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 랩 후퍼 미국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동아시아-오세아니아 선임보좌관이 북한 핵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중간 조치'(interim steps)를 고려할 수 있다고 밝히면서 그 구체적 의미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정부는 해당 발언이 윤석열 대통령의 '담대한 구상'과 다르지 않다고 설명했지만, 한반도 상황을 관리해야 하는 미국 정부가 북한과 대화를 유도하기 위해 이같은 발언을 한 것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북한과 대화 의지에 있어 한미 간 차이가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4일 <중앙일보>와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복합위기의 2024'를 주제로 공동으로 주최한 포럼에서 랩 후퍼 선임보좌관은 "미국의 목표는 여전히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면서도 "그러나 만약 역내 및 전 세계를 더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면 비핵화를 향한 '중간 조치'도 고려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신문은 그가 "특히 현재 한반도 상황을 고려할 때 긴장 고조가 오판으로 이어질 위험을 줄이기 위해 북한과 더 큰 폭의(greater), 더 정례화된 소통을 추구해야 하며, 안정화를 위한 활동도 필요하다"며 발언 배경을 설명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임수석 외교부 대변인은 5일 정례브리핑에서 위 발언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는 한미 양국 정부의 공통된 목표다. 북한 정권의 핵 프로그램 완전 폐기 의지가 확인된다면 이를 이행하는 조치들이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고 답했다.
윤 대통령이 제시한 담대한 구상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분석할 수 있냐는 질문에 임 대변인은 "동일한 취지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 NSC 역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며 "우리가 이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동안, 한반도에서의 우발적인 군사 충돌 위험을 줄이는 것을 포함해 우리가 북한과 하고자 하는 가치 있는 대화(valuable discussions)가 다수 있다"는 입장을 내놨다고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NSC는 "우리는 북한이 군사적 위험을 관리하고 한반도에서 항구적 평화를 만드는 방법을 찾기 위한 실질적인 대화로 복귀할 것을 촉구한다"면서 "우리는 북한과 전제조건 없는 대화에 열려 있다"라고 덧붙였다.
한미 양측 정부가 언급했듯 랩 후퍼 선임보좌관의 이번 발언이 북핵의 비확산이나 군축 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북한이 핵 동결 등의 조치를 할 경우 그에 상응하는 반대급부를 제공하는 등 비핵화라는 목표를 향한 단계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기존 입장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022년 광복절을 계기로 언급했던 '담대한 구상'도 비핵화에 따른 단계적 접근을 상정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북한이 핵 개발을 중단하고 실질적인 비핵화로 전환한다면 그 단계에 맞춰 북한의 경제와 민생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담대한 구상을 지금 이 자리에서 제안한다"고 밝힌 바 있다.
한미 간 북한의 비핵화라는 목표가 동일하고 이를 이루기 위한 단계적 접근이라는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음에도 랩 후퍼 선임보좌관의 '중간 조치' 발언이 주목을 받는 데에는 북한과 대화에 대해 한미 양측이 다른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미국 측은 지난달부터 북일 간 접촉 가능성과 관련해 긍정적인 답을 내놨다. 지난 2월 15일(현지시각) 정박 미 국무부 대북고위관리(동아시아태평양 담당 부차관보 겸 대북특별부대표)는 일부 외신들과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우리는 북한의 모든 외교 노력을 지지한다"며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한 일본의 노력을 지지한다"고 말했다고 <중앙일보>가 보도했다.
이어 정박 부차관보는 "김정은 위원장이 미국과의 대화‧외교를 포기했는지 여부는 두고 봐야겠지만 우리는 북한과 미국이 더욱 '외교' 쪽으로 노선을 선회하도록 노력할 것"이라며 "북한이 러시아를 뺀 다른 어떤 종류의 외교를 하는 것은 긍정적인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이와 함께 그는 대북 인도적 지원에 대한 의향도 드러냈다.
이어 2월 20일(현지시각) 사브리나 싱 미 국방부 부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일본 정부가 북한과 정상회담을 진행하려는 외교적 접근을 지지하냐는 질문에 "우리는 북한에 대한 외교 활동을 지지한다. 그들이 원한다면 외교적 접근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며 "우리는 그 지역의 안정을 보길 원한다. 그것(외교적 접근)이 대화로 이어진다면 확실히 환영할 일"이라고 말했다.
한미일 군사 협력을 동맹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리고 있는 미국이 북일 간 접촉 및 대화에 대해 이처럼 긍정적인 입장을 밝히는 배경을 두고,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을 지원하며 사실상 두 개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미국이 한반도에서는 긴장을 고조시키지 않으면서 상황을 관리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이같은 맥락을 감안했을 때 랩 후퍼 보좌관의 이날 발언 역시 북한이 보다 더 대화에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한 기능을 할 뿐이지, 비핵화라는 목표 자체가 변동되거나 새로운 안을 제시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미국의 이런 태도는 남북 정부가 비핵화 협상은커녕, 모든 연락 수단을 끊고 기본적인 소통도 하지 않으면서 대화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과 대비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미국과 일본이 연이어 북한과 대화에 열려있다는 메시지를 내놓고 있는데, 이들이 북한과 대화하면 사전에 한국과 협의해야 한다는 것이 정부 입장이냐는 질문에 5일 기자들과 만난 외교부 당국자는 "우방국 및 입장을 같이하는 나라들이 북한 문제에 있어서는 사전 또는 사후 협의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고 또 그렇게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이 당국자는 북한과 핵문제 관련한 대화에 대해 "대화 자체에 대해 부인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북한과 대화의 장은 항상 열려있다"며 "북한의 비핵화에 대해 한미일 정책은 일치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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