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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1997년에 태어난 나…내가, 대신 살아남았다"

[기고] 열여덟의 그날을 잊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1997년에 태어난 우리는 2014년 세월호 참사로, 2022년 이태원 참사로 또다시 또래 친구들을 잃었다.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안전하고 생명존중이 우선인 사회 기필코 만들어 내겠다."

10.29 이태원 참사에 대한 추모가 한창이던 지난 2022년 11월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 붙어있던 추모 메시지 중 하나입니다.

일명 '97세대'는 교복에 명찰을 달듯 가방에 세월호 참사 추모 리본을 달고 학교에 갔습니다. 윤선영 씨도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윤 씨는 2014년 4월 16일 학교 수업 시간에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나던 배가 침몰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때는 "국가에 대한 두터운 믿음과 신뢰로 '다 구하겠지'"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세월호 탑승자 476명 중 304명이 사망 또는 실종됐습니다.

지금 윤 씨는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는데요. 사회인이 된 그의 첫 번째 행동은 세월호 참사 10주기 시민위원이 돼 그 날을 잊지 않는 마음을 모으는 것입니다.

'97세대' 윤선영 씨의 글을 소개합니다. 편집자

ⓒ프레시안

1997년에 태어난 사람의 이야기

당시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단원고 희생자 학생들과 똑같은 학년이다. 태어난 해는 1997년. 그런 말도 돌았었다. 97년생들에게는 비극이 많다는 등, 초등학생 때는 신종 플루가 돌아서 수학여행을 못 갔고, 이번에는 어쩌고. 그런 말들이 싫었다. 그때는 그냥 마냥 싫었는데, 성인이 되고 나니 어떤 이유로 싫었던 건지 알게 되기 시작했다. 이 참사가, 이 비극이 무언가 대상화되고, 사람들이 떠들기 좋은 가십거리로 취급되는 것 같아서 싫었다. 더 동정하기 쉬운 것으로. 그래서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97년생이라는 속성을 지우고 싶어 했다. 나 또한 동갑이었다고 말하는 게 싫었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 이야기를 할 때면, '나 그때 고2였다'라는 말을 하고 다니고 있더라. 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나는 2023년에 4.16재단 대학생 기자단 활동을 하게 되면서 세월호 참사 9주기 당시 대학생 기자단 신분으로 선상 추모식을 다녀왔다. 그날 나는 2014년 4월 16일, 고등학교 2학년 영어 듣기 평가를 하던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갔다. 동아리 시간이 있는 수요일이었으며, 수학여행을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날이었다. 핸드폰을 내지 않은 친구들과 수업에 들어온 선생님들이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나던 배가 침몰 중이라는 소식을 알려줬다. 그리고 나는, 우리나라는 선진국이므로 당연하게도 다 구조하고도 남았을 거라는, 국가에 대한 두터운 믿음과 신뢰로 '다 구하겠지' 같은 안일한 말을 했다. 헬기든, 구조경이든, 무엇이든 다 구하러 갔겠지. 배에 있는 사람들을 다 구하고, 그 사람들은 분명 일상으로 다시 복귀할 것이라고. 나는 영어 듣기 평가를 하지 않고 수학여행을 갔다는 철없는 말을 지껄였다. 그리고 그 말을 꺼낸 것을 나는 지금까지도 후회한다. 집에 돌아가 저녁이 되어 TV를 켜고 나서야,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알고 있던 이 사회와 국가도.

추모식을 다녀오고 '내가 대신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삶에 대한 부채감이 들었다. 당사자도 아닌 내가 이런 감정을 가질 자격이 과연 있나 고민하고 방황하며 괴로워 한동안 침전해 있었다. 혼자 감당하기 힘들어 고민 끝에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연락했다. 우리는 9년 동안, 각자 혼자서 애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친구들은, 사회 분위기에 짓눌려 말을 꺼내어 감정들을 전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의 앞선 여러 미성숙한 행동을 변명하자면, 여태껏 말하지 못한 그 허전함 때문에 그랬던 거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달리 말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때 당시 많은 추모 행사가 열렸고, 반에서 노란 리본 뱃지를 공동구매하여 달고 다녔다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 추모와 애도에 적신호가 켜져 가기 시작했음을 느꼈다. 하복을 입은 2014년의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길을 걷다가 시청 앞에 있는 세월호 참사 특별법 서명 운동 부스를 발견했다. 내 친구는 '이런 건 좀… 그래'라며 피해갔다.

