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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서 진실은 사라지고 법리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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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법정에서 진실은 사라지고 법리만 남는다

[영화, 시대를 넘다] <추락의 해부>

<추락의 해부>는, 제목으로는 다소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영화로 보이지만 내용은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실체적인 사건에 대한 얘기이다. 3층 높이에서 추락해 사망한 한 남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그의 아내가 용의자로 몰리고 지루한 법정 싸움을 이어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남자의 추락, 추락사는 철저하게 해부 된다. 남편의 사망사건은 이제 분석을 넘어 추측과 예단과 편견과 왜곡 모두를 오가기 시작한다. 여자는 남자가 죽은 것에 슬퍼할 틈이 없다. 혹은 슬퍼하는 척할 여유가 없다. 진실은 모른다. 모두들 진실의 조각 만을 가지고 얘기하려 한다. 모든 사건은 법정으로 가는 순간 진실은 사라지고 법리만 남는다. 그때의 진술과 지금 법정에서의 증언은 왜 다른가, 그때 왜 거짓 진술을 했는가, 그 소리는 집 밖으로 나가기 전에 들었는가, 나가고 나서 들었는가 등등 진실은 사건이 조각조각 해부 되는 과정에서 여지없이 파괴된다. 사람들도 점점 더 진실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진실은 어느 순간 유희가 된다.

유명작가인 산드라 포이터(산드라 휠러)는 독일에서 왔다. 프랑스 남자 사뮈엘 말레스키(사뮈엘 테이)를 만나 결혼을 해서인데 그 둘은 중간 언어인 영어를 쓴다. 둘 사이에는 11살짜리 아들 다니엘(밀로 마차도 그리너)이 있다. 다니엘은 4살 때 교통사고로 시력을 영구적으로 상실했다. 아이는 스눕이란 이름의 안내견에 의지하며 살아 간다.

사건은 갑자기 터진다. 산드라는 산속에 위치한(원래는 남편의 별장이었던) 집으로 자신의 글을 흠모하는 한 젊은 여성(여학생)의 방문을 받는다. 그녀는 산드라를 인터뷰할 요량이다. 산드라는 여자를 친절하게 대한다. 집 말고 다른 데, 시내인 그루노블(프랑스 남동부 리옹 근처)같은 데서 만났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고 말한다. 그때 위층에서 음악 소리가 꽝꽝 울린다. 래퍼 50센트의 '핌프'란 곡으로 만든 인스트루멘털(연주 음악)이 대화를 어렵게 만든다. 50센트의 원곡은 여성 혐오성 가사로 채워져 있다(고 일부에서는 해석되고 있다). 여자는 음악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음에 다시 만나자는 산드라의 제안에 약간 의아해 하는 기분으로 집을 나선다. 아들 다니엘은 맹인 안내견 스눕과 함께 눈길 산책을 나선다. 산드라는 와인 한두 잔에 약간 취기를 느껴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 다니엘은 집으로 돌아 오는 도중 추락해서 머리가 깨져(뭔가에 의해 함몰된 것일 수도 있는) 사망한 아빠를 발견한다. 정확히는 스눕이 발견하고 다니엘은 엄마 산드라를 부른다. 경찰이 출동하고 사건은 점점 산드라를 살인자로 지목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추락의 해부> ⓒ그린나래미디어

아내 산드라가 범인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부부는 아이가 사고를 당해 눈을 잃은 후 자책과 책임전가, 심리적 중압감에 빠져 살았고 당연히 부부싸움을 종종 벌였다. 가끔 폭력도 동원됐을 수가 있지만 그게 살인으로 까지 연결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목격자도 없다. 직접 증거도 없다. 살인 무기도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정황일 뿐인데 그걸 뒷받침 하는 일상의 증거들, 특히 녹취 파일이 발견된다.

남편 사뮈엘은 아내 산드라처럼 성공한 작가가 되고 싶었다. 산드라는 소설의 아이디어를 대체로 일상에서 얻는다. 사뮈엘은 아이템을 만들기 위해 자신들의 일상을 녹음했고 그 녹취가 고스란히 그의 PC USB에 담겼다. 둘의 대화는 적나라하게 공개된다. 사뮈엘이 자신의 고충을 토로하며 얼마나 철없이 굴었고 산드라는 산드라대로 그런 그에게 얼마나 차갑게 대했는지가 드러난다. 부부는 사랑했는가. 여느 부부마냥 늘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론은 산드라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녀가 남편을 진짜로 죽였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TV 토론 프로에 나온 한 패널의 말마따나 '여성 작가가 남편을 죽였다는 설정이 남자가 자살했다는 설정보다 훨씬 흥미롭기' 때문이다.

