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 irony. 초기 그리스 희극의 전형적인 인물 에이런(Eiron)에서 유래한 말이다. 약하지만 영악한 에이런은 그 반대의 전형적 인물로 등장하는 강하고 허풍이 센 알라존(alazon)에 번번이 승리한다. 문학적 장치로서 아이러니는 우리가 예상하고 기대한 것과 반대의 일이 발생했을 때를 말한다. 이를테면 오이디프스가 숙명을 피하려 한 행동들이, 그 비극적 숙명을 완성시키게 되는 것처럼. 언어적 아이러니는 말장난에 가까울 수 있지만, 상황적 아이러니는 인간의 삶 자체에 내재한 불완전성을 폭로해 인생의 의미를 되새기게도 한다. 영화 <기생충>은 아이러니로 점철된 훌륭한 스릴러 영화였다.
희극이나 비극에서, 등장 인물이 실제 상황과 맞지 않는 행동을 하고, 앞으로 다가올 운명과 반대되는 무언가를 기대할 때, 그걸 지켜보는 관객은 '아이러니'를 느낀다. 관객의 기대와 등장인물의 행동 사이의 괴리가 클수록 아이러니는 더욱 강렬해진다.
정치는 때때로 연극의 무대와 같다. 유권자는 정치인의 행위를 보면서 좋아요를 누르거나, 싫어요를 눌러 극에 개입하는데, 간혹 이 극의 결말을 직감적으로 포착할 때가 있다. 그리하여 아이러니의 '빌드업'은 시작되고 관객은 운명의 소용돌이에 포획된 주인공의 행위를 평가하고 비판하고 걱정하며 이 난감한 현실 정치극의 결말을 숨죽이며 기다린다.
한동훈 비대위인가? 한동훈 선대위인가?
윤석열식 정치가 다시 돌아왔다. 앞선 시즌 1에서 윤석열 정치의 두 축은 비정치의 정치, 그리고 사정 기관이었다. 기성 정치와의 대립 구도를 만들어 여의도 문법을 파괴하는 무규칙 정치에, 검찰과 경찰, 감사원, 국민권익위 등을 총동원한 사정 정국 조성을 통해 정국을 운영해 왔다. 시즌2에서는 윤 대통령의 충직한 부하 출신인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등장한다. '무규칙 정치'에 세련미를 더했고, 문재인 정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사건 재수사, 문재인의 '전 사위' 비위 수사, 문재인의 배우자 김정숙 씨의 2018년 인도 타지마할 순방 의혹을 새로 들추기 시작했다. 물론 이미 '범죄자'로 규정한 야당 대표에 대한 수사와 재판은 그대로 간다.
문제는 '관객'들이 시즌2에서 결정적으로 달라진 환경을 포착했다는 점이다. 대통령 가족의 비리 의혹이다. 이 정치극의 주인공들은 달라진 여론지형 속에서 익숙한 역할극을 또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극은 절정(4월 총선)을 향해 가면서 긴장감 또한 고조되고 있는 중이다.
두 축 가운데 첫번째, 당의 상황을 보자. 여권 핵심부가 생각하는 '비상'의 의미는 조금 다른 것 같다.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회 체제가 출범한 직접적 이유는 지난 10월 재보선 패배 여파였고, 본질적 이유는 대통령 주도의 국정 운영이 유권자 기대에 못 미쳤다는 판단 때문이다. 한동훈호(號)가 야심차게 출항한지 20여일이 지난 지금, 배의 방향타는 기대한 목적지를 향하지 않는 것 같다. 비대위 출범 후 한 일이라곤, 한동훈 위원장의 전국 투어와 팬 미팅, 그리고 한동훈 위원장이 셀카 '찍는' 모습이 '찍힌' 액자 구조 같은 기이한 홍보.보도 사진들 뿐이다.
한동훈 위원장의 행보만 놓고 보면 국민의힘은 지금 '비상 상황'이라기보단, 대선 선대위 체제에 더 가깝다. 2012년 박근혜 비대위가 본격 출범하며 한 일은 대통령실의 당무 개입 차단과 정강정책 재정비, 당명 교체와 홍보 전략 수립이었다. 그러나 한동훈 비대위가 한 일은 대통령 가족 '방탄'과, 본인 인지도 쌓기, 그리고 대야 선전포고였다. 그의 첫 일성은 이렇게 시작한다.
"어릴 때, 곤란하고 싫었던 게 '나중에 뭐가 되고 싶으냐, 장래희망이 뭐냐'라는 학기초마다 반복되던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뭐가 되고 싶은게 없었거든요. 대신, 하고 싶은 게 참 많았습니다."
