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청룡의 해가 시작되었고, 아시아 국가들은 일제히 각종 '청룡 에디션' 제품을 내놓았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이지만 용은 이처럼 아직까지도 우리의 삶에 깊숙이 뿌리 내려 환영받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수천 년을 기다려 승천하여 용이 된 이무기, 나라와 불법을 지키는 호국용, 호법용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발견된다. 또 다른 공통 신화는 바로 물의 신으로서의 용이다.
중국 신화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책 <산해경>에는 여러 용이 등장하는데, 그중 하나는 비를 부르는 용, 응룡(應龍)이다. 응룡은 황제를 도와 치우를 물리치는 공을 세웠는데, 전쟁이 끝난 후 다시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남쪽 지역으로 가서 살았다. 중국 남방 지역에 비가 많이 내리는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전한다.
<예기>에서도 용은 물의 속성을 지닌 존재로 나타난다. <예기>는 '기린, 봉황, 거북, 용을 일러 사령이라 한다. 그렇기에 용을 가축으로 삼으면 물고기들이 놀라 도망치지 않을 것이고, 봉황을 가축으로 삼으면 새들이 놀라 날아가지 않을 것이며, 기린을 가축으로 삼으면 발굽 달린 동물들이 놀라 떠나가지 않을 것이며, 거북을 가축으로 삼으면 인정을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기록하는데, 여기서 용은 물고기, 즉 수중세계에 사는 모든 존재의 으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용은 물의 신으로, 화재 방지를 목적으로 용 형상을 많이 활용했다. 1997년 경복궁 경회루 연못 준설 작업을 하던 중 경회루 북쪽 하향정 앞 연못 바닥에서 용 조형물이 출토됐다. 고종 2년(1865)에 쓰인 <경회루전도>에 따르면 화재를 막고자 매립한 것이었다.
또 2001년 경복궁 근정전 중수 공사 때도 천장에서 여러 종류의 용이 발견됐는데, 모두 화재 방지용 부적에 해당한다. 하나는 수자문지류(水字紋紙類)로 커다랗게 쓴 물 수(水)자 안을 용 용(龍)자로 채웠고, 다른 하나는 네 다리를 놀려 활기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용을 그린 용문지류(龍紋紙類)이다.
전통적인 목조 가옥을 지을 때 대들보를 들어 올리는 것을 상량이라 하는데, 대들보에는 상량 날짜와 집주인의 이름을 적고 그 양 끝에 용 용자와 거북 귀(龜)자를 새겼다. 모두 물의 기운을 가진 동물들이 집을 화마로부터 지켜주길 바라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풍속은 중국에도 있는데, 특히 바이족은 붉은 줄로 길어 온 우물물로 대들보의 좌우에 찍어 바른다. 이 물은 동해 용왕의 물을 상징하며 용의 머리인 대들보 왼쪽과 꼬리인 오른쪽 양 끝에 물을 찍어 바름으로써 한 마리의 용을 완성하는 행위이다. 그렇게 하여 사람들은 물의 신 용이 지닌 힘을 빌려 집을 지키고자 했다.
베트남 신화 전설집인 <영남척괴열전>(嶺南摭怪列傳)은 민족 기원, 국가 기원 신화를 기록한 베트남 최초의 문헌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베트남의 대표적인 민족 킨족(京族)의 건국 신화를 통해 용과 물의 관련성을 확인할 수 있다.
베트남 남쪽 지역을 다스린 낀 즈엉 브엉(涇陽王)은 수중세계에 드나들 수 있어 용왕 동 딘 꿘(洞庭君)의 딸 턴 롱(神龍)과 결혼하여 락 롱 꿘(雒龍君)을 낳았다. 농사짓는 법과 누에치는 법을 알려주고 또 사회적 질서를 세운 락 롱 꿘은 때때로 바다로 돌아갔지만, 백성들이 문제가 있을 때 그의 이름을 부르면 달려와 해결해 주곤 했다.
락 롱 꿘은 이복형제 데 응이(帝宜)의 손녀 어우 꺼(嫗姬)와 결혼하여 백 명의 아들을 낳았다. 자신을 따라 수중세계에 가겠다는 어우 꺼에게 락 롱 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용의 자손으로 물의 종족의 우두머리이고 당신은 신선의 자손으로 지상의 사람이니, 비록 음양의 기운이 합해져 자식이 태어나기는 했으나, 물과 불처럼 상극이요 종류가 서로 다른지라 오래 함께 살기는 어렵소. 그러니 이제 서로 헤어집시다.
50명의 아이는 내가 수부로 데리고 가 각처를 나누어 다스리게 할 테니, 당신은 나머지 50명과 함께 지상에 남아 자식들로 하여금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게 하시오. 산에 있든 물속에 있든 무슨 일이 생기면 서로 알리고 관계를 끊지 말도록 합시다."
그렇게 락 롱 꿘은 50명의 자식을 데리고 수중세계로 떠나고, 어우 꺼는 남은 나머지 50명의 아들 중 가장 강한 아이를 임금으로 삼아 부옹(雄王)에 봉하고, 국호를 반랑(文郎)이라 했다. 숲에 사는 백성들이 강에서 물고기를 잡다가 교룡에게 해를 입자, 부옹은 교룡은 다른 종족을 싫어하기 때문에 산의 종족인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이라며 몸에 먹으로 락 롱 꿘의 모습과 수중 괴물의 형상을 새기게 했다. 그 이후 백성들은 더 이상 교룡에 물리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의 민담>에도 물과 관련된 용 이야기가 여럿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송영숙이 소개한 <용신의 각시>(龍神樣のお嫁さん)에서도 용은 비를 부르는 영험한 존재로 나타난다.