영화 <추락의 해부>는 언뜻 미스터리 스릴러나 심리 스릴러(부부관계의 바닥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인 척 하지만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산드라의 영민한 변호사 뱅상(스완 아를로드)은 기자들에게 "유죄 증거가 없는 만큼 산드라는 결백하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산드라에게는 "무엇이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제 다른 사람의 눈(검사의 눈)으로 (당신도 이 사건을) 바라봐야 (이 재판에서) 이긴다"고 말한다. 산드라와 유력 증인인 아들 다니엘이 서로 입을 맞출 우려가 있는 만큼 법무부 감찰 요원 마르주(제니 베스)까지 집에 기거하며 생활해야 한다. 마르주는 다니엘에게 '판단할 만한 정보가 없어 결정을 못할 때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사실상 엄마 아빠 둘 중 한쪽을 택하라는 애기이다.

산드라의 사생활, 인생은 무너진다. 그녀가 양성애자이고 남편 사뮈엘 외에 다른 여성과 혼외정사를 벌인 일, 남편이 쓰다 폐기한 이야기를 자신의 소설로 가져 와 사실상 표절이라는 의혹을 받고 그에게 종종 비난을 산 일 등등이 다 까발려진다. 검찰은 집요하게 산드라 포이터의 살해 동기를 유도해 내려 한다. 법은 누구한테나 평등하다. 참혹할 만큼 가학적이며 잔인하다는 면에서 그렇다. 사람들은 점점 더 검찰이 진행하는 가학의 퍼포먼스에 쾌감을 느낀다. 산드라는 맞서려고 노력한다. 변호사 뱅상의 조력과 백 업이 주효하다. 아들 다니엘을 지키려는 모성도 큰 동력이 된다. 산드라는 다니엘에게 말한다. 기억의 작은 부분에 집착해 기억 전체를 의심하면 안 된다. 산드라는 잔혹한 법정을 경험하며 변호사 뱅상에게 이렇게 말한다. '빈 칸은 빈 칸으로 놔둬야 한다'고.

▲<추락의 해부> ⓒ그린나래미디어

진실 그 자체보다 진실을 알아 내려고 하는 노력이 중요하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것도 그저 다 하는 말, 수사일 뿐이다. 그 노력이 어떤 모양새인지가 더 중요하다. 어떻게 알아 내려고 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사건의 편린, 작은 조각, 작은 부분 하나를 가지고 그걸 전체로 확대 해석하려는 아전인수의 노력을 벌이고 있는 건 아닌지를 되돌아 봐야 한다. 퍼즐 하나 하나를 끈기 있게 맞추되 비록 의심되는 상대방일지라도 마주 앉아서 그걸 할 수 있느냐 같은 태도가 더 중요할 수 있다. 이 발칙한 신예 여성 감독 쥐스틴 트리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허구 헌 날 허울 좋게 떠벌려지는 실체적 진실의 유무 여부가 아니라 진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이 영화 <추락의 해부>는 바로 그 태도에 대한 해부이자 임상 보고서이다.

이 영화의 시퀀스는 유독 길다. 예컨대 이 영화의 주요 장면은 법정 시퀀스이다. 두 개의 주요 법정 시퀀스는 각각 30분에 이른다. 이 영화의 러닝 타임이 150분인 이유는 이 법정 장면들을 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시퀀스란 여러 개의 씬이 모여 하나의 에피소드를 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또 씬은 매우 다양한 앵글의 컷으로 이루어진다. 필자 注) 이렇게 비교적 길게 이어지는 시퀀스의 경우엔 촬영의 기교보다는 철저하게 배우의 연기력에 의존해야 한다. 배우의 연기력은 순전히 감독의 연출력에 따라 나오는 기량이 달라진다. 출연 작품에 대한 배우의 믿음이 감독과 동질할 때 작품이 좋아진다. 배우들은 이 작품에 대한 감독의 (정치적) 판단과 결정이 옳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메쏘드 연기가 나올 수가 없다. <추락의 해부>의 감독과 배우, 스태프들은 그런 점에서 최고의 프로덕션을 만들어 냈다. 칸이 괜히 이 작품에 황금종려상을 준 것이 아니다. 진실의 해부, 진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그 방식이야 말로 지금의 사회에서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만 그럴 줄 알았다는 것이 이 영화가 주는 충격 중 하나이다. 프랑스도 진실의 조각 하나 만을 가지고 검찰과 법정이 진실의 전체를 이상한 방향으로 왜곡할 수 있는 나라임을 영화는 보여 준다. 근데 이건 실망할 일인가, 아니면 (거기나 여기나 마찬가지이니) 안심할 일인가. <추락의 해부>는 우리 사회에 많은 울림을 줄 것이다. 영화가 시대를 넘고 국경을 넘고 있다.

▲<추락의 해부> ⓒ그린나래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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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

오동진은 신문,통신,방송사 문화부 기자로 경력을 시작했다.영화전문지 FILM2.0과 씨네버스의 창간멤버와 편집장을 지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집행위원장과 부산국제영화제 마켓 운영위원장이었다. 현재 영화 글만 쓰고 산다. 들꽃영화상 운영위원장이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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