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의 내년도 의대 입학정원 2000명 증원 발표가 촉발한 보건의료재난 심각 단계 위기상황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미 지출된 사회적 비용의 규모도 크거니와, 의사인력의 체계적인 양성과 배출이 어그러질 경우 예상되는 부작용은 가늠조차 어렵다. 이번 주에 의대교수들의 사직 효력이 발생하고 대입요강 확정 기한도 임박한다. 이제서야 대통령실은 의료개혁 과제를 논의하는 사회적 협의체인 '의료개혁 특별위원회'를 출범한다지만, 의협은 증원 전면 백지화를 주장하면서 의사증원은 오직 의사와 정부 일대일 협의체로만 가능하다며 불참을 밝혔다. 의정 모두가 말하는 '국민의 건강한 미래'는 절차적 정당성도, 명분도 없이 볼모로 잡혀 있다.
우리는 이해관계자들의 협의를 거치지 않거나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에 반하여, 집권자의 '정치적 결단 혹은 선언' 으로서 던져지는 정책이 초래하는 거대한 사회 혼란과 파행의 위험을 목도했다. 이런 정치와 정책이 매우 위해하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의사인력정책처럼 매우 높은 수준의 전문지식이 필요한 영역에 대한 정책결정은 누가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반드시 해당 분야 전문가들만이 논의할 수 있다면,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넘어 다수 시민의 필요와 이해까지 충분히 반영한다고 믿을 수 있는가.
의료 공백 사태의 본질 중 하나는 의사라는 직업전망과 기대를 둘러싼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사회는 의료 전문직에 대한 사회적 필요를 기존의 방식으로 충족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 의사가 일하려고 하지 않는 분야와 지역을 더 이상 지금처럼 방치해둘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많은 시민들이 의사증원을 지지한다. 따라서 지금 상황에서 의료계와 정부만이 갈등의 당사자가 아니라, 정부와 의료계에 정책결정을 위임했던 우리 시민들 역시 피해 당사자이자 이해관계자이다. 시민들이 더 크고 강력하게 발언할 권리가 있고 정책결정의 구조에 포함되어야 할 첫 번째 이유이다. 의료계가 의대증원을 비롯하여 의료정책 논의 구조를 정부와의 폐쇄적인 협의체로만 고집하는 것은 다른 사회적 갈등 중재의 관행에 비추어도 대단히 특권적인 요구이며, 문제 해결을 바라는 시민들의 큰 반감을 초래할 가능성도 높다.
미래의 보건서비스 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적정 의료인력 규모의 예측, 전문 분야와 지역 간 의사인력의 불균형은 한국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운 문제이다. 의사들이 규칙적인 업무 일정, 일과 생활의 균형, 더 높은 수입을 보장하는 전문분야를 선호하는 양상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나라에서는 의과대학 학생 수 조절, 선발 방식 변경, 수련 프로그램 조정, 인센티브 제공, 다른 의료인력에게 의사업무를 위임하는 등의 정책을 시행하고 있고, 프랑스나 독일 등에서는 의료인력의 이민을 주요 수단으로 강구하기도 한다.
