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에는 KTX가 스무살이 된다. KTX 개통 20주년은 한국 철도 발전의 상징적 의미를 갖지만, 한국 철도가 처한 현실을 돌이켜보면 만만치 않은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철도는 기술적, 정책적 발전을 이뤘다고 평가받지만, 그 이면엔 '민영화'의 그림자가 언제나 함께 따라 다녔던 것이 사실이다. 일례로 KTX 노선을 떼서 민영화하겠다는 구상을 떠올릴 수 있다. 박근혜 정부는 SRT를 새로 설립해 '같은 노선 위를 달리는 두 열차 운영 회사'라는 기형적 구조를 만들어 민영화의 우회적 물꼬를 텄다. 철도 시설과 운영을 분리한 데 이어 관제를 분리하려는 시도 역시 꾸준히 진행됐다. '돈이 안된다'는 이유로 기후 위기 시대 서민의 발이 되고 있는 전국의 철도 노선들도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KTX 20주년, 감격스런 축하도 의미 있지만, 그 이면에 가려진 현실도 짚어야 할 필요가 있다. <프레시안>과 전국철도노동조합이 KTX 20주년을 맞아 [철도 유감]을 기획해 글을 싣는 이유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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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유감]① 선거철이면 좀비처럼 되살아나는 철도 지하화는 '미친 짓'이다
지금으로부터의 1년 전 있었던 일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한다. 지난 2023년 4월, 수원역에서는 서울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가려던 한 장애인이 승차 거부를 당해 다른 열차를 타야만 했던 일이 있었다. 장애계는 성명을 통해 철도공사가 부적절한 대처를 했다는 논평을 냈고, 여론 역시 장애인 이동권이 철도에서 보장되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며 철도 당국을 비난했었다.
하지만 나는 당시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이지, 괜찮다는 건 물론 아니다). 당시 문제가 된 #1282 무궁화호(11:38 수원 출발)열차가 3량 편성에, 입석 승객이 량당 70명 가까이 들어찬 상태였던 걸 알고 나서다.
좌석(72석)만큼 많은 승객이 탄 무궁화호 차내는 만원 전철과 다를 바 없다. 당연히 휠체어 승객을 태우려면 다수의 승객이 간격을 좁혀 다닥다닥 붙거나, 아예 하차해야 한다. 승무원이 상황을 매끄럽게 풀지 못해 안타깝지만, 입석 승객들에게 직원 안내에 따라 주변 사람들과 다닥다닥 붙거나, 타고 있던 열차를 포기하고 다음 차를 타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나는 이 상황을 이렇게 이해하고 싶었다. 어느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고 탓하기에 앞서, 누군가 희생해야 하는 상황이 구조적 이유에서 현실이 됐다는 것.
문제의 열차가 3량이라는 데서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이런 현상은 무궁화호 객차가 부족해져 나타난 현상이다. 20년 전, 고속철도 개통 직전 무궁화호 객차는 약 1500량에 달했고, 새마을호를 합하면 객차만 2000량에 달했다. 처음 구매했던 KTX1이 총 920량이었음을 감안하면, 고속열차의 2배를 넘어선 수준인데다, 당시 철도공사가 보유한 전동차보다도 많은 숫자였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객차의 수는 1/4 가까이 쪼그라든 500량 수준이다. ITX-새마을 등의 전기동차를 구매하긴 했지만 이들을 합해도 일반열차의 세력은 800량 정도 뿐이다. 일반열차 공급량 전체가 줄어든 것이다. 한편 서울-수원 사이의 운임은 오히려 내렸다(2008년 6월 기본요금 인하로 인해). 도로는 더욱 막히고, 경부선 무궁화호의 속도는 바로 옆으로 달리는 1호선보다 3배 빠르다. 거의 GTX와 동급이다. 시간만 맞으면 1호선보다 무궁화로 움직이는 게 합리적인 구간이 이 곳이다. 열차는 줄어들었는데, 일반열차를 탈 사람은 여전히 많은 것이 지금의 수도권이고, 그 와중에 나온 파열음이 바로 수원역 휠체어 탑승거부 사건인 셈이다.