엄중한 비상 시기에 등판한 한 위원장은 본인이 "하고 싶은 게 참 많았다"는 개인적 추억을 회상한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비록 소수당이지만 대선에서 기적적으로 승리하여 대통령을 보유한, 정책의 집행을 맡은 정부여당입니다"라며 자부심을 가지라 주문하고 "무기력 속에 안주하지 맙시다"라고 당의 '동료 시민들'을 독려한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그는 비대위원 섭외해 지도부를 꾸린지 3주만에 비대위원 한명을 마포을에 출마시켰다. 당 개혁의 칼자루를 쥔 사람들을 '공천 예비군'으로 만들어버렸고 비대위는 '공천 징검다리'로 격하됐다. 비상 시국이라며 비대위원들이 '공천 파티'를 하고 있으면, 수도권 험지에서 절치부심 밭을 갈아오던 '동료 당원들'은 잠자코 있을까? 벌써 당 내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비상 상황에서 기대되는 장면은 이런 것들이 아니었지만, '정치 불신' 여론을 등에 업고 당내 '공정과 상식'을 무시하는 즉흥적 결단들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이런 방식은 윤석열 대통령이 해 왔던 전형적인 정치 행태다. 토질이 바뀌었는데 파종법은 그대로다. 그리고 풍년을 기다린다. 윤석열식 '일상 정치'가 한동훈식 '비상 정치'로 대체됐는데, 대중들의 반응은 냉랭하다.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율은 전주보다 1%포인트 내린 32%,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와 동일한 36%였다. 반면 한동훈 위원장의 지지율은 지난해 6월 4%로 첫 등장한 이래, 지난주 22%로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 한동훈의 지지율만 올랐다. 그나마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힘든 게, 확장성의 한계에 갖혀버린 듯한 모습 때문이다. 한동훈의 아이러니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윤 대통령을 대체할 수 있다는 기대감과 그가 결국 대통령의 부하라는 현실 사이의 괴리.
시즌2로 돌아온 '윤석열 정치'…그런데 김건희는요?
나머지 한 축은 사정정국이다. 야당 대표 수사에 집중하면서,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감사원 전방위 감사, 문재인 정부 블랙리스트, 탈원전 수사를 앞세웠던 시즌1을 돌이켜보면, 의외로 '사정 정국'은 크게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게 통했으면 비상대책위원회같은 건 출범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2024년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새로운 사정정국이 펼쳐지고 있다. 경찰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내부 고발자'를 색출하려 압수수색에 돌입하고, 검찰은 문재인의 전 사위, 문재인의 배우자(김정숙), 문재인의 비서실장(임종석), 문재인의 법무부장관(조국)을 겨냥한 수사에 돌입했다. 대통령에 비판적인 언론을 명예훼손을 걸어 압수수색을 남발한다.
이 지점에서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다. 앞선 전 정권 수사 때는 '적폐 청산'이라는 명분이라도 있었다. 그땐 '김건희 디올백 수수 의혹'도 없었고, '김건희 주가 조작 의혹 특검'이 여론의 지지를 받지도 않았던 상황이다. 하지만 여론지형이 달라졌다. '내로남불' 프레임에 깊숙히 발을 담근 상황에서 전 정권에 대한 전방위 사정은 "김건희는요?"라는 질문을 계속 소환할 것이다. 이를테면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부인 김혜경 씨에 대한 '법카 수사'가 진행되면 될수록, 정확히 그 대척점에 있는 '현 영부인'을 향한 질문들은 점점 커지게 될 것이다. 검찰이 수사를 할수록 '김건희 리스크'가 더 주목받는 상황. 관객(유권자)은 이런 아이러니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이명박 정권의 노무현에 대한 '기획 수사'는 노무현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사태로 귀결됐다. 그러면서 국민의 시선을 이상득을 비롯한 MB의 가족, 측근 비리 의혹을 다루는 검찰의 행태에 주목시켰다. 당시 '조선제일검'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이명박 정부 때 중수부 과장으로, 특수부장으로 3년간 특별수사를 했는데, 대통령 측근과 형 이런 분들을 구속할 때 별 관여가 없었던 것으로 쿨하게 처리했던 기억이 난다."(2019년 10월 대검찰청 국정조사에서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 노무현에 대한 수사를 지켜본 사람들은 '이명박은 깨끗한가'라는 질문을 키웠고, 결국 이명박은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 정의로운 검사에 의해 결국 '쿨'하게 구속된다.
관객은 냉정하다. 문재인 정부의 비리 의혹을 수사하길 원하는만큼, 윤석열 정부의 비리 의혹에도 관심이 많다. 그리고 전자에 대한 칼날이 거칠수록, 후자에 대한 의문점도 커져간다.
한동훈 위원장이 정치는 게임이 아니라고 했던가? 맞다. 정치는 상대를 죽이는 '게임'이 아니라, 자신의 숙명을 향해 몸부림치며 돌진하는 '연극'과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현실 정치극에서 등장 인물이 실제 상황과 맞지 않는 행동을 하고, 앞으로 다가올 운명과 반대되는 무언가를 기대할 때, 그걸 지켜보는 관객은 '아이러니'를 느낀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반전'을 원한다면, 지금까지 해 온 '익숙한 길'에서 이탈해야 한다. 사람이 모이면 그게 길이 될 수 있지만, 그 길 끝에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거라 장담할 순 없기 때문이다.
(칼럼에 인용된 한국한국 갤럽의 대통령 지지율 조사는 16~18일 1002명 대상 무선전화 전화면접 방식이고 응답률은 13.8%, 표본오차 95% 신뢰 수준에 ±3.1%포인트였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지지율 조사는 9일~11일 1002명 대상 무선전화 전화면접 방식이고, 응답률은 14.3%, 표본오차는 95% 신뢰 수준에 ±3.1%포인트였다.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