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그의 영화 세계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관심 가져온 주제는 인간의 은폐된 욕망이었다. <아이 앰 러브>(2011), <비거 스플래쉬>(2016)가 결혼제도에 억눌린 욕망을 탐구했다면 <콜미 바이 유어 네임>(2018)은 동성애적 욕망을, <서스페리아>(2018)는 체제 전복에 대한 욕망을, <본즈 앤 올>(2022)은 죽음충동을 탐구한다. 어쩌면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에게 현 체제는 인간의 욕망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기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 모르겠다. 현실 세계에서 터부시된 욕망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것은 결국 체제 내의 법을 어기는 일이 될 수 있으니 영화야 말로 그 모든 가능성을 탐험하기에 가장 좋은 도구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신작 <챌린저스>(2024)는 감독이 탐구해온 모든 터부시된 욕망들의 대향연장이라 부를 수 있다. 테니스 경기라는 판 속에서 오가는 세 인물들의 욕망 충돌 과정을 살펴보고 있자면 그 동안의 영화들이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나 짐작될 정도다. <챌린저스>가 감독의 이전 작품보다 더 뛰어난 작품성을 성취했다고 쉽게 단정지을 순 없다. 적어도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작품 세계에서 이전의 작품들을 일괄할 수 있는 쉼표 같은 작품이 등장했고 우리는 이 작품을 기점으로 감독의 이후를 더욱 흥미롭게 전망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 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자로 하여금 <챌린저스>를 그토록 중요한 변곡점인 작품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는가? 이를 풀어내기 위해서 먼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세 인물, 타시(젠데이아), 아트(마이크 파이스크), 패트릭(조쉬 오코너)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챌린저스>의 서사 표면과 그 아래
아트와 패트릭은 부잣집 자제들만 입학하는 명문 테니스 학교 출신들이다.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남자 복식조로서 US오픈쉽 주니어 부문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이며 12살 때부터 같은 방을 사용했을 정도로 절친이다. 하지만 주니어 부문 여자 단식 1등을 차지한 타시가 등장하며 두 사람의 관계에 균열이 일어난다. 아트와 패트릭은 타시를 동시에 좋아하지만 타시는 "가족파탄범"이 아니라며 그들 사이에 끼길 거부한다. 그럼에도 그녀를 향한 아트와 패트릭의 욕망은 멈출 줄 모르고 결국 세 사람의 관계는 뒤엉키며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챌린저스>의 서사는 타시를 중심에 둔 두 남자의 애정대결을 전면화 한다. 그런데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인물들의 표정과 시선, 대사와 충돌하는 이율배반적인 행동들을 통해서 서사 표면 아래 더 큰 욕망의 단위들을 창조한다. 우리는 모두 아트와 패트릭이 타시를 욕망하며 서로 대결하는 구도로 영화를 쫓아가지만 결국 영화가 끝난 후 인상에 남는 것은 아트를 사랑스런 바라본 패트릭의 시선, 패트릭을 밀어내면서도 절대 거부할 수 없어 불안하게 흔들렸던 타시의 눈빛, 타시 앞에서 불안을 감추려 입을 앙다무는 아트의 표정 뿐이다. 이러한 인상들은 철저히 서사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이들의 삼각관계를 폴리아모리 관계 그 이상으로 확장한다. <챌린저스>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를 머리로 이해하지 말 것! 영화가 보여주고 들려준 것들 모두를 종합해서 사유할 것! 그런 의미에서 <챌린저스>는 디테일이 생명인 작품이다.
패트릭의 이성애적 욕망과 동성애적 욕망
첫 번째 디테일로 라커룸 장면을 살펴보자. 뉴로셀 타이어타운 챌린저 대회에서 첫 번째 경기를 승리로 이끈 패트릭은 라커룸에서 통장 잔고와 데이팅 어플을 살핀다. 그의 행동이 야기하는 인과관계는 돈이 없어 호텔에 들어가지 못한 전날밤의 경험과 연결된다. 적당한 사람을 골라 상대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겠다는 계획이 깔린 행동이다. 이러한 서사적 목표는 12년 만에 우연히 타시를 만나는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며 자신의 코치가 되어달라는 제안을 하는 장면으로까지 연결된다. 패트릭이 타시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 라커룸의 서사는 반드시 필요한 징검다리 역할을 충실히 맡는다.
반면, 카메라에 담기는 이미지들은 타시를 향하는 서사적 목표와 전혀 상반된다. 핸드폰을 보는 패트릭 앞엔 경기에서 진 이탈리아 선수가 붉은색 삼각팬티만 입은 채 투덜거리며 서 있고 다른 선수들은 이탈리아 선수를 비아냥거리며 발가벗은 몸으로 주변을 배회한다. 데이팅 어플에서 여성들의 사진을 빠르게 넘기던 패트릭의 손가락이 한 남성 사진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던 순간 우리는 그에게 동성애적 욕망이 감춰져 있음을 깨닫는다. 타시를 향한 이성애적 욕망을 대면하는 서사와 달리 카메라의 시선은 전적으로 동성애를 욕망한다. 특히 게임에서 진 선수 앞에 남성성을 과시하며 야유하는 주변 선수들의 행동은 게임에서 패자를 철저히 짓밟는 야만성과 패트릭이 동성애적 욕망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억압하는 폭력성이 어떻게 남성성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는지 여실히 폭로한다.
