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4월, 그리고 16일이다. 누군가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10년이었다. 길다면 긴 세월이지만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 그리고 세월호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이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반면, "세월호, 그만하라"며 할만큼 했다는 목소리도 여전히 흘러나온다. 왜 아이들의 죽음을 매번 끄집어내느냐며, 잊고 살자고 한다. 그것이 유가족들에게 가능한 일일지는 의문이다.
세월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망각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과거의 일들을 잊는 것과 동시에 그 '일들'이 발생한 이유나 원인마저도 지워버린다.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프레시안>에서 '기억'과 '기록'이라는 주제로 인터뷰를 준비한 이유다. 지난 10년 동안 세월호를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기록'하기 위해 노력해온 이들을 만났다.
2014년 4월 16일 제주로 향하던 국내 최대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했다. 선원과 승객 476명 중 304명이 사망했다. 그로부터 10년, 우리는 이 참사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희생자들이 남긴 사진과 영상, SNS 대화, 전남119와 전남경찰청112에 신고된 구조요청, 진도VTS와 해경 간 대화, 선체 인양 후 발견된 블랙박스, AIS 항적 데이터와 선내 CCTV 자료, 국내 및 해외 전문 기관들의 분석, 청해진 해운‧해양경찰 등 관련자에 대한 재판기록 등이 숱하게 쌓여 있지만 국가 차원의 공적인 보고서는 없다.
참사 이후 3개의 국가 조사기구가 8년여의 활동 끝에 2개의 보고서를 발표했지만, "세월호 선체 변형과 손상의 원인이 수중체 접촉에 의한 외부 충격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동시에 다른 가능성을 배제할 정도에 이르지 못해 외력이 침몰 원인인지 확인되지 않았다"는 애매모호한 결론만 남았다.
사회적 참사에 대한 사회적 기록이 부재한 10년. <세월호, 다시 쓴 그날의 기록> 집필에 참여한 김성수 <뉴스타파> 기자와 전치형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를 지난 10일 서울 중구 뉴스타파 사무실에서 만났다. <세월호, 다시 쓴 그날의 기록>은 2016년 <세월호, 그날의 기록>에 이은 개정판이다.(☞ 관련 기사 : "그날 세월호는 '제일 위험한 배'였고, 해경의 실패는 '조직적'이었다")
김성수 기자는 참사 후 10년간 세월호 진상 규명을 위한 탐사 취재를 이어오고 있으며, 전치형 교수는 선조위와 사참위 보고서 작성 과정에 참여하는 등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두 사람과는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세월호선체조사위원회(선조위),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라는 3개의 조사기구의 한계와 미래 세대를 위한 사회적 기록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특조위·선조위·사참위, 비극적 연결 고리 서술에 실패하다
"갖은 진통 끝에 조사위원회가 출범할 때 우리가 기대한 것은 그러한 정치적 구도나 개인적 신념에 휘둘리지 않는 공적인 책임감, 엇갈리는 주장 속에서 증거와 사실을 존중하는 태도, 상식적이고 합리적으로 추론하고 그 결과를 참사의 사회적 기록으로 남기려는 의지였다. 각 조사위원회가 내놓은 아쉬운 결과물은 이 모든 것의 부재와 무관하지 않다. 정부의 방해와 상대 진영의 억지만을 탓할 수는 없을 일이다. 특별법을 제정할 정도로 기존 조직과 지식의 틀에 담기 어려운 참사를 어떻게 조사하고 그 결과를 공유해야 하는지 한국 사회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세월호, 다시 쓴 그날의 기록> 806쪽)
김성수 기자는 "특조위는 대형 참사에 대해서 국회가 특별법을 만들어 진상 조사를 하게 한 첫 사례"였지만 당시 정치권도 사회도 "재난 참사에 대한 인식이나 관점이 부족했다"고 비판했다.
"대형 참사가 발생했을 때 조사는, 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는 잘못이라도 모든 것이 하나하나 비극적으로 결합돼 대형 참사가 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 비극이 어떻게 연결됐는지를 밝혀야 한다.
하지만 첫 단계인 특조위 때부터 조사위원들은 '처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조사를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고, 이 같은 분위기는 특조위 이후 다른 위원회로 이어졌다. 결국 조사 과제들이 '잠수함 충돌'이나 '외력설'과 같은 누군가의 책임을 가정한 서사 구조로 흘러갔다."(김성수 기자)
전치형 교수는 선조위에서 복원한 블랙박스를 통해 세월호 침몰 원인에 대한 기술적·과학적 분석을 했지만, "유가족이 '최종적으로 이해했다'라고 할 만한 것을 제공하지 못했다"며 "위원회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임무가 무엇인지를 계속해서 자문했어야 한다"고 했다.
