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좇기며 사는 저에게 소중한 아이가 생겼지만, 유산기가 있어도 근무를 해야 했고, 실제 두 번의 유산을 했습니다. 심지어 유산한 당일에도 일을 했습니다. 세 번째 아기가 생기고 나서도 문제였습니다. 출산휴가, 육아휴직도 없는 저는 쉬는 날짜를 정해서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말을 했고, 실제 날짜를 정해서 출산했습니다. 아기 낳고도 쉬지 못하는 건 여전했습니다.(중략)
갓난쟁이 아기를 돌보며 제한 시간 내로 모니터링을 하다보니 글이 밀릴까 두려웠고,(중략) 고열, 오한 통증도 3일의 시간을 참고 참다가 쉬는 날 응급실을 갔고,(중략) 당장 입원하자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으신가요? 제가 대답한 한마디는 이랬습니다.
'중환자실 가서 노트북 사용해도 되나요?'
제가 오랜 시간 일하면서 회사에서 느낀 감정은 일할 때 아프면 죄가 됩니다."(9년 차 콘텐츠 모더레이터 정혜선)
20대에 한 회사와 프리랜서 도급 업무 계약을 맺고 포털사이트 게시글, 댓글 등을 모니터링하는 업무를 담당해 온 콘텐츠 모더레이터 정혜선(가명) 씨는 주 6일 근무에 주말이면 8~10시간씩 근무를 한다.
그러나 회사는 '15분 이상 글이 밀리면 메신저를 통해 모니터링이 밀렸다며 해고하겠다'고 협박을 일삼거나 '근무자들끼리 대체근무가 필요하면 쓰고 갚아라'라며 모든 업무를 노동자들에게 떠넘겼다.
그럼에도 정 씨는 "20대 절반을 바친 회사라 쉽게 그만둘 수 없었고, 지금도 그렇다"고 말했다. 대신 "이제 부당한 것은 부당하다고 말하고 싶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고 일하고 싶다"며 "사람이 사람답게 일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고 밝혔다.
정 씨와 같은 콘텐츠 모더레이터를 비롯해 영화산업 노동자, 방송 프리랜서, 방문 점검원, 배달 라이더, 대리 운전기사, 보험 설계사, 학습지 교사 등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플랫폼·특수고용·프리랜서 노동자들이 1일 서울 종로구 전태일기념관에서 열린 증언대회 '플랫폼·특수고용·프리랜서 노동자들의 '할말잇수다''에 참여했다.
증언대회는 1부와 2부로 진행됐으며, 1부에서는 근로기준법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2부에서는 노동조합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각각 이야기했다. 증언대회는 '플랫폼노동희망찾기·할말잇수다 기획단'이 주최하고, 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이 진행했다.
"신림역 살인 사건 CCTV 영상, 몇 날 며칠 계속 떠올랐다"
3년 차 콘텐츠 모더레이터 김민정(가명) 씨는 "이 일은 많은 사건사고를 여과 없이 가장 빠르게 보게 된다"며 사건 사고와 관련한 사진과 영상에 무방비로 노출돼 겪게 되는 트라우마를 호소했다.
김 씨는 "그동안 여러 가지 사건들을 봐왔지만(자살, 사고 및 자해) 가장 힘들었던 건 최근에 있었던 '신림역 살인 사건' CCTV 영상이었다"며 "누군가 올린 링크를 클릭했고 뉴스에 보도된 영상의 모자이크가 처리되지 않은 영상을 봤다. 당시에는 영상으로 연결되는 링크를 올린 게시글을 빨리 지워야 해서 아무렇지 않았는데 몇 날 며칠 계속 그 장면이 떠올랐다"고 했다.
'신림역 살인 사건(신림역 칼부림 사건)'은 피고자 조선이 지난해 7월 서울 관악구 신림역 4번 출구 인근 골목과 지상 주차장에서 20대 남성 1명을 살해하고 30대 남성 3명에게 부상을 입힌 사건이다. 조 씨의 범행부터 검거 당시까지의 상황이 인근 가게 CCTV에 찍혔고, 해당 영상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영상을 본 누리꾼 다수가 정신적 충격을 호소했다.
김 씨의 업무 특성상 그는 앞으로도 이 같은 상황에 강제 노출될 수 있다. 하지만 프리랜서라는 도급 형태의 계약 노동자인 상황에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한 치료 등 상담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다. 이에 김 씨는 "이 일을 지치지 않고 할 수 있게끔 노동자로 인정받았으면 한다"고 했다.