그 친구는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얼마 안 있자 아저씨가 서명 운동하는 사람을 향해 욕을 하기 시작했다. 무서움을 느꼈던 것 같다. 화가 너무 나는데도 나는 아무런 말도, 반박도 못하고 친구와 그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친구를 붙잡고 울었다.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내가 싫었고, 저런 터무니 없는 사람이 많은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 무력감을 느꼈다.

학교 토론 동아리에서는 '세월호 특별법 찬반 토론'을 하자며 대학 입학 특례는 얼마나 부당한 일인지를 시작으로 정말 잔인한 이야기들이, 우리 학교 복도와 교실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해의 여름도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나는 내 친구들을 욕하자고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니다. 친구들이 왜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지를 말하고 싶었다. 사회가 어떻게 이 참사를 바라보고 있는지, 학생들도 다 느낀다. 본능적으로 직감한 것이다.

"사회는 이 참사를 애도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학생들은 그렇게 숨을 죽였다.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친구들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 채 시간을 보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 사회가 이상하고 잘못된 것임을 알아차리기엔 너무 어렸고, 어른들은 여전히 이상했으며, 알아차렸더라도 그 속에서 목소리를 내기엔 힘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공권력이 세월호를 어떻게 짓밟았으며, 어떻게 무너트리려고 했는지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꼈다. 왜인지 마음 한편에서 '이제 와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여덟에 들었던 '어른들이 미안해'라는 말이 생각나며 화가 났다. 정말 미안하다면, 그때 그랬으면 안 되었지. 지금 와서, 이제 와서 이렇게 굴면 안 되었지. 근데 왜. 이제 와서.

분노와 서러움의 시절을 보냈다. 억울함을 가슴 속에 담고 살았다. 그렇지만 오로지 당신들 탓이라고 하고 싶지 않다. 이 나라 사회·정치·경제 그 어느 하나도 뺄 수 없는 본질적인 문제와 언론의 문제가 있음을 나 또한 안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억울하고 서러웠고, 눈물이 났다. 그러면 나는 어디에다가 이걸 토로하고, 말을 하고, 탓을 하지? 방황했다. 왜 우리는 이렇게까지 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절망감, 패배감 속에 지난날을 보냈다. 어린 나이부터 무력감이란 감정을 배웠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생각을, 처음 내뱉는다.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나는 피해 당사자가 아니다. 당사자가 아닌 주제에 서러워하고, 울고, 억울해하는 것이 과연 맞는 일인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까지도 혼란스럽다. 자격도 없는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것에 죄책감 또한 느낀다. 그렇지만 혼란스러운 이 모든 것까지 97년에 태어난 자의 이야기라 생각했기에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간다. 그것이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이기에. 그때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내가 바라보는 세월호 참사는, 이렇다.

열여덟이었던 내가 이젠 스물여덟이 되었다. 나는 대학에 입학한 년도에 비해 학교에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학교 캠퍼스에서 내가 나이를 먹어가면 갈수록, 주변에서 마주하는 이들의 나이는 점점 어려지는 것을 느꼈다. 당연한 것인데, 이걸 깨달을수록 기분이 이상했다. 그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면 그들에겐 그날이 점차 옅어진 기억이 되어감을 느꼈다. 해를 거듭할수록 그러했다. '그때 초등학생이었겠구나.' 분명 나와 같이 시간표를 고민하고 학점을 걱정하는, 다를 바 없는 대학 생활을 하는 20대 또래이긴 하다만, 그럴 때면 무언가 가슴이 공허해졌다. 나이를 먹어가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옅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각자의 기억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기억하고, 애도해주었으면 한다. 그때 어렸고, 혹여 아직 태어나지 않았어서 그때 기억이 옅거나 없어도, 결국 세상에 남아있는 마음과 흔적만큼은 짙어질 것이다. 나는 이제 스물여덟이 되었고, 열여덟의 그날을 잊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래서 '세월호 참사 10주기 시민위원'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날을 잊지 않는 마음들이 모여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참사 10주기 시민위원이 되기를. 그러한 것들을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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