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가족이 너무 말살됐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정말 많은 노력 끝에 결국 반쪽짜리 선고라도 나왔습니다."(기자회견에 참석한 피해자의 발언)
지난 1월 11일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한 SK케미칼, 애경, 이마트의 임직원에 대한 항소심에서는 무죄를 선고한 1심과 달리 유죄가 선고됐다. 1994년 처음 출시되어 2023년 말까지 피해신고자 7891명, 사망자 1843명이라는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대규모 화학물질 안전사고인 가습기살균제 참사. 어째서 아직까지 '아픈 몸이 증거'라고 절규하는 피해자가 수긍할 수 있는 온전한 선고는 발표되지 못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기업과 정부가 참사의 정치적, 윤리적 책임을 과학적 불확실성을 다투는 재판으로 돌려 탈정치화하는데 공모하기 때문이다. 먼저 재판과정에서 계속 지적되었다시피, 기업측 변호인단은 과학연구와 사법적 판단의 관점의 차이를 이용해 원인 물질과 결과 간의 100% 인과성을 답하지 않는 과학의 언어를 증거능력 부재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학계 전문가들은 가습기 살균제 성분노출과 건강피해 사이의 인과 관계를 증명하는 뚜렷한 방향성이 존재하며, 연구결과들은 기업의 책임을 증명하는데 충분한 과학적 근거라고 강조했다(관련기사). 정말 대형로펌 변호인단은 이론적 일반화의 제한적 검토라는 개별 연구의 성찰성이 자연과학연구의 인식론과 방법임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하였을까? 이 보편적인 과학연구의 방법론을 애써 문제시하고 무력한 것으로 폄하한 본래 목적은 기업의 책임회피를 위해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실 재판에서 다뤄야 할 쟁점은 가습기 살균제 성분물질에 대한 과학지식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상품화가 가능했던 조건은 무엇이며, 그로 인한 피해는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에 대해서이다.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져 있다시피, 제조사 SK는 흡입독성시험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상품을 출시했고, 가습기 메이트 성분의 물질안전보건자료를 애경에 넘기면서 물질의 안전성을 의심할 수 있는 내용을 삭제했다. 기업이 독성물질에 대한 안전성을 확보하지도 않은 채로 상품화하고 유통시킨 것이 드러났는데, 이 과학적 불확실성의 악용은 왜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는가? 오히려 자본의 맹목적 이윤추구 행태를 은폐하기 위하여 사법제도라는 사회적 질서를 남용하고, 피해자들과 연구자들을 우롱한 기업과 변호인단의 행태는 혹독한 비난과 가중처벌을 받아 마땅하다.
또한 이렇게 재판이 지연되고 쟁점이 흐려지면 기업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제대로 하지 않고, 시민의 안전과 건강을 보호하는데 실패한 정부 기관의 무능력과 책무성 소홀을 가리는 효과도 있다.
정부는 가습기 살균제의 위험이 공식적으로 밝혀진 2011년에도 부처 간 업무소관을 미루고 법적 근거 미비를 들어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2012년부터 피해자와 시민단체가 수십 차례 고소고발을 했지만 2016년에야 관련기업 100여개 중 옥시 등 8곳만 기소했고, 10여개 정부부처에 대해선 수사계획만 세우고 종결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죽어가고 있음에도, 정부는 그 어떤 기대되는 '정상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국가는 시민사회와 국회의 요구에 따라 국정조사나, 화학물질의 유해성 심사를 의무화하는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률'(화평법)과 유해화학물질 취급기준을 강화하는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제정, 그리고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운영 등 무엇인가 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오늘에 이르도록 피해자와 가해 기업이 책임공방을 벌이는 사법의 시간을 방조하며 참사의 회복을 지체시키고 있다. 이것은 시민의 생명과 안전에 관심이 없다는 '가짜 정치'를 자인한 셈이다.
결국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대책으로 마련된 화평법과 화관법의 옹호자였던 환경부는 이제 와선 두 법이 "기업의 부담을 가중시켰다"며 '킬러규제'라 지목하고(2023년 7월), 지난 1월 9일 국회에서 두 법의 규제완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점점 더 많은 화학물질을 제조·활용하게 되고 과학전문지식의 역할이 커질 텐데, 신규화학물질과 기술의 안전성 검증과 기업에 대한 감시와 통제의 책임을 정부가 제대로 수행하지 않을 경우 그 피해는 누가 입게 될 것인가?
