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4월, 그리고 16일이다. 누군가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10년이었다. 길다면 긴 세월이지만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기억으로 자리잡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 그리고 세월호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이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반면, "세월호, 그만하라"며 할만큼 했다는 목소리도 여전히 흘러나온다. 왜 아이들의 죽음을 매번 끄집어내느냐며, 잊고 살자고 한다. 그것이 유가족들에게 가능한 일일지는 의문이다.
세월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망각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과거의 일들을 잊는 것과 동시에 그 '일들'이 발생한 이유나 원인마저도 지워버린다.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프레시안>에서 '기억'과 '기록'이라는 주제로 인터뷰를 준비한 이유다. 지난 10년 동안 세월호를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기록'하기 위해 노력해온 이들을 만났다. '기억' 첫번째 인터뷰로 아들을 위해 3650일 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엄마의 이야기를 다룬다. 편집자
"호성아, 미안해. 옆에서 보고 있는데…. '울 엄마는 또 저래' 그러네."
"귓가에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으세요?"
"바로 고개 돌리자마자 눈이 마주쳐서…. 우리 호성이, 미안."
수학여행 보낸 아들을 잃은 지 10년. 호성이 엄마 정부자 씨(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추모부서장)는 지금도 아들과 대화한다. 그렇게 아들을 기억하며 보낸 3650일. 올해도 벚꽃은 폈고, 4월은 돌아왔다.
지난 9일 정 씨를 경기도 안산의 4.16가족협의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유가족들은 4.16생명안전공원 부지 인근 공터에 컨테이너 대여섯 개를 놓고 사무실로 쓰고 있었다. 누군가는 노란 리본을 만드느라, 또 누군가는 전화를 하고 회의를 하느라,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10주기 기억식 준비에 바쁜 모습이었다.
"다음 주면 10주기라는데, 그동안 어떻게 지냈지? 그냥, 애 떠나보내고 앞만 보며 달려온 것 같아요. '정말 10년 동안 쉴 새 없이 앞만 보고 달렸구나' 싶다가도 '진짜 10년이나 됐나?'라는 생각이 드는 게, 또 얼마 안 지난 것도 같고… 여전히 그날 그곳에서 헤매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막둥이와 함께한 3650일, 기억으로 채우다
호성이는 수학여행을 떠난 지 보름만인, 그해 5월 2일 엄마 품으로 돌아왔다. 정 씨는 호성이 장례를 치르며 들린 단원고 2학년 6반 교실에서 통곡했다고 했다.
"호성이가 수학여행 가기 전날 봤던 교과서 두 권이 책상에 놓여있었는데, 미치겠더라구요. 애가 아침부터 밤까지 이렇게 작고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공부를 했나. 이런 줄도 모르고 학교에 가면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나서지 말고, 튀는 행동 하지 말라'고 한 건가. 애가 얼마나 집에 오고 싶었을까. '야자 안 하고 집에 가면 안 돼?'라고 할 때 '집에 와서 뭐 하려고. 공부해야지', 왜 그랬을까. 내가 미친 엄마가 아닐까. 아이가 신던 슬리퍼에 얼굴을 묻고 통곡했어요. 미치겠더라구요."
정 씨는 호성이가 고등학생이 된 뒤로 자칫 엇나갈까 걱정이 돼 야자(야간 자율학습)가 끝나는 밤 10시 반이면 마중을 갔지만, 교실에는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저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하라'고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고 했다.
"아이를 바보로 만들고 있었던 것 같아요. '아이의 개성대로 키우지 못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호성이 뿐 아니라 250명의 아이들이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가만히 있었고, 산 채로 세상을 떠난 거잖아요. 친구들이 떠나가는 모습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면서… 끔찍하죠.
그렇게 착한 아이들이었는데, 10년이 됐지만 아무것도 바뀐 게 없어요. 조금이라도 바뀌었다면 부모들도 이렇게 아프진 않을 텐데… 교육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바뀐 게 없어요."
정 씨는 "아이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아이들이 한결같이 어찌나 착한지"라며 유가족들끼리는 "엄마아빠 곁을 빨리 떠나려고 그랬나" 하는 상념에 젖는다고 했다.
