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4월, 그리고 16일이다. 누군가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10년이었다. 길다면 긴 세월이지만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 그리고 세월호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이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반면, "세월호, 그만하라"며 할만큼 했다는 목소리도 여전히 흘러나온다. 왜 아이들의 죽음을 매번 끄집어내느냐며, 잊고 살자고 한다. 그것이 유가족들에게 가능한 일일지는 의문이다.
세월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망각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과거의 일들을 잊는 것과 동시에 그 '일들'이 발생한 이유나 원인마저도 지워버린다.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프레시안>에서 '기억'과 '기록'이라는 주제로 인터뷰를 준비한 이유다. 지난 10년 동안 세월호를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기록'하기 위해 노력해온 이들을 만났다.
선생님은 스승의날 찾아오겠다던 제자들을 한날한시에 잃었다. 제자들이 보고 싶을 때마다 영정이 걸린 곳을 찾았고, 제자들 앞에서 약속을 하나 했다.
"너희들을 지켜주지는 못했지만 동생들은 꼭 지켜줄게."
신대광 선생님은 제자들과 한 약속을 지키기까지, 꼬박 10년이 걸렸다. 선생님은 원일중학교 제자인 영란이(단원고등학교 2학년 3반)의 동생 희○이와 혜○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곁을 지켰다. 희○이는 참사 당시 원일중 2학년이었고, 혜○이는 참사 3년 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원일중에 입학했다.
"영란이 장례식장에 갔을 때 혜○이가 눈에 밟혔다. 초등학생이었던 혜○이는 마냥 어린아이였다. '언니가 그렇게 된 걸 알까?' 걱정됐다. 혹시나 했는데 혜○이가 원일중에 들어왔다. 중학교에 다니는 동안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지만,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담임에게 부탁을 했다. 혜○이가 고등학교를 가고 수능을 볼 때도 먼발치에서 응원했다.
혜○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지난 2월,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했다. 혜○이는 언니 희○이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고 했다. '동생들 중 자신만 남았고, 선생님이 자기 때문에 학교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제자들과 한 약속의 마지막이 혜○이었다. 혜○이를 끝으로 원일중을 떠났다. 비로소 할 일을 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 선생님과는 지난 8일 경기도 안산의 4.16기억전시관에서 만났다. 중학교 역사 선생님으로 교편을 잡은 지 30여 년, 신 선생님은 그 중 절반을 원일중에서 보냈다. 제자들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이들은, '배' '수학여행' 같은 단어만 나와도 아파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304명 중 250명이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었으며, 이들 중 다수가 원일중, 단원중, 와동중 졸업생이었다. 단원고와 맞붙은 단원중에는 희생자 동생 32명이 재학 중이었다. 원일중에도 희생자 동생 상당수가 다니고 있었다.
희생자 동생 대부분이 부모가 진도 팽목항에서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르고 서울 광화문에서 진상규명을 외치는 동안 홀로 슬픔을 감내했다. 학교에 와도 참사 이전처럼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수업 중 갑자기 소리를 지르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도 있었다. 정부도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단원고 인근 중·고등학교에 교육복지사를 파견, 심리안정프로그램 등을 진행했다.
신 선생님은 2014년 그 봄이 생각났는지, 시선을 먼 곳에 둔 채 말했다.
"한 학급에 희생자 동생이 여럿 있기도 했다. 동생들뿐 아니라 그 반 아이들 모두가 침울했다. 웃고 떠들다가도 이내 조용해 졌다. 형제자매와 동명인 친구의 이름이 불리거나 '배' '수학여행' 같은 단어만 나와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아이들이 있었다."
가족뿐만이 아니었다. 학교도, 선생님도, 마을도, 이웃도 그해 봄은 유난히 아픈 봄이었다.
