조사 등과 같은 숙의민주주의의 한 유형이지만 2010년 이후 활용빈도가 급증하고 있다. OECD 보고서(2022)에 따르면 1986년부터 2022년까지 각국에서 300여회 시민의회가 운영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OECD는 이같은 현상에 대해 "숙의 물결(deliberative wave)이 몰려온다"고 표현하고 있다.
시민의회는 전체 시민의 인구통계적 특성(성별, 지역, 연령 등)을 대표할 수 있도록 추첨 방식을 통해 '작은 공중'(mini-publics) 차원의 시민의원들을 선정해 공공의제에 관해 집단학습과 숙의를 거쳐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내는 방식이다. 정치권이 이해당사자여서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 정치개혁 이슈나 국민적 합의가 필요한 윤리적・사회적 논쟁 사안이 대상이다. 개헌, 선거제도, 정당법, 기후위기, 낙태, 존엄사 등이 핵심 의제로 다뤄진다.
우리나라에서도 2018년 낙태죄 폐지, 국회의원 수 증가 등을 의제로 KBS가 주관한 시민의회가 열렸고, 2021년에는 탄소중립 시민회의와 온라인 기후시민의회도 개설되었다. 2023년 5월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주관한 선거제도 개혁 500인 회의와 2024년 4월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가 소집한 연금개혁 500인 회의도 대표적인 시민의회라고 할 수 있다. 국회가 주관한 두차례의 500인 회의는 숙의과정을 KBS가 생중계로 방송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실시된 무수한 공론화가 '찻잔속의 태풍'이거나, '그들만의 잔치'(시민참여단)였다는 비판에서 벗어나 일반국민들과의 소통을 통해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시도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시민의회는 숙의민주주의에 내재된 한계도 그대로 노정하고 있다.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포괄적 참여, 참여자(시민의원)의 대표성, 토론과정의 숙의성 등이 담보되지 못하면 여느 공론화처럼 시민의회도 정책결정권자의 책임회피나 정당화의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두차례의 500인 회의도 실제 숙의기간이 3~4주로 매우 짧아 복잡한 선거제도와 연금개혁에 대해 시민참여단이 충분히 학습하였는지 의문이다. 더구나 500인 회의의 권고안에 대해서도 여당이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 실효성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유럽에서도 시민의회에 대한 정치권의 견제와 냉소, 주류 언론의 비판적 태도, 국민적 공감대 부족 등으로 제도개혁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의회는 엘리트 중심의 기존 정치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극복하고, 시민권력(civil power)의 시대에 새로운 민주주의의 견인차 역할을 선도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승자독식의 다수결 민주제로 인한 극단적인 대결 정치를 종식시킬 수 있는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주도 개헌으로 제7공화국 대한민국의 미래를 설계할 청사진도 시민의회에 맡겨진 시대적 소명이라고 할 것이다.
(이 글을 쓴 정정화 교수는 한국지방자치학회장을 지냈으며 국민주도개헌 만민공동회 정책기획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이 연재는 공공선 거버넌스(원장 강치원)에서 기획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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