막둥이 '호찌'(호성이 별명)는 정 씨에게 친구 같고 애인 같은 아들이었다고 한다. 즐거웠던 일은 낄낄대고 웃어가며, 속상했던 일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물으며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그때마다 호성이는 '역시 엄마하고 얘기하고 나면 편해'라고 했단다.
정 씨도 그랬다. 호성이에게는 비밀도 없이 다 털어놨다고 했다. 때론 애 아빠 흉도 보면서…. 정 씨는 "친구 같은 아들이 떠나고 나이를 먹을수록 신세타령만 할까 봐", 요즘은 혼자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다고 했다.
정 씨는 몇 해 전부터 2월 7일 호성이 생일이 되면, 호성이 이름으로 안산희망재단에 기부를 하고 있다.
"잊고 있었는데, 호성이가 친구 동생이 아프다고 했던 게 생각났어요. 그래서 전화를 해봤더니 여전히 병원에 있다고 해서… 그때부터 조금씩 돕고 있어요. 호성이가 친구를 돕는 거죠. 호성이가 남기고 간 돈, 그 무서운 돈을 조금씩 나눠서 기부하고 있는 거니까요."
정 씨는 세월호 피해자에 대한 위로지원금(보상금)을 "아이가 죽어서 받은 돈"이라며 "무서운 돈"이라고 표현했다. 정 씨뿐 아니라 유가족 대부분이 보상금은 진짜 필요한 사람을 위해서 좋은 일에 써야 한다며 기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기억 투쟁 10년, 기억하고 추모하기까지
"제가 이런 나라에서 왜 내 새끼를 낳고 키웠는지 모르겠습니다. 대한민국에 대통령이 있습니까? 진실을 밝혀달라는데, 그 돈 한 푼 주면서 먹으라 하고…. 아이들을 수장시켜놓고 부모들까지 수장시키려 합니다. 난 내 새끼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죽어야겠습니다."
정 씨는 2015년 4월 박근혜 정부가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안을 무시한 채 시행령을 입법 예고하자, 이에 반발해 삭발을 했다. 당시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는 52명의 유가족이, 진도 팽목항에서는 4명의 유가족이 삭발에 동참했다.
정 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뭐라도 해야 했다. 삭발을 해서 되기만 한다면, 삭발 열 번은 못 할까"라는 간절함뿐이었다고 했다.
정 씨는 "원래 나서는 성격도 아니고 사람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지만 지난 10년 동안 성격이 바뀌었다고 했다. 바뀐 건 성격만이 아니었다. 나라에 대한 생각도, 대통령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
"마음속에 '우리나라가 설마…' 하는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옆에서 얘기를 해줘도 믿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내가 사는 내 나라고 내 자식이 죽은 이유 알려달라는 데 설마…'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랬는데 점점 내가 느끼는 거예요. '이게 뭘까? 이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러면서 바뀌었어요."
정 씨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새해 예산안 시정연설 차 국회를 찾았던 2014년 10월과 문재인 전 대통령이 유가족을 청와대로 초청했던 2017년 8월을 언급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참사 다음 날 팽목항 진도체육관에 와서 "철저한 조사와 원인 규명" "책임자 엄벌"을 약속했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하나둘 뭍으로 올라오니까 참사를 어떻게든 덮고 지우려고만 했어요. 약속을 지킬 생각은 없어 보였어요.
그래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면서 청와대 앞과 국회에서 노숙농성 중이었는데, 대통령이 국회에 온다는 거예요. '대통령도 할 말이 있겠지. 일단 만나서 얘기라도 들어보자'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어요. 그런데 옆도 안 보고 그냥 가버리는 거예요. 이게 뭐지? 이게 뭘까? 서러웠어요. 그냥 눈물만 흘렸어요."
"문재인 전 대통령이 유가족들을 청와대로 불렀잖아요. 문 전 대통령은 대선후보일 때 팽목항에도 안산에도 오고 해서 계속 만났어요. 만날 때마다 '아이들 추모공원 만들 수 있게 힘써 달라'고 하면, 미소로 답했어요.