"그 무렵 아이들 몇몇이 점심 급식을 먹지 않고 복도나 운동장을 배회하는 걸 봤다. 느낌이 이상했다. 담임에게 물어보니 '밥맛이 없다'며 급식을 안 먹은 지 꽤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을 불러 수석교사용 작은 방에서 먹게 했다. '이 녀석들이 과연 먹을까' 싶었는데, 먹더라. 그런데 또 내가 있으면 먹지 않았다. 급식을 받아서 전해만 주고 아이들끼리 먹게 했다.
하루는 조잘조잘 말소리가 나길래, '다 먹었니?' 하고 문을 열었더니 방에 불이 꺼져 있었다. 그래서 '왜 불을 껐어? 불을 끄면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잖아'라고 했더니, '불을 켜면 밥을 안 먹겠다'는 것 아닌가. 같은 처지에 있는 아이들끼리도 서로의 시선을 의식하는 게 어려웠던 모양이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 아이들에게 물어봤다. '왜 교실에서는 밥을 안 먹었어?' 하고…. 그랬더니 '친구들이 '너는 언니가, 오빠가 죽었는데 밥이 들어가니?' 하고 쳐다보는 것 같아서 밥을 못 먹었다'고 하더라. 학교 전체가 마을 전체가 다 아는 일인데, 누가 그렇게 말했겠는가. 아이들만의 생각이었다. 그 어린 녀석들도 자책 아닌 자책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 아픈 봄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신 선생님은 그렇게 1년 이상 점심시간이면 아이들에게 방을 내어줬다. 아이들은 그 방에서 밥을 먹고 조잘조잘 거리며 또래 중학생다운 모습을 찾아갔고, 하나 둘 졸업을 했다.
"고교 진학을 놓고 아이들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하나는 '절대로 단원고에는 안 가요'였고, 다른 하나는 '저는 꼭 단원고에 갈 거예요'였다. 단원고에 가겠다는 아이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오빠가 다니던 학교, 앉아있던 교실에서 공부할래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뭐라고 말을 못하겠더라. '그래' 하고 보내줬지만, '고2 때 어쩌려고 그러나…' 걱정이 됐다. 그런데 잘 견디더라. 고맙게도…."
몇 번의 봄이 왔다가고 시간도 흘러 아이들이 컸다. 중학생이 고등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대학생이 되고 성인이 되고 군대도 가고….
"고은이(단원고 2학년 1반) 동생 이야기인데, 안산에서 학교를 다닐 때는 별 일이 없었다. 그런데 다른 도시로 대학을 간지 하루인가 이틀 만에 '도저히 무서워서 못 있겠다'며 '데리러 와 달라고',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고 하더라. 트라우마가 뒤늦게 나타난 것이다.
휘범이(단원고 2학년 4반) 동생 ○범이도 형처럼 바르게 컸다. 그런 ○범이가 고3 졸업을 앞두고 찾아와서는 재수하려고 기숙학원에 들어간다고 했다. 그 얘길 듣자마자 물어봤다. 기숙학원에서 방을 혼자 쓰는지, 같이 쓰는지. '여러 명이 같이 쓰는 방'이라고 해서 그런대로 마음이 놓였다. 남자 아이들 같은 경우 군 생활도 걱정됐지만, 다행히 큰일 없이 지나갔다."
신 선생님은 아이들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한숨을 길게 쉬기도 하고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러던 중 "그 녀석들, 꼭 전화를 해도 술을 먹고 전화해"라며 푸념 아닌 푸념을 늘어놨다.
"아이들이 술을 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는 꼭 술을 먹고 전화를 하더라. 맨 정신으로는 전화를 잘 안 한다. 아이들도 아니까…. 전화해서도 '선생님~' 하고 부르기만 하다 끊고…. 애들 술주정까지 받아줘야 하나 싶다가도 또 누구에게 속내를 털어놓겠나 싶어서 전화를 끊을 때면 '한밤중이든 언제든 전화해'라고 말해준다."