콘텐츠 모더레이터 4년 차인 김지윤(가명) 씨 역시 "매일 같이 잔혹한 장면과 저속한 욕설, 혐오/음란 이미지, 폭력적인 콘텐츠들을 마주하"고 있다면서도 자신의 검수로 다른 수백수천 명의 이용자들이 폭력적인 콘텐츠를 보지 않을 수 있다며 "계속 자긍심을 갖고 일을 할 수 있도록", 또 "기업의 꼼수 계약으로 이용당하고 고통받는 노동자들이 더 이상 없도록",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받고 싶다고 했다.
"다시 '근로계약서가 필요하다'고 외칠 수밖에 없다"
'꼼수 계약'은 콘텐츠 모더레이터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영화산업 노동자와 방송 프리랜서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영화와 드라마 현장에서 촬영 일을 하고 있다는 안용호(영화산업노조 조합원) 씨는 2014년 개봉된 영화 <국제시장>을 시작으로 도입된 영화산업 노동자들에 대한 근로기준법이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시장에서는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안 씨는 특히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영화 제작 현장이 급격하게 감소하게 되고 제작 인력들이 OTT 시장으로 진출하면서" 영화와 드라마 제작이라는 똑같은 일을 하는데도 "사례가 없다"는 이유로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은 채 일이 진행되고 있다고 토로했다.
안 씨는 따라서 "이제 다시 '근로계약서가 필요하다'라는 예전에 했던 요구들이 현재도 유효하다"며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어야 한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름 '엔딩크레딧'의 진재연 집행위원장은 오는 4일 부당해고를 당한 뒤 세상을 등진 고(故) 이재학 피디의 4주기를 언급하며, 2021년 드라마 방송 작가의 노동자성이 인정되는 등 방송 노동자의 노동 조건이 변화했다지만 "개별적으로 혼자서 외롭게 법적 소송을 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고 전했다.
진 위원장은 방송 노동자의 경우, "법적 다툼을 하면 부당해고로 인정받는 경우가 굉장히 많고 부당해고로 인정받아서 다시 복직하는 경우도 굉장히 많"지만 "복직을 해서 들어갔더니, 법적으로는 노동자성이 인정됐지만, '우리 회사는 우리 방송사는 널 인정할 수 없어'라고 하면서 계속 괴롭힘을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고 비판했다.
김동우(가명) 아나운서는 지난 2021년부터 광주MBC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다 세 차례 법률 구제 끝에 광주고용노동청에서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라는 판단을 받았지만 회사는 경력 인정 불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산하 아나운서는 UBC울산방송에서 5년여를 일하다 해고당한 뒤 부당해고 판정을 받고 복직됐으나 회사는 현재까지도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고 있다.
진 위원장은 또 "<오징어게임> 시즌2 제작이 결정되면서 주연배우인 이정재 씨의 회당 출연료는 100만 달러(13억 1800만 원)까지 올랐지만", 이 씨와 같이 출연하는 단역배우들의 출연료는 전혀 오르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제작비의 대부분을 스타 배우들의 출연료로 지출하고 단역배우나 스태프들은 최저임금을 받는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1시간 일하면 국밥 한 그릇은 사 먹을 수 있어야…"
방문 점검원, 배달 라이더, 대리 운전기사, 보험 설계사, 학습지 교사 등이 참여한 2부에서는 노동조합을 만들고 단체교섭을 통해 이룬 성과도 많지만, 일할 때 소요되는 교통비·통신비 등 각종 비용 문제 및 퇴직금도 없는 현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LG 제품 케어 서비스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김정원 씨(금속노조 서울지부 LG케어솔루션지회 지회장)는 지난 2022년 업계 최초로 체결한 임금·단체협약을 통해 차량 유류비 월 평균 1만4000원 지원과 고객 부재로 발생한 헛걸음 지원비 월 평균 1만5000원 지급 등을 성과로 꼽으면서도 "지난 2023년 3월에 시작한 교섭이 해를 넘겨 오늘 조인식이 진행됐다"며 과정이 순탄치 않았음을 전했다.
그럼에도 △계정 갑질 또는 왕따, △ 고객 괴롭힘에도 고객 편만 드는 사무소장에 대한 대응, △ 근무 중 부상에도 계약 해지가 되는 경우 등에 대한 안전 장치 마련에 애썼다고 밝혔다.
김 씨는 또 가정 방문이라는 업무 특성상 반려동물 공격으로 인한 부상이 자주 발생해 "방문 안내 문자에 '반려동물을 분리해 달라'는 문구를 넣어달라고 했더니 '여러분의 소중한 반려견이 기계 작동 소리로 인해 놀랄 수 있으니 분리해 주시라'라고 안내가 나갔다"며 노동자가 아닌 고객의 반려동물에 초점을 맞춘 회사 측의 안내를 비판했다. 그러나 지금은 "노동자 우선으로 '매니저들의 안전한 작업을 위해 반려동물을 분리해 달라'라고 바뀌었다"고 했다.