대통령이 되고 난 다음에 유가족을 청와대로 불렀는데, 들뜬 마음에 엄마들끼리 선물도 만들어서 갖고 갔죠. 가서 '아이들 돌아오게 해주세요. 엄마아빠가 있는 안산으로 돌아오게 해 주세요'라고 얘기했죠. 마지막에 갈 때 다시 얘기했는데, 그깨 갑자기 '안산 시민들 설득도 못 시키고'라면서 목소리까지 바뀌는 거예요.
순간 말문이 막혀서 말 한마디 못하다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니 막 억울한 거예요. 그 자리에 있던 유가족 모두 할 말을 잃었어요. 그런 날들도 있었답니다. 참, 이게 뭔지 모르겠어요."
세월호 희생자 대표 추모시설인 '4.16생명안전공원' 건립은 2015년 9월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그러나 공원에 유골을 안치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인근 주민들 사이에서 '납골당 아니냐'라는 반대 목소리가 나왔다. 이에 유가족들은 설득 작업에 나섰다. 마을 봉사를 다니고 문화 활동도 하면서, 4.16생명안전공원에 대한 주민들의 생각을 바꿔나갔다.
2018년 지방선거 때까지 답보 상태였던 공원은, 2019년 안산시의회 의결을 거쳐 그해 10월 착공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업비가 발목을 잡았다. 공원 건립이 미뤄지는 사이 인건비와 자재비 상승으로 사업비가 500억 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되면서 기획재정부의 예비타당성 검토를 받게 됐다. 결국 지난 2월 정부와 안산시가 최종 변경안에 합의, 오는 10월 첫 삽을 뜬다.
우여곡절 끝에 참사 10주기에 늦은 첫 삽을 뜨게 됐지만, 4.16생명안전공원 건립 계획을 얘기하는 정 씨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인근 주민들뿐 아니라 누구든지 와서 꽃도 보고 공연도 보다가 아이들도 살짝 만나고 가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힘들게 떠난 아이들이 덜 외롭지 않을까요? 이런 게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 아닐까요?
추모 시설이라고 높게만 만드는 건 아니에요. 원형으로 해서 해가 비치는 각도에 따라 아이들 모두 햇빛도 받고 세상도 볼 수 있게 했어요. 가운데는 지붕이 없어서 비가 오는 것도 눈이 오는 것도 다 느낄 수 있게…. 또 누구든지 노래하고 춤출 수 있는 공연장이 될 수 있게…. 그러면, 아이들도 덜 외롭지 않을까요?"
시민과 이웃에게 위로받은 10년, 미래세대를 생각하다
정 씨는 "국가는 가족을 잃은 유가족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평범한,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를 돌변하게 만들었다. 미치게 만들었다"며 "자식을 잃기 전,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만약 국가가 유가족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줬다면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했다.
"10년을 돌아보면서 느끼는 것은 '내가 국가로부터 위로받은 게 아니라 시민들, 이웃들에게 위로받아서 지금까지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에는 '보고 싶은 아들도 못 보고, 이렇게 끝나는구나' 생각했어요. 절망했지만,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게 목숨이더라고요. 그래서 '아들은 돌아올 수 없는 길로 갔지만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구나. 아파만 하고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이 다음에 아들 얼굴 제대로 보려면 똑바로 살다 가야겠구나' 하고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아픔을 알아버린 엄마로, 현재를 살고 있는 기성세대로 '미래 세대에게는 다시는 이런 아픔을 주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으로 안전사회를 만드는 일, 추모공원을 만드는 일, 마을과 공동체를 위한 일들을 하고 있어요.
이태원 참사, 오송 지하차도 침수, 하루가 멀다 하고 일터에서 죽는 노동자들을 보면 '사회가 참 바뀌지 않는다' 싶어서 용기가 없어질 때도 있지만, 그래도 목소리를 내야 해요. 목소리를 내다보면 10명이 100명 되고 1000명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바뀌지 않을까요?"
정 씨는 호성이를 보며 다시금 다짐했다.
"엄마가 우리 막둥이 생각하면서 바르게 살다가 갈게. 그때는 엄마한테 얼굴도 보여주면서 꼭 안아줬으면 좋겠어. 엄마 씩씩하게 활동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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