말라 죽고 있는 풀뿌리 철도
그렇지만 이 파열음은 사람들의 귀에 거의 들리지 않는 것 같다. 들리지도 않는 만큼, 이 낮은 파열음엔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의 고통은 오늘도 이어진다. 파열음은 아니지만 가청 범위 내에서 들리는 '소음'들은 있다. 사실상 ITX-청춘이나 무궁화 새 노선에 불과한 'GTX 광풍', 철도 지하화를 위해 철도 부지와 자산을 금융기관에 모두 내어주겠다는 '지하화 계획' 같은 당혹스러운 것들 말이다.
사람들의 귀에 거의 가 닿지 않은 다른 파열음도 있었다. 2023년 연말, 디젤동차가 수명을 다해 일제히 폐차된 일이다. 온실가스 뿐만 아니라 엄청난 양의 먼지를 뿜어내는 대표적 염원인 디젤 열차의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철도공사는 물론, 지방정부도 후속 열차 계획조차 제대로 세우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전동차를 투입하려면 막대한 기반시설 투자가 필요하다. 전철화 역시 킬로미터(Km)당 100억 원 단위는 들어갈 정도로 큰 공사다. 게다가 이 기반시설이 투자 가치가 있으려면 하루 편도 20~30회의 열차 운행이 필요하다. 시간당 1~2편 빈도다. 그런데 경부선을 벗어나면 이렇게 많은 빈도로 운행하는 구간 자체가 많지 않다. 결국 전국 모든 노선에 전동차가 들어가는 건 무리가 있다. 기술적으로 붕 떠 있는 이런 구간에, 현재의 기술로 가능한 대안(가령, 바이오디젤 열차)을 투입하자는 논의 자체도 없는 상태에서, 디젤 동차의 수명이 만료된 게 바로 2023년 연말이었다. 김대중 대통령 부부를 비롯한 수많은 영동지역 관광객들의 호평을 받았던 바다열차든, KTX 광주 송정역의 부족한 대중교통 접속을 보완하던 광주선 셔틀열차든, 동해선 셔틀 열차든 모두 사라졌다. 심지어 경원선 북쪽 말단 구간 열차는 제대로 된 공지도 없이, 일부 구간 전철 개통 이후 복원되지 않고 슬그머니 폐지되었다.
이런 사태는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다. 2023년만의 일이 아니란 것이다. '지도 1'은 고속철도 개통 이후 폐지된 주요 객차열차, 디젤동차 열차 및 현재 객차열차 이후 대안이 불투명한 구간을 표시한 것이다. 이렇게 지선망 열차 폐지는 2000년대 들어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그리고 오는 2028년, 현행 무궁화호 객차 열차 전면 폐지 이후 대책이 불투명한 지방 노선 또한 여럿 남아 있다.
새 철도, 그리고 철도 지하화
더 재미(?)있는 대조도 있다. 국가철도공단 홈페이지에 등재된 사업중인 철도 사업을 수합해 본 일이 있다. 거의 3000킬로미터에 달하는 철도를 약 100조 원을 들여 건설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특별법까지 만들어 추가로 철도를 짓는 축선도 있다. 국토의 구석을 달리는 열차는 없어지고 있는데, 또다른 국토 한편에서는 기존 철도망만큼 광범위한 노선을 더 짓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서로 앞뒤가 맞지 않는 장면이 있을 수 있을까? 다 썩어가는 풀뿌리 철도 같은 건 말라 죽도록 내버려 두고, 새로 건설한 몇몇 대도시 주변 광역철도나 고속철도만 덩그러니 남는 게 한국철도의 미래라는 뜻인가. 이 상황을 그렇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그건 오해다'라고 납득시킬 자신은 점점 없어져 간다.
요지경 속에 빠진 2024년의 한국에서는 더 신기한 일도 함께 일어나고 있다. 한국철도를 거의 그대로 복제할 수 있을만큼 방대한 사업비가 들어간다는 철도지하화 사업이 바로 그것이다. 잘 해봐야 주요 대도시 내부 약 100킬로미터 정도의 철도를 지하로 구겨넣겠다는 건데, 총사업비만 80조 원이라고 한다. '그림1'에서 볼 수 있듯 이 돈이면 국가철도공단이 지금 사업중인 모든 종류의 철도를 거의 다 지을 수 있다. 한국철도를 2배 늘릴 돈을 모아와서는, 그 피같은 돈을 전체 망의 수 퍼센트(%)에 불과한 노선에 투입하고 끝내겠다는 게 지하화 사업이다.