옛날 어느 마을에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온갖 방도를 써도 소용이 없자 촌장은 용신에게 기도를 올리며 만일 비를 내려준다면 딸이라도 바치겠다고 읊조렸다. 그러자 갑자기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울리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마을 사람들은 다시 농사를 지어 가을에는 쌀도 풍성히 수확했다. 그러나 촌장은 용신과의 약속을 가족들에게 비밀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어느 날 촌장의 집에 한 젊은이가 찾아와 며칠 동안 묵으면서 딸과 친해지게 되더니, 마침내 두 사람은 혼인하게 되었다. 결혼식 날 젊은이는 딸에게 자신이 용신이라고 정체를 밝히며, 이전에 촌장이 약속한 대로 그의 딸을 데리러 왔다고 말하면서 딸을 감싸 안고 눈 깜빡할 사이에 구름을 부르더니 비를 뿌리며 승천했다. 이처럼 물의 신 용과 관련된 신화, 전설은 아시아 여러 국가, 특히 전통적으로 물이 중요한 농경 사회였던 국가들이 공유하고 있다.
용의 기원에 관해 일부 연구자들은 뱀이나 도마뱀과 같은 동물에서 유래했다고 보고, 어떤 연구자들은 별자리가 그 뿌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전통적인 항성 체계에서 적도 주변에는 이십팔수(二十八宿) 별자리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이는 다시 사궁(四宫)으로 나뉘어 각각 일곱 개의 별이 배치된다. 이 별들이 만들어내는 모양이 바로 사신(四神), 즉 용, 호랑이, 주작, 거북이라는 것이다.
특히 동쪽에 용, 서쪽에 호랑이가 있다는 관념은 매우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1987년 허난성(河南省) 푸양현(僕陽縣)에서 공업용수와 생활용수 공급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발견된 시쉐이퍼(西水坡) 45호 묘에는 신장 1.79m 성인 남성 유골이 있었다. 특이하게도 그의 동쪽에는 용, 서쪽에는 호랑이 그리고 발밑에는 북두칠성이 조개껍데기로 만들어져 배치되어 있었다.
이는 기원전 5000년에서 기원전 3000년 무렵까지 존속했던 양사오(仰韶) 문화의 일부로, 중국 학계는 이 조개껍질 용이 약 6500년 정도의 역사가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한때 중화제일룡(中華第一龍)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네이멍구(內蒙古) 츠펑시(赤峰市) 웡니우터치(翁牛特旗)의 한 농가에서 보관해 온 C자형 옥기가 1984년에 용이라고 학계의 판정을 받으면서 그 타이틀을 뺏겼다.
용으로 알려진 이 옥기는 기원전 4700년에 시작하여 기원전 3000년경에 소멸한 것으로 추정되는 훙산(紅山) 문화의 유물이다. 훙산문화는 만주의 서쪽 요서를 흐르는 요하를 아우르며 북으로 네이멍구 초원지대, 남으로 발해만까지의 광대한 영역에 걸쳐 나타난다. 중국은 이를 '중화문명'의 원류로 이해하고, 한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은 이를 '동북아 문명의 요람이자 집합체'로 접근해왔다. 여기서 '중국 신화'에 관한 입장 차이가 드러난다.
보통 용과 같이 지금의 중국 경내에서 발원한 신화를 중화인민공화국의 소유로 보고, 아시아 여러 국가에 공통된 신화가 존재하는 현상을 '중화문명 전파-주변국 수용'의 도식으로 설명해왔다.
그러나 신화가 형성되던 시대의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과 동일한 정체성을 지닌 집단도 아니며 지리적 영역 또한 같지 않다. 중국 신화는 다양한 역사적 주체들이 그 형성과 발전에 참여해 온 결과물이다.
뿐만 아니라 '신화'라는 개념 그리고 '중국 신화'나 '한국 신화'와 같이 국가 단위의 신화 분류법은 19세기에서야 형성되었다. 그 이전에 아시아에는 신화라는 개념도 어휘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 독점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일은 더욱이 없었다.
서양 서적의 유입과 함께 아시아에 등장한 'myth'라는 낯선 개념을 일본 사상가 이노우에 데츠지로(井上哲次郎)가 처음으로 '신화'라는 단어로 번역했다. 그는 1895년 발표한 <일본 문학의 과거와 미래>에서 일본 신화는 중국, 조선, 인도의 신화와는 확연히 다르며, 그 우수함은 일리아드나 오디세이에 비견된다고 주장했다.
그 후 근대 일본의 신화학은 국민국가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단일 민족의 신성한 기원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갔고, 이는 중국과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총과 군함을 앞세워 밀려드는 외세의 위협 앞에 아시아 국가들은 전에 없던 국민국가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 신화를 끌어왔고 또 그 '순수성'을 주장함으로써 강력한 증거를 만들었다.
그 결과 오랜 세월 공유해왔던 중국에서 발원한 신화는 '순수한 중국 신화'로 재개념화되었고, 한편 '순수한 한국 신화'의 범주에는 이를 수용할 공간이 줄어들었다. 최근 몇 년간 한중 양국이 중국에서 발원한 신화 또는 다른 전통문화의 소유권을 두고 갈등을 빚어 온 것에는 이 같은 역사가 있다.
그러나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공통의 관심사를 찾아 대화를 시도하는 것처럼, 타인과 나의 공통성은 오히려 교류의 계기를 제공한다. 12간지 중 유일한 신화적 존재인 청룡이 나타난 올해에는 양국의 문화적, 신화적 공통성이 갈등보다는 대화의 물꼬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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