당장 화관법과 화평법의 규제완화로 인해, 우리나라가 관련 기업들의 신규화학물질의 테스트베드로 전락할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바로 가기 : <환경운동연합> 2023년 12월 29일 자 '[논평] 화평법의 후퇴를 규탄한다') 뿐만 아니라, 작년 12월 국회 보건복지위 전체회의를 통과한 '첨단재생바이오법' 개정안의 핵심내용 중 하나는 임상시험이나 신의료기술평가도 없는 무허가 세포·유전자제품을 환자에게 치료명목으로 사용하도록 허가하는 것이었다. 신약과 신의료기술에 대한 시장 선진입-후평가 제도는 '불필요한 행정절차의 간소화'가 아니라, 환자들을 실험대상으로 삼아 기업이 경제활동을 돕는 절차의 법제화일 뿐이다.
이렇게 행동하는 국가의 관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화학물질 규제개선과 완화 효과가 8조 8000억 원이라고 하거나(2023.8.), 바이오헬스 수출 2배 달성이나 연매출 1조원 이상의 혁신신약을 창출한다는(2023.12) 등의 경제적 가상(!) 효과이다. 국가는 스스로 기업의 대변인 아니 경제권력의 일원이 되었다. 수 천명의 피해자가 신고했지만, 기재부는 구상권을 집행할 수 있는 범위에서 피해자를 한정하고 피해자 보상을 위해 국가의 재정부담을 추가하지 않으려고 한다. 국가행위의 기준마저도 경제적 이익과 손해에 있다면, 이제 규제 혹은 규제완화의 수혜자는 누가 될 것인지 명백하다.
"사람들이 죽고 사라지길 기다리는 것 같다."
가습기 살균제 제조·판매사에 대한 민사배상 청구소송이 지연되고 있는 상황을 보며, 한 피해자가 한 말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반도체 직업병 피해사례나 휴대폰 제조공장 메탄올 실명 사고 외에도, 석면 베이비 파우더, 라돈 매트리스 등 생활화학제품사고와 각종 폭발·화재·누출 등 환경화학물질사고를 경험하였다. 위험물질들이 인체에 침습적으로 작용하여 어떤 급성 혹은 장기적인 전신피해 질환을 야기할지 충분히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기업과 국가가, 전문가와 사법부가 동맹하여 자신들의 안전과 이익만을 추구할 경우 피해자와 시민들의 생명과 안전은 실험실의 샘플에 불과하다. 저 피해자의 말은 곧 우리 모두의 운명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 다시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더 많은 시민참여와 공공성 강화 전략을 논의해야 한다. 과학기술학(STS)에 따르면, '과학은 안전성 논쟁 자체에 대답할 수 없으며, 과학기술이 초래한 문제들에 대한 결정은 정치적으로 해결될 뿐'이다. 과학의 불확실성 수용에 대한 논의와 기술의 쓰임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없다면 첨단과학기술이 등장할수록,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시민들과 유리된 기술주의적 의사결정 그리고 문제발생시 그 책임을 모면하려는 긴 사법적 과정이 반복될 것은 자명하다.
다행히 우리에겐 재난 피해의 과학적 근거의 공백과 제도적 허점을 메꾸는 과학자들과 시민들의 연대가 새로운 대항지식을 창출하고 법제도를 구축하여 피해자와 시민들의 삶을 지켜온 경험이 있다.(☞ 바로 가기 : 북토크 <재난에 맞서는 과학>) 기존의 권력과 불평등에 도전하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정책결정을 위해 요청되는 과학이 무엇인지 묻는 지식생산의 민주화, 시민들의 '살 권리'와 '알 권리'를 요구하는 집단적 건강사회운동을 우리는 더 강력하게 이어가야 한다.
2심에서 각각 금고 4년형을 받은 SK와 애경 전 대표는 모두 상고장을 제출한 상태이다. 피해자들에게 온전한 선고를 돌려줄 때까지 가습기 살균제 참사 해결을 위한 연대도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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