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임 덕(lame duck) - '뒤뚱거리는 오리'로 직역할 수 있는 이 단어는 보통 정치지도자가 권력 누수상태에 빠진 상황을 일컫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이 단어의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오르는 장세를 황소(bull), 내리막 장세를 곰(bear)에 비유하던 18세기 런던 증권시장에서 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진 투자자를 절뚝거리는 오리에 비유하며 생겨난 말이라고 한다.
뒤뚱거리는 오리를 닮은
어느 교차로 한복판, 좌회전 대기차선에 차량 한 대가 멈춰서더니 꿈쩍도 안 한다. 어느 골목길에선 비슷하게 생긴 차량 3~4대가 몰리더니 마찬가지로 옴싹달싹을 안 한다. 길은 꽉 막혀버렸고 시민들은 아우성인데 차량 안에는 사태를 수습할 운전기사가 없다.
몇 달 전까지 캘리포니아 시내에서 가끔 발생하던 일인데, 사건의 주인공은 GM의 자율주행차 크루즈(Cruise)다. 성난 시민들이 이 장면을 사진과 동영상에 담아 SNS에 퍼뜨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지난해 10월 캘리포니아주는 GM에 발급해준 무인택시 영업허가를 정지시켜 버렸다.
사실 자율주행 부문에서 뒤뚱거리는 오리가 되어버린 것은 GM만이 아니다. 포드(Ford)와 폭스바겐(VW)은 함께 투자했던 자율주행사업 Argo AI에서 모두 손을 뗀 상태이며, 테슬라(Tesla)의 경우 잦은 사고 발생으로 인해 오토파일럿(Autopilot) 관련 미국 도로교통안전국(NHTSA)의 조사를 받고 있다.
최근 앱티브(Aptiv) 역시 현대차와 함께 만든 자율주행 기술 합작사 '모셔널(Motional)' 지분을 축소하고 추가 투자 중단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당장 내일이라도 AI가 운전을 대신해줄 것 같았던 장밋빛 미래는, 손에 쥔 백사장 모래처럼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중이다.
이쪽에도 절뚝거리는 오리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법을 만든 미국 바이든 행정부. 그런데 이름과 달리 인플레이션을 감축했다는 효과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일정한 요건을 만족하면 전기차 구매시 세액공제 혜택을 준다고 했으나, 어째 날이 갈수록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는 차량 숫자가 크게 늘어나지 않는다.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우선 중국산 광물 사용을 사실상 금지하다보니 배터리·모터 생산에 너무 많은 비용이 들어가게 되었고, 차라리 인센티브를 포기하고 값싼 중국산 광물 사용을 선택하는 업체가 생기기까지 했다.
다음으로 지난 글에서 소개한 것처럼 전기차에 대한 소비자 선호가 바뀌기 시작했고, 주요 업체들이 전기차보다 내연기관차 생산에 더 역량을 쏟는 기현상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러다보니 전기차 시대가 금방이라도 올 것 같은 기대감에서 만들어진 법이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점점 강해지는 보호무역과 역(逆)세계화
전기차·미래차로의 산업전환은 뒤뚱거리고 넷 제로를 향한 움직임도 절뚝거리는데, 유일하게 중단되지 않고 수직으로 솟는 움직임이 있다. 어떻게든 공급망(Supply Chain)을 독점해 세계 경제 패권을 쥐고야 말겠다는 미국, 유럽, 중국 경제권역(생태계)의 무역분쟁이 그것이다.
IRA 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하면서도 미국은 (여·야 가리지 않고) 중국을 향한 규제 수준을 더 높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유럽연합은 미국의 IRA법을 모방한 핵심원자재법(CRMA) 입법지침을 내놓고 토론 중에 있다.
유럽연합의 입법지침 확정 절차는 몇 년 걸리는 장기간의 절차지만, 문제는 유럽연합 논의 과정에 회원국 정부가 먼저 입법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특히 유럽에서 자동차 생산을 주력으로 하는 5개국(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의 경우에는 논의가 매우 빠른 편이며, 프랑스는 이미 자국기업에 유리한 전기차 보조금 제도 설계를 완료한 상태이다.
여기에 최근 유럽연합은 중국 정부가 자국 업체에 보조금을 주며 공정경쟁을 침해했다며 중국 자동차산업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당연히 중국 정부는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고, 이는 또다른 무역분쟁의 씨앗이 될 가능성이 크다. 중국 역시 배터리 음극재 원료가 되는 흑연제품, 반도체의 소재가 되는 갈륨(Ga)과 게르마늄(Ge) 수출을 규제하겠다며 맞불을 놓기 시작했다.
문제는 지난 글에서 얘기한 것처럼, 한국 자본주의가 처한 상황이다. 미국, 중국, 유럽 이 3개의 생태계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덕분에 수출 주도 경제를 운영해왔던 한국 경제에, 무역분쟁과 역(逆)세계화는 분명 먹구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속 불가능한 수출 주도 경제
게다가 윤석열 정부 등장 이후 남북관계 경색은 물론이고 중국·러시아와 끊임없는 외교분쟁이 이어지고 있다. 이 분쟁은 정치·군사적인 의미만 갖는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한국 자본주의 부동의 1위 교역국이었던 중국 관련 무역 수치가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많은 나라들이 중국으로 수출 규모가 줄었지만, 한국은 감소폭에서 전세계 1위를 차지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2023년) 한국의 대중국 수출은 전년 대비 3.6% 감소했다. 반대로 한국의 중국 의존도는 갈수록 커지고 있으며, 지난해 중국과의 교역에서 수입액이 수출액보다 7억 달러 적은 것으로 나타나 한-중 수교 30년 이후 최초로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물론 윤석열이 아니라 이재명 정부가 탄생했더라도 이 먹구름을 헤쳐나갈 뚜렷한 방도를 내진 못했을 것 같지만, 최소한 윤석열 정부의 외교정책이 먹구름이 몰려오는 속도를 빠르게 재촉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최근에도 한-러 관계는 외교 관행상 구경하기 어려운 노골적인 비난이 오가고 있지 않은가.
