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이 '동의 없는 성관계'를 범죄로 규정하는 비동의 간음죄 추진을 22대 총선 공약에 포함시켰다가 "실무적 착오"라며 사실상 철회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이준석 신당'으로 불리는 개혁신당에서 반대·비판 의견이 나온 지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아 나온 결정이다. '안티페미(反여성주의)' 성향을 보이는 일부 유권자를 의식해 여성정책을 후퇴시켰다는 비판이 당 안팎에서 제기됐다.
민주당은 27일 당 정책위원회 정책실장 명의로 기자들에게 보낸 공지에서 "비동의 간음죄는 공약 준비 과정에서 검토됐으나 장기 과제로 추진하되 당론으로 확정되지 않았다"며 "실무적 착오로 선관위 제출본에 검토 단계의 초안이 잘못 포함됐다"고 밝혔다.
김민석 선대위 상황실장도 이날 기자들과 만나 "특별한 문제제기가 없어서 저희도 발견 못했는데, 비동의 간음죄 부분은 토론 과정에서 논의 테이블에 올라왔던 것으로 확인됐다"며 "그런데 실무적으로 취합·제출 단계에서 (실수로) 포함됐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실장은 "당내 이견이 상당하고, 진보개혁진영 또는 다양한 법학자 내에서도 여러 의견이 있어 검토는 하되 이번에 공약으로 포함되기에 무리가 아니냐는 상태로 정리됐다"며 "오늘 문제제기로 확인 과정을 거쳐 실무적 실수, 착오로 확인됐다. 죄송하다"고 했다.
비동의 간음죄는 기존 강간죄를 구성하는 요건을 현행 '폭행 또는 협박'에서 '동의여부'로 바꾸는 형법 297조 개정안을 말한다. 1953년 형법 제정 당시로부터 한 번도 바뀌지 않은 형법 제297조 강간죄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규정돼 있다. 그러나 현행 조항에 따르면 폭행·협박이 수반되지 않으면 이는 '강간'이 아니어서, 위계질서 및 강요에 의한 권력형 성범죄, 아동·청소년과의 유대·신뢰관계를 바탕으로 한 그루밍 성범죄 등은 강간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지적이 지속 제기된 바 있다.
특히 이른바 'n번방 사건'이 공론화되고, 권력형 성범죄에 대한 '미투(#Me_too)' 고발 운동이 나온 이후 강간죄를 구성하는 요건을 '폭행 또는 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로 바뀌어야 한다는 개정 요구가 이어졌다. 국제연합(UN) 소속의 고문방지위원회, 여성차별철폐위원회 등 인권기구들은 '피해자의 자유로운 동의 여부 중심으로 강간을 정의'하도록 한국 정부에 수차례 권고한 바 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민주당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한 공약집에 비동의 간음죄를 포함시켰다. 민주당은 10대 정책 중 여성분야에서 '국민 안전을 최우선 챙기겠습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강간죄 구성요건을 현행 '폭행 또는 협박'에서 '동의여부'로 바꾸는 형법 297조 개정"을 공약했다. 피해자 보호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공약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나 결국 민주당은 이는 "실무적 실수, 착오"라며 입장을 바꿨다. 이는 4년 전인 지난 총선 공약보다도 후퇴한 것이다. 민주당은 4년 전인 2020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한 '21대 총선 10대 공약'에서도 이미 "비동의 간음죄 도입 검토"를 포함시키며 "'폭행 또는 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를 구성 요소로 판단"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적장' 한동훈 공격 하루만에 백기투항?…민주당 내에서도 부글부글
민주당이 '비동의간음죄' 공약을 사실상 철회한 배경에는 안티-페미니즘, 즉 반(反)여성주의를 정치적 동력으로 삼으려는 국민의힘과 개혁신당 의 공격, 그리고 일부 젊은 남성층 표심에 대한 과도한 의식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전날 민주당의 '비동의간음죄' 공약을 언급하며 "억울한 사람이 양산될 수 있다"고 해당 법안에 대한 반대의견을 밝혔다. (☞관련기사 : "비동의간음죄 반대" 꺼낸 한동훈 , 또 '反여성주의'로?) '이준석 신당' 개혁신당의 천하람 상임선대위원장도 이날 "비동의간음죄라는 유령이 국회를 배회하고 있다"며 공세를 제기했다. (☞관련기사 : "여성할당제, 비동의간음죄 반대"…또 '안티페미' 꺼낸 개혁신당)
결국 이들의 공세 하루 만에 민주당이 백기를 들고 '해당 공약은 착오'라고 하자 보수진영은 더욱 기세를 올렸다. 한동훈 위원장은 이날 오후 경기 수원 일정 도중 한 발언에서 "저는 어제 민주당의 10대 공약 중 하나인 비동의간음죄가 통과되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런데 오늘 민주당은 갑자기 '실수였다'고 발을 빼고 있다"며 "그건 실수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민주당이 이런 공약을 낸 것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도 냈다"고 했다.