스스로를 50대 대리 운전기사라고 소개한 이창배 씨(서비스산업노조 전국대리운전노동조합 교육국장 서울지부 사무국장)는 "1시간 일하면 국밥 한 그릇은 사 먹을 수 있어야 하지 않나?"라며 '1만 원짜리 콜'을 수행하면 업체가 가져가는 수수료 등을 제외하고 5000원도 남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1만 원짜리 콜'을 수행하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이를 수행해야 하는 조건이 있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리 운전기사들도 많은 플랫폼 노동자들과 함께 작년에 최저임금 투쟁이 있었을 때 '최저임금 보상해 달라'라고 요구했지만, '플랫폼 노동자는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최저임금 적용대상자가 아니다'라는 얘기만 돌아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더해 "여성 기사들이 콜을 잡으면 '남성 전용 콜'이라며 배차를 바로 빼버리거나 60대 이상 기사들이 콜을 잡으면 설명도 없이 빼버리는" 식으로 차별이 만연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증언했다.
이 씨는 "기사들은 모멸감에 빠져서 노동조합에 연락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럴 때 노동조합이 자료를 수집해 문제 제기를 하면 상황이 달라진다며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배달 라이더 구교현 씨(공공운수노조 라이더유니온지부 위원장)는 "배달료 2500원이 1초 후에 2600원이 되기도 하고 3000원이 되기도 한다"며 "거의 코인 수준"이라는 말로 업체의 횡포를 고발했다.
구 씨는 고객이 취소한 콜, "귀책 사유가 노동자에게 있지 않은 경우에도 기준 없이 그냥 합의된 금액을 지급하겠다"며 통상 3000원 정도를 지급하더니, "1500원으로 약관을 바꾸고서는 '이 약관에 동의하라'고 나오는데 동의를 안 할 수가 없다. 동의를 안 하면 일을 못한다. 콜을 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실 강요다. ('동의'는) 강요된 것을 확인할 거냐? 말 거냐? 이런 정도의 선택이다. 또 언제 0원이 될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구 씨는 또 회사 측의 무한경쟁 유발 사례를 소개했다. 그는 "최근 프로모션(일종의 보너스)에서 저는 2만 원짜리를 받았는데, 옆 라이더는 1만5000원짜리를 받았다. 기준이 뭔냐? 모른다. 알 수가 없다"며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보너스를 주는 게 아니라 거꾸로다. 새로 들어온 라이더들한테 (보너스를) 준다. '더 열심히 하면 좋은 일이 일어날 거야' 이런 방식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어 지난 2022년 1월 적용된 고용보험에서 추가 보장된 '출산 전후 급여' 항목을 언급하며 손에 꼽는 여성 라이더를 위한 생색내기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보험 설계사 오세중(사무금용서비스노조 보험설계사지부 지부장) 씨는 지난 2020년 12월 정부로부터 '법내 노조'를 인정받은 뒤 한화생명에 처음으로 노조가 만들어졌고, 삼성화재에서도 설계사 노조가 정규직 노조에 편입됐으며, KB금융그룹 보험판매자회사인 KB라이프파트너스 노조와 우체국FC노조 등이 결성돼 약 1만 명 정도가 조직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보험 설계사는 개인사업자 형태이기 때문에 "근로기준법 상 노조 활동 보장을 받지 못하는" 노조도 있을 뿐 아니라 보험 설계사의 잦은 사직과 이직으로 인한 업무 인수인계 따른 비용, 보통 7년 이내면 끝이 나는 보험 설계사 몫의 '계약 관리 비용' 이후 관리 비용 등 일체의 수당이 주어지지 않아 도입하게 된 '1일 1만 원'과 같은 활동 지원비도 천차만별이라고 했다.
22년 차 학습지 교사인 오세영 씨(전국학습지노조 재능지부 조합원)는 "지난 20여 년간 학습지 노동자의 요구는 노조할 권리 보장, 단체 교섭 쟁취"였는데 2022년과 23년에 걸쳐 이 같은 권리가 인정되고 난 후에도 노동조합이 해야 하는 일이 많다며 △ 코로나19 이후 늘어난 온라인 교사에 대한 산재고용보험 적용 문제, △ 업무에 필수가 된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 구입 비용 및 교통비 지원, △ 퇴직금과 국민연금과 같은 사회보장제도 등을 예로 들었다.
오 씨는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근 20년 동안 투쟁해서 만든 내용을 모아서 임단협을 시작하려고 한다"며 "우리가 같이 손을 잡고 함께 건강하고 안전한 세상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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