용량 확충도, 속도 개선도 없이, 철도를 2배 늘릴 수 있는 막대한 돈을, 철도를 땅 속에 집어넣는데 써서 없애겠다는 말이 정치적 동력까지 받고 있다. 서울에 철도가 많은 것도 아니다. 런던에는 서울역만한 역이 11개, 파리에는 7개 있는데 서울에는 서울역 하나 아니던가? 인구도 유럽 메가시티들보다 배나 많은 도시임에도 '철도의 목을 조르겠다'는 이야기가 양 당의 공약을 지배하고 있다. 집값을 이유로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교통 공급자들이 모두 데모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싶은 일이지만 세상은 아주 조용하다. 속에서 일어나는 천불을 말없이 삭힐 뿐이다.
이상한 나라의 철도를 바라보며
고속철도 20주년을 맞이한 오늘날, 한국철도를 휘어감고 있는 이 이상한 상황을 대체 어떻게 압축해 설명할 수 있을까? 한국 철도를 앞으로 어떻게 만들고 활용해 나가야 할 것이냐는 통합적 질문에, 각자가 원칙도 없이 앞다퉈 답변만 내놓고 있다. 철도공사는 고속철도를 조금씩 확장하고 수도권 광역을 유지하는 정도에 만족하면서, 풀뿌리 철도의 고사(枯死)를 방조하고 있다. 철도공단은 철도를 새로 건설해야만 존재 의미가 살아난다. 국토부는 정작 철도의 교통 기능을 훼손하는 철도 지하화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지금 승객이 지나차게 몰린 곳(수도권)이나, 방치되어 사라지고 있는 풀뿌리 철도(비수도권)는 '구시대적 철도'고 규정하고 싹 갈아엎어야 할 대상 정도로 여기는 것 같다. 한국 철도에 가장 책임있는 이들이 이런 식이니, 지방정부나 민간사업자 같은 다른 행위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사실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그간의 관성이라는 것이 있으니, 상황이 빠르게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손 놓고 있어도 되는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기후 위기의 파고는 앞으로 더 높아질 것이고, 수도권 집중과 ‘지방 소멸’은 계속해서 더 심각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동은 계속돼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 모두에게 나는 철도가 답이라고 말하고 싶다. 허나 이 '이상한 나라의 철도' 정책이 계속되면, 이런 답은 한 이상주의자의 설득력 없는 주장 이상이 되지 못할 것 같아 두렵다.
모두가 잊지 말아야 할 원칙이 있다. 지금 있는 철도부터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0순위다. 추가로 짓는 노선과 현 노선을 서로 합이 맞도록 만드는 것이 1순위다. 망과 망의 연결을 조금씩 더 강화하는 한편, 대중교통이 운영에 불리한 곳에는 과감하게 새 노선과 새 열차에 투자해야 한다. 이런 망이 기존 노선에서 병목을 이루지 않도록 주요 역과 그 주변의 용량을 넉넉하게 준비한다. 철도의 상대는 생애의 5%, 평균 하루 1시간 동안 돌아다닌다는 '승용차'다. 지금보다는 좀 더 많은 예비력을 갖춰야 철도에게도 승산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제안을 현실로 만드는 데에도 많은 예산이 들 것이지만, 잘못된 정책에 따른 낭비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있는 철도부터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철도를 망치는 방법은 쉽다. 고속철도나 GTX 같은 새 사업을 ‘교통 혁명’ 같은 민망한 수사로 치장하는 것(이들이 사실은 하나의 네트워크로 기능한다), 자산유동화증권(Asset Backed Securities, ABS)을 철도 자산에 걸어 철도 전체를 금융화하고자 하는 '철도 지하화' 같은 일, 이런 건 철도의 교통 기능을 훼손하고 '우리 모두'의 철도를 망치는 길이다.
특정 지역에 집중되는 철도망에 따른 이익을 세금으로 거두어, 망의 사각 지대에 되돌려 주는 재정 정책, 통합 대중교통망 운영 방향을 고민하는 게 우리 모두를 위한 길이다.
고속철도 개업 20년을 맞이한 이상한 나라의 철도. 풀뿌리 철도는 점점 더 죽어가고 있다. 정책 결정권자들은 교통망 전체를 보지 못한 채 고속열차와 수도권 일부 망만 비대하게 만들고 있다.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동을 책임질 철도가 국토와 대도시권의 뼈대가 되려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 줄기만 붕 뜬 채 뿌리가 썩어가는 철도가 어느날 갑자기 쓰러지지 않도록,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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