한 위원장은 "저는 그런 생각(비동의간음죄 입법 주장)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저는 '그런 공약을 낸 것 자체가 정말 못할 일이다'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그 법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라며 "그런데 분위기 안 좋으니까 발을 뺀다? 이게 정치냐. 정치를 우롱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당내에서는 "여성 유권자들을 무시하는 행태"라는 비판이 나왔다. 민주당 소속 한 의원은 <프레시안>에 "우리 당에서 비동의 간음죄를 왜 빼는 지 이해할 수 없다"며 "여성 유권자들의 삶에 대한 이해가 없다"고 일갈했다. 이어 "선거철에도 여성들의 절박한 요구에 귀기울이지 않으면 언제 귀기울일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이 의원은 "성평등이 우리 당 당헌당규에 있고, 핵심적 과제로 여성폭력 문제를 다뤄왔다. 그런 흐름에서 당에서 비동의 간음죄를 공약했고 그게 전세계적 추세"라며 "(비동의 간음죄 개정안은) 텔레그램 n번방과 같은 사이버 성폭력과 피해자를 회유해서 성폭력하는 그루밍 성폭력 등 여성들에게 폭력을 당하는 현실을 반영한 개정안"이라고 강조했다. 이 의원은 "상대 당이 성평등을 싹 지우니까 우리도 적당히 지워도 괜찮다고 하는 것"이라며 "정치가 퇴행, 퇴보하고 있다"고 강하게 우려했다.
다른 민주당 관계자도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남초 커뮤니티에서 비동의간음죄에 대한 반발이 세다보니 눈치를 본 것"이라며 "고민하던 2030 여성들은 그래도 한동훈·이준석과 각을 세운 민주당을 찍어줬을 텐데, 이번 민주당의 결정으로 마음이 돌아설 것 같아 걱정된다"고 말했다. 이어 "민주당에서 여성정책을 이야기할 정치인도 없고, 여성 유권자를 챙기는 어떠한 정책도 없다"며 "여성 유권자들이 민주당을 찍을 유인을 당이 제공하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또 다른 당 관계자도 "언제부터 비동의 간음죄가 '남녀 갈라치기 법안'이 됐나. 협소한 법적 규정으로 인해 보호를 받지 못하는 피해자를 보호하고 강간 피해를 줄이자는 취지"라며 "지극히 당연하고 국제사회에서도 요구하는 법안인데 마치 이것이 남녀 갈등을 유발하는 것처럼 소비하는 것은 너무 안타깝고, 민주당이 여기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안타깝다"고 말했다.
녹색정의당 박지아 선대위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을 통해 "한동훈 위원장의 갈라치기 정치에 더불어민주당도 휘말리고 있는 것"이라며 "비동의강간죄 도입을 10대 공약에 넣었던 민주당이,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말이 보도되자마자 불쑥 나서 '검토 단계의 초안이 잘못 포함되었다'며 퇴행에 힘을 싣고 있다"고 비판했다. 녹색정의당은 "선거의 유불리로 여성과 인권을 장식품으로 만드는 낡은 정치를 당장 중단하라"며 "성차별에 반대하는 시민들과 여성 주권자들이 지금 이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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