타시의 오만함과 이중적 분열 사이에서
패트릭의 욕망을 다채롭게 펼쳐내는 서사와 카메라 시선의 충돌 방식은 타시와 아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타시의 서사는 패트릭과 아트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타시가 패트릭과 헤어진 것은 패트릭이 재능만 있는 루저였기 때문이다. 부상으로 인해 최고의 선수 자리에 설 수 없게 되자 타시는 아트와 결혼하여 그를 최정상에 올려 놓음으로써 대리 만족한다. 서사적 차원에서 타시는 영화 전체를 이끄는 설계자이자 욕망의 근원적 대상이다. 하지만 타시를 담아내는 카메라의 시선은 분열적이고 이중적이다. 영화 속에서 타시는 거의 홀로 등장하지 않는다. 타시를 담아내는 프레임의 전면 혹은 후면 어딘가에 두 사람이 반드시 존재하여 끊임없이 이들과의 관계성을 각인 시킨다.
특히 가장 많이 반복되었던 구도는 타시의 뒷모습을 중심에 놓고 화면의 좌우에 각각 아트와 패트릭을 배치하는 삼각구도다. 테니스를 관계로 이해하고 있는 타시는 패트릭과 아트, 두 사람 중 한 명을 선택하여 그 관계를 완성하려 한다. 이는 코트에 홀로 서서 상대의 공을 쳐내 왔던 그녀의 경험에 따른 것이다. 그녀는 혼자 힘으로 주니어 시절에 이미 아디다스의 메인 모델이 된 선수였다. 15초만 공을 주고 받아도 상대가 어떤 존재인지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로 감각과 실력 또한 갖추었다. 그런 타시에게 다른 협력자는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남성 복식조로서 함께 했을 때 가장 완벽할 수 있었던 아트와 패트릭과 달리 그녀는 혼자서 모든 일을 척척 해내며 스스로를 여신의 자리에 위치시켰다. 이러한 타시의 오만함이 그녀를 바닥 끝까지 끌고 내려온 원인이다. 서사는 이를 그녀의 부상에 두고 있지만 정작 그녀의 실패 원인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태도에 있다. 이 사실을 꾸준히 지적하는 것은 카메라의 시선과 구도 뿐이다.
<챌린저스>의 거짓말하지 않는 카메라의 힘
<챌린저스>의 카메라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미지와 사운드를 대동하여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고 관객이 직접 경험한 근거들을 바탕으로 그 속내를 들여다보도록 만든다. 반면 <챌린저스>의 서사는 단일하고 단순하다. 이성애를 중심에 둔 삼각관계에서 한치도 더 나아가지 않고 한 여성을 욕망하는 두 남성의 치열한 대결구도로 모든 사건과 인물들을 납작하게 만든다. 어쩌면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영화의 서사가 체제 내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진리를 이미 깨닫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사는 절대 스스로를 직접 제시할 수 없다. 오직 물성으로 제시된 이미지와 사운드를 통해서 재구성될 수 있을 뿐이다. 서사를 재구성하는 관객의 머리 속은 이미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어 있기에 그 속에서 재구성되는 서사 또한 관객의 편견과 기대감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다. 감독은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이미지와 사운드를 활용하여 서사와 정면으로 대치시킨다. 그 과정에서 야기되는 긴장은 서사의 이면을 해석하여 인물들의 욕망을 입체적으로 묘사하도록 돕는다. <챌린저스>는 이 모든 실험이 성공리에 이뤄진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유일한 결과물이다.
감독의 이전 작품들은 지극히 이미지와 사운드에만 충실하거나(<아이 앰 러브>) 서사에 매몰되어 영화적 물성들이 모두 초라하게 무너져 내린(<비거 스플래시>, <서스페리아>) 한계에 머물러 있었다. 물론 영화적 ‘무드’를 통해 서사의 한계를 훌륭하게 극복해낸 <콜미 바이 유어 네임>과 <본즈 앤 올>이 앞서 존재했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챌린저스> 만큼 서사와 이미지, 사운드의 충돌을 과감하고 도전적으로 밀어붙이진 않았다. 오직 <챌린저스> 만이 사회적 모순과 한계에 멈추지 않고 들끓는 인간의 속된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래서 일까? <챌린저스>는 절대 한번만 봐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적어도 두 번 이상 봐야 인물들의 대화와 표정, 행동과 시선의 어긋남이 오롯이 이해되고 받아들여 진다.
영화는 서사매체이기 보다 시청각 매체에 더 가깝다. 이미지와 사운드를 통해서 관객으로 하여금 서사를 경험케 하고 이로서 영화적 순간을 실재적 체험으로 확장시킨다. 사회와 법, 도덕으로 인해 터부시된 욕망을 영화를 통해 온전히 용인하고 수용하기 위해선 서사를 직접적으로 감각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미지와 사운드가 서사에 복속되어 끌려 다니기 보다 서사를 견제하고 감시하여 서사가 전달하지 못하는, 또는 은폐하려는 그 이면을 이미지와 사운드가 끊임없이 가시화해야 한다. 그랬을 때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진정한 해방을 맛볼 수 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챌린저스>를 통해서 이룩하고자 했던 이상향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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