의사인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증원 외에도 다양한 방법이 가능하고, 실제로 추진되고 있는 해외의 여러 사례들도 있음을 고려하면,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대안들이 적용 가능한지를 논의하기 위해 의료를 넘어선 영역과 가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다양한 사회구성원들의 개입이 필요하다. 민주적 책무성 강화나 소비자 권리 측면에서나 국제적으로 보건의료 정책결정과정에 대한 시민과 환자의 참여는 지속적으로 강조·확대되고 있다. 가장 오래된 보건의료 분야의 시민참여 형태인 영국의 시민위원회의 첫 번째 활동 목표는 '시민의 뜻에 부합하는 정책을 만드는 것' 이다. 인력과 재정 등 자원배분의 정치적 결정에 대한 책임, 그리고 가치와 선호의 근거가 바로 시민에게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의사정원 확대의 근거로 인구고령화와 의료비 증가, 필수의료 공백을 지목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지금 같은 단순 증원만으로 이런 문제들이 저절로 해결될 수 없다. 가령 인구 고령화는 지금처럼 노인을 '사회문제화' 하는 관점과 노인보건의료비를 '비용'으로만 계산하는 틀에서는 계속 문제로 남는다. 정부는 오히려 의료인력정책을 넘어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보건의료체계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을 제안하고, 지금의 상황을 시민들에게 어떤 변혁적 체계가 필요하고 수용가능한지 상상하고 토론하는 논의의 장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또한 의료인력은 의료서비스 제공에서 가장 중요한 투입요소이자, 의료비 지출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사실 전자의 이유 때문에, 의대정원 확대를 비롯하여 수가확대, 의사처우 개선 등에 관해서 줄곧 의정 협의의 주도권이 의료계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환자와 소비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좋은 의료서비스를 이용하려고 부담하는 막대한 의료비 지출에 대하여 통제할 권리도 있다. 2023년 국민건강보험공단 건보수입은 94조 9천억원, 민영보험사들의 수입보험료는 237조원에 달한다. 특히 실손형 민영보험은 2006년 도입 이래 16년 동안 수입보험료가 2.6배 증가하며 보험시장규모가 세계 7위를 점유할 만큼 크게 성장했다. 그러나 불충분한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틈탄 민영보험과 의료제공자의 연합이(?) 보건의료의 공공성을 악화시키고 건강불평등을 확대시키고 있다는 증거가 쌓이고 있다. 그럼에도 국민의료비의 적정 관리나 '의료 시장'이 형성되지 못한 지역과 진료의 환자 필요를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는지 이번 의정 대립 속에는 논의되지도 않고 있다.
현재 정부는 보건의료기본법에 근거한 보건의료정책 심의기구로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총25명)를 두고 있지만, 정부와 공급자 대표, 전문가, 수요자대표가 참여하는 구성적 균형을 맞추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정부는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를 방패막 삼아 일방적으로 의사증원을 발표하며 제도를 무력화시켰다. 환자이자 소비자, 시민으로서 의료서비스의 이용에 대한 권리와 건강권을 요구하고 보장받기 위하여 보건의료정책결정과정에 제도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효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보완이 필요하다.
이번 의료공백사태에서 정부와 의료계는 모두 시민을 설득하는데 실패하였다. 시민들의 생명과 건강을 명분으로 삼지만, 그것을 보호하는데 우선순위를 두지 않았다는 것이 시간이 지날 수록 자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태는 다른 한편으로 한국 보건의료체계가 당면한 여러 문제들을 드러낸 거대한 사회적 학습의 장이었다. 환자들 그리고 의료현장을 지켰던 사람들의 고통과 희생을 떠올리면, 자신의 이익만을 쫓는 나쁜 정치와 행동이 더 이상 이 상황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보건의료정책에 대한 참여가 '더 나은 시민, 더 나은 의사결정, 더 나은 정부를 만든다'는 축적된 근거들에 따라, 시민들이 자신의 삶과 건강에 영향을 주는 정책과 정치에 대해 토론하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데까지 가는 더 나은 통로와 기회를 만들어내야 한다.
상시조직으로 보건의료정책을 논의하는 시민위원회를 만들어보는 것은 어떤가. 가깝게는 지난 주말에 열린 시민대표단 500명이 참여한 연금개혁 시민숙의토론회나, 2020년 '서부경남 공공의료확충 공론화 도민토론회' 등 많은 교훈을 남긴 사례들이 있다. 하지만 애써 만든 숙의토론의 결과가 반대 당파의 도의회에 막혀 사업이 지연되거나, 국회의 일정에 따라 폐기될 운명에 놓이는 등 시민들이 결정내린 대로 추진되지 못할 수도 있다(관련기사). 그러므로 시민참여의 결과가 행정적인 책임성과 법적 구속력을 가질 수 있도록 시민위원을 임기제로 운영하거나 예산승인의 권한을 가지는 수준의 심의구조로 강화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렇게 해도 되는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간의 연구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논의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모두 전문가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해당 문제를 어느 전문가에게 맡길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시민, 그리고 이런 시민들의 결정을 지원할 시스템만 있으면 시민사회 구성원들은 핵심적인 의사결정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공동체의 문제해결을 위하여 정부가 제안하는 정책을 이해하려고 하고, 전문가의 설명에 귀 기울이려고 하는 시민을 이해시키지 못하는 정치와 정책은 이미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환자와 시민들의 고통과 분노는 더 지체할 시간이 없다.
* 참고문헌
- Stordeur, S., Léonard, C. Challenges in physician supply planning: the case of Belgium. Hum Resour Health 8, 28 (2010). https://doi.org/10.1186/1478-449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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