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전 금속과 기계를 다루는 군수공장 일자리는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상황을 바꾼 것은 세계대전이었다. 남성이 징집돼 생산에 차질이 빚어지자 각국 군수공장의 빈 자리는 여성으로 채워졌다. 전쟁의 비극성과 별개로 이는 '남성의 일과 여성의 일이 따로 있다'는 생각은 편견에 불과하며 사회·경제적 조건에 따라 달리 적용된다는 점을 보여주는 고전적 사례로 남아있다.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의 2019년 보도를 보면, 미국에서 트럭 운전사, 배달원, 창고 노동자 등 운송 직종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 수는 2000년에서 2018년 사이 43% 늘었다. 여성 건설업 노동자 수도 23% 증가했다. 해당 산업 노동시장의 일손 부족이 주된 이유였다.
박정연 <프레시안> 기자가 쓴 <나, 블루칼라 여자> 역시 '남성의 일과 여성의 일이 따로 있다'는 편견을 부수는 책이다. 남초 직군 블루칼라 현장의 성차별적 환경에 맞서가며 일하는 여성 노동자 10인의 인터뷰를 통해서다.
화물 노동자 김지나, 플랜트 용접 노동자 김신혜, 먹매김 노동자 김혜숙, 형틀 목수 신연옥, 건설현장 자재정리·세대청소 노동자 권원영, 레미콘 운전 노동자 정정숙, 철도차량정비원 하현아, 자동차시트 제조공장 노동자 황점순, 주택 수리기사 안형선, 빌더 목수 이아진이 그들이다.
남초직군 블루칼라 현장의 차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이들이 일하는 직군의 여성 노동자 수다. 김지나 씨가 소속된 화물연대 부산서부지부에서 "화물 노동자 400명 중 여성 노동자는 3명"에 불과하다. 13년 차 플랜트 용접 노동자 김신혜 씨는 같은 일을 하는 여성을 "지금까지 여섯 명" 봤다. 안형선 씨는 주택 수리 일을 하는 여성이 "0명이라서" 직접 기술을 배우고 여성 1인 가구를 위해 여성 주택 수리 기사를 고용하는 회사를 창업했다.
직업 선택 시점부터 편견이 따라붙는다. 정정숙 씨는 레미콘 운전 노동자 일을 시작하려 했을 때 친오빠에게 '하이고 가문에 없는 중생이다'라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신연옥 씨의 신랑도 지금은 태도가 바뀌었지만, 형틀 목수 일을 하겠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밥하고 청소하다가 목수를 할 수 있겠냐'고 했다. 다만 아이들에게서만은 '엄마는 할 수 있다'는 응원을 받았다는 블루칼라 여성이 꽤 있었다.
채용도 차별적으로 이뤄진다. 김신혜 씨는 수업 외 시간을 써가며 같이 용접을 배운 다른 남자 동기들보다 기술을 빨리 배웠고 동기들에게도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이력서를 낼 때면 "여자가 무슨 용접을 하느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지금은 "자기만의 방처럼 자기만의 트럭"을 갖고 있는 김지나 씨도 "여성은 운전 실력이 미숙할 거라는 편견" 때문에 고용기사 일을 구하러 다닐 때는 "취업 자체"가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가히 바늘구멍을 뚫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차별은 끝나지 않았다. 일을 시작한 뒤 겪은 임금, 승진 등에서의 차별, 성희롱, 성차별적인 말을 들은 일, 뜬금없는 플러팅(Flirting), 온전한 동료로 여겨지지 못한 기억, 등은 열 편의 인터뷰에서 양태를 바꿔가며 끈질기게 나타난다.
책에 블루칼라 여성의 고통만 담긴 것은 아니다. 성차별적 환경에 맞서가며 일터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용기와 지혜도 담겨있다. 인터뷰이들은 대개 차별이나 성희롱이 발생하면 할 말을 제대로 해야 마음의 응어리가 남지 않고, 자꾸 대화를 해야 남성중심적 문화도 바꿔갈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이 남초 직군 블루칼라 현장에서 일을 하고 싶어 하는 후배 여성의 '롤모델'이라는 사명감을 마음에 품고 일하며, 현장에서 만난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려 노력하는 인터뷰이도 많다.
노동조합의 도움을 받았다는 블루칼라 여성도 많았다. 신연옥 씨는 건설노조에 가입한 뒤 안전하게 일할 수 있었다며 성희롱적 발언을 들었을 때 "저 노조 팀인데 함부로 말씀하시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해 그만두게 할 수 있었다는 경험담을 꺼냈다. 철도차량정비원 하현아 씨는 "노조 차원의 교육이 많아지면서 조직 문화 전체의 감수성이 달라졌다"며 "노조는 남성중심적인 문화에서도 여성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함께 싸워줬다"고 했다.
그렇게 살아남은 여성들은 한결같이 일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건설 현장에서는 드문 여성 관리직인 권원영 씨는 "외벽을 타는 일이든 폼을 쌓는 일이든 여성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어떤 일이든 했다며 그런 모습을 "동료들이 인정해줄 때" 뿌듯하다고 말했다. 김혜숙 씨는 "먹줄 튕기는 것과 레벨 붙이는 건 자신 있다"며 "먹통 덕분에 할 줄 아는 일이 있으니까 당당"하다고 했다. 현장에서 1인분 이상의 몫을 해내는 이들에게 일에서 비롯된 것 이외의 어려움을 안길 이유가 있을까.
끝으로, 책의 표지와 마지막을 장식한 빌더 목수 이아진 씨의 이야기다. 그는 여성 목수가 많고 여자는 목수를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또 목수 스스로 직업에 프라이드를 갖는 호주에서 자랐다고 밝힌다. 한국에서 자랐다면 사무직 노동자를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블루칼라 여성에 대한 편견은 물론 건설 현장 일을 '노가다'라 낮춰 부르는 우리 사회의 인식도 바꾸고 싶어한다.
호주의 블루칼라 여성에 대한 인식은 다시 한번 '남성의 일과 여성의 일이 따로 있다'는 생각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편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블루칼라 노동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도 마찬가지다. 그런 편견이 깨진다면, 블루칼라 여성들의 삶도 한결 홀가분해질 테다. <나, 블루칼라 여성>은 그 일에 도움이 되는 망치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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