신 선생님은 아이들이 성인이 된 지금도 희생된 친구와 형제자매를 각자의 방식대로 그리워하며 잊지 않으려고 애쓴다고 했다. 특히 생일날이 되면, '분명 오늘 노래방에 갔을 텐데, 무슨 노래 불렀을 텐데…'라며 생전에 친구가 자주 불렀던 노래를 부르고 친구와 같이 갔던 곳을 걷고 친구의 사진을 들고 스티커 사진을 찍으며, 그 아픈 봄을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국가는, 사회는 바뀌지 않았지만…
열 살 막내가 스무 살 성인이 된, 10년 세월 동안 교육 현장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신 선생님은 "바뀐 게 없다. 안타깝지만 없다"고 말했다. "참사 이후 '안전'이 쓰인 공문이 수십 장 수백 장이 내려왔지만 모두 엉뚱한 방향이었다"는 것. "특히나 세월호 추모 기간을 '독도교육주간'으로 선포해 교육시키라는 공문을 내려 보낸 박근혜 정부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고 했다.
교육부는 2016년 4월 참사 2주기를 불과 열흘 앞두고, 전국 초·중·고등학교에 11일부터 15일까지 '제1회 독도교육주간'을 지정하고 '독도 계기교육'을 실시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이에 교육 현장에서는 10월 25일 독도의 날에 맞춰 매년 가을에 하던 교육이 봄으로 앞당겨진 데 대한 볼멘소리가 나왔다.
세월호 참사 전과 후, 교육계에 변화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교육부는 수상사고 시 생존 능력을 기르기 위한 초등학생 수영실기 교육을 운영하고, 초등학교 1·2학년을 대상으로 한 <안전한 생활> 교과서를 보급해 주당 1시간씩 총 64시간 이상의 수업을 편성하게 했다.
그러나 신 선생님은 "아이들이 정말 수영을 못해서 탈출하지 못한 걸까?"라며 "참사의 본질은 사라지고 비(非)본질이 참사를 덮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이들은 그 절박한 상황에서도 '가만히 있으라'는 규율과 규제 속에 목숨을 잃었다. 왜 아이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했을까. 사회가 아이들을 규율과 규제라는 네모난 규격에 가둬두려고만 한 것은 아닐까? 선생님으로, 기성세대로 미안한 마음뿐이다."
참사 이후 개인적으로는 교육관이 많이 바뀌었다. '공부하라'고만 했지, '가만히 있으라'고만 했지, 아이들에게 그보다 더 중요한 인류 보편적 가치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은 것 같다. 후회가 밀려왔다. 평화, 인권, 생명 이런 가치들을 왜 진작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그래서 <미래교육과 4.16> 교재를 쓰면서는 평화, 인권, 생명에 대한 공부부터 다시 했다."
<미래교육과 4.16>은 세월호 참사가 우리 사회에 남긴 교훈을 성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 사회에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교육하기 위해 세월호 활동가 교사들, 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4.16기억저장소가 함께 개발했다. 신 선생님은 중등용 <미래교육과 4.16> 대표 필자이다.
신 선생님은 "참사 이후 4.16이 삶의 일부분이 됐다"고 했다. 지역 공동체 라디오에서 안산의 역사를 전하며 상처 입은 지역사회를 보듬고, 청소년 소통 공간인 '청소년열정공간 99도씨'에서 활동하며 미래세대가 세월호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 마음이 맞는 이웃들과 2년여의 준비 끝에 '시민의 기록전-마을의 4.16'이라는 전시회도 열었다. 참사 이후 자발적으로 촛불집회를 시작한 일동, 밥 한끼 편히 먹지 못하는 유가족을 위해 마을밥상을 시작한 반월동, 마을신문과 이웃 간 대화를 통해 갈등 조정에 나선 와동, 10대 청소년들과 티셔츠 등 기억물품을 만든 사동, 꽃을 통해 '잊지 않겠다'는 마음을 전달해온 고잔동 등 지난 10년을 함께한 이웃들의 마음을 한 곳에 모았다. 전시회는 오는 5월 31일까지 4.16기억전시관에서 진행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