전 교수는 또 "선조위와 사참위를 거치면서 기술적 언어에 매몰된 경향이 있다"며 "'솔레노이드 밸브가 고착이 됐다, 안 됐다'라거나 '배가 1초에 몇 도씩 기울어졌는지'와 같은 결과가 밖으로 흘러나올 때도 전문 용어에만 집중되면서 유가족과 시민들의 이해를 완전히 차단해 버린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솔레노이드 밸브 고착 때문에 배가 침몰했다가 아니라 '솔레노이드 밸브 고착 같은 사소한 기계적 문제도 견딜 수 없을 만큼 배의 복원성이 나빠서 침몰했다'가 핵심이다. 핵심이 제대로 전달되면, 세월호 침몰 원인은 '청해진 해운의 문제고 감독 기관의 문제고…'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면서 납득 가능한 적절한 수준의 설명이 가능해진다.
국가 조사기구가 해야 하는 일은 고위급의 기소 여부와 같은 사건 하나하나가 아니라 참사 발생의 원인을 종합적으로 서술해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조사 보고서는 전문가나 판사를 위한 것이 아닌 국민들을 위한 기록이 되어야 한다."(전치형 교수)
사회적 기록의 부재, 미래 세대에게 무엇을 기억하게 할 것인가
비록 사참위의 세월호 침몰 원인 결과는 애매했지만, 사참위의 권고는 안전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내용을 담고 있다. 사참위는 △대통령의 사과, △불법사찰 및 세월호 특조위 조사 방해에 대해 추가적인 독립조사 또는 감사 실시, △국정원 자료의 국가기록원 이관, △의료지원금 지급 기간 개정, △여객선 등 선박 안전관리 체계 개선, △세월호 참사 희생자 추모 사업의 중단 없는 추진, △가칭 중대재난조사위원회 설립 등을 권고했다.
이 중 중대재난조사위원회 설립 권고는 '독립적인 상설 재난원인조사기구'다. 유가족들도 지난 3월 "세월호 같은 참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책임자 처벌을 위한 독립 상설 조사기구 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성수 기자와 전치형 교수는 재난 조사기구 상설화와 관련해 재난 조사 전문가의 필요성과 효용성에 동의했다. 다만 "정부 차원의 상설 기구에 대한 국민적 신뢰 문제가 관건"이라며 국가인권위원회 모델을 제시하면서도 신중히 숙고해야 하는 일이라고 했다.
진 교수는 앞서 세 개의 위원회 모두 "특검법 처리 등 여야의 정치적 대립 끝에 겨우 구성이 돼도 인력을 모으고 조사 방식을 결정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며 "조사 기획 단계부터 보고서와 같은 결과물을 낼 때까지의 과정을 상시적으로 고민하는 그룹이 있다는 점에서 효용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김 기자 역시 "재난이든 참사는 특정 시점에 일어날 수밖에 없게 되는 만큼 해당 정부가 방어적이 된다. 그래서 정부와 국회 간 공격과 방어가 오가며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다"면서 "속도 면에서 상설 조사 기구가 나은 측면이 있다"고 밝혔다. 또 "기본적으로 훈련된 조사관 그룹이 있다면 특조위‧선조위‧사참위 같은 앞선 조사기구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을 위해 취재와 연구를 거듭한 10년이지만, 지금 두 사람의 고민은 '미래 세대가 과연 세월호를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이지만, 현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기록'이 없는 셈이다.
진 교수는 "앞으로 5년, 10년만 지나도 지금 10대 학생들에게 세월호는 직접적인 이해 선상에 있는 일이 아니다. 포털 사이트에 '세월호'를 검색해야지만 알 수 있는 일이 될 것"이라며 "검색 상단에 과연 어떤 정보가 나올까. 현 상태로는 공적 기록이 없다. 정말 큰 일이다. 지금과 같은 일반적인 검색 방식으로는 아이들이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게 없다"고 우려했다.
김 기자는 "안산 화랑유원지에 조성되는 4.16생명안전공원과 영구 보존을 위해 목포 고하도로 이동하게 되는 선체 주변 시설 등 미래 세대를 위한 물리적인 작업은 진행되고 있지만 추모 시설에 어떤 내용으로 어떤 기록으로 채울 것인가"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생기는 문제일 텐데, 결국은 세 위원회와 같은 권위 있는 조사기구에서 10년간 결과물을 확정하지 못한 책임이 크다"고 했다.
두 사람은 지난 10년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진상 규명에 애썼지만, 사회적 기록이 없다는 점에 못내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김 기자는 "'아쉽다'와 '안타깝다' 두 가지가 섞여 있는 것 같다"고 했다. "10년이라는 긴 시간 노력했지만 우리 사회가 합의할 만한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는 생각"에, "또 개인적으로 '저널리스트로 저널리즘으로 진상규명에 충분히 기여했을까?'를 자문해 보면 여전히 아쉽고 안타깝다"고 했다.
전 교수는 "7년, 8년 시간이 흐를수록 참사 희생자에 대한 관심이 줄고 진상규명에 대해서도 체념하는 것 같아 불안했다"면서 "10주기에 맞춰 책 작업을 했는데, 과연 참사 발생 10년이라는 사회적·심리적 무게에 맞는 정리일까? 자신 있게 얘기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그러면서 "10년, 10주기의 의미가 '여기까지 끝!'이 아닌 '그 다음으로 나아가야 하는 시점'인데, 과연 우리가 그 정도에까지 이르렀는가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크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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