중국·러시아와 대결하는 대신 한·미·일 동맹에는 확실하게 줄을 섰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럼 이 동맹은 한국 자본주의에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줬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미국과 일본 자본주의 입장에서는 제밥그릇 지키는 게 훨씬 급한 상황이다. 당장 미국이 IRA 법을 만들면서 한국 쪽 사정을 단 하나라도 고려해준 게 있었던가.
이 동맹이 한국에게 북·중·러와의 대결에서 핵우산을 제공하는 수준의 군사적 협력을 제공하긴 하겠지만 경제적 협력은 가져오지 않는다. 핵우산 제공이 과연 외교·군사적인 혜택일지 아니면 한반도 긴장 강화로 오히려 더 위험에 빠진 것인지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즉, 한·미·일 동맹이 과연 한국 자본주의 입장에서 이익을 가져다준 것인지 자체가 의문거리인 셈이다.
대공황, 대불황에 이어 대경쟁(Great Competition)의 시대
과연 윤석열 정부는 이 상황을 헤쳐나갈 묘안을 갖고 있을까? 집권세력은 아무런 답도, 출구도 갖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저 하릴없이 한·미·일 동맹의 아가리 속으로 반도 남단의 운명을 밀어넣는 길 외에는 말이다.
미국·중국·유럽이 아닌 다른 생태계, 이를테면 요즘 블루오션으로 떠오르는 인도와 인도네시아 시장 진출을 노려보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 지역 역시 최근 IRA법과 유사한 '현지생산 연계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하며 보호무역의 장벽을 높이 올리기 시작했다.
1929년의 대공황(Great Depression), 2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한 파괴 후 다시 맞이한 자본주의 황금기(1945~1970년대 초반), 신자유주의 도래에 이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지속적으로 이어진 대불황(Great Recession) 시대에 이어 세계 자본주의는 바야흐로 서로 물어뜯어 버티는 놈만 살아남는 대경쟁(Great Competition)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수출로 먹고 살던 시대, 자본가들의 이윤을 최대로 늘려주기 위해 만들었던 산업구조, 즉 재벌·대기업을 정점으로 그 밑에 1차 하청, 2차 하청, 3차 하청을 깔아두었던 수직계열화와 다단계 하청구조, 원청이 하청을 수탈하고 하청은 하청노동자를 수탈함으로써 수출가격 경쟁력을 쥐어짰던 그 낡은 구조 역시 제대로 작동될 리가 없다.
북의 권력세습만큼이나 징글맞은 반도 남단의 기업 세습도 위험 요인이 되고 있다. 산업 생태계에 대해서는 1도 모르는 3세, 4세 세습 자본가들은 제조업에 흥미를 잃고 엑소더스(Exodus), 산업 대탈주에 나서고 있으며, 이는 자동차산업의 경우 먹이사슬 정점에 위치한 원청 완성차업체의 공급망 관리에 커다란 리스크로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새 판, 새 틀, 새 전략 짜야
무한정 수출이 먹여살려줄 것 같은 시대는 이제 다시 오지 않는다. 일부 수출시장에 반짝 수요가 만들어질 수도 있겠지만, 운과 요행에 운명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더 늦기 전에 대경쟁 시대를 헤쳐나갈 방도를 짜내야 한다.
그 엄청난 프로젝트를 <인사이드경제>라는 좁은 틀에 담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짧은 시간 안에 달성 가능한 일도 아니다. 힞;민 최소한 새로운 전략의 '키워드'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정도는 짚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선 경제 운용 원리에서 수출의 중요성이 줄어든다면 응당 강조되어야 할 부문은 '내수'가 될 수밖에 없다. 아울러 수출 주도 경제에 맞게 설계된 산업구조 역시 뜯어고쳐야 한다. 전기차·미래차를 향한 산업전환이 아니라 대경쟁 시대를 헤쳐나갈 목적으로 설계된 산업전환 말이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다단계 하청을 통한 단가 후려치기 방식은 (본래부터 노동을 착취하는 문제 많은 구조였지만) 어차피 이 시대에 지속 불가능한 수단인 만큼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어차피 세계경제와 산업을 좌우하는 키워드가 '공급망'으로 바귄 만큼, 원·하청 구조 역시 이 공급망의 관점에서 완전히 새로 써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유럽과 미국 등에서 논의되거나 법·제도로 만들어지고 있는 공급망 실사(Supply Chain Due Diligence) 제도는 충분히 참조해볼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현재 이 제도는 유럽·미국 지배세력들이 중국을 견제할 목적으로만 활용하고 있지만, 노동자들의 인권과 소득 그리고 지속가능한 친환경 생태계를 위해서도 활용 가능한 여지를 분명히 남겨놓고 있다.
내수, 공급망, 새로운 산업구조와 경제 운용원리 … 아차, 오해 없으시길. <인사이드경제>는 자급자족론자가 아니다. 보호무역과 무역장벽, 역(逆)세계화 시대에 글로벌 경제구조를 바꾸기 위한 노력도 반드시 필요하다. 아니 그건 더 어렵고 힘든 문제 아닌가?
사실 '공급망'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제 한 나라에서만 만들어질 수 없는 글로벌 의미를 담고 있기에 이 문제를 따라가다보면 정답으로 가기 위한 실마리, 힌트 같은 것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소중한 실마리들을 얻기 위해 <인사이드경제>는 이 무모한 모험을 당분간 계속 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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