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 전 국무총리가 24년 간 몸 담았던 더불어민주당을 떠나 새로운 정치에 나서겠다며 고별을 선언했다. 아울러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힘을 모아야 한다"면서 전날 탈당을 선언한 '원칙과상식', 나아가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 등과 연합해 제3지대 '빅텐트'를 구축하겠다는 입장을 공식화했다.
이 전 총리는 11일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탈당과 동시에 신당 창당의 뜻을 밝혔다.
이 전 총리는 "오늘 저는 24년 동안 몸담았던 민주당을 벗어나, 새로운 위치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대한민국에 봉사하는, 새로운 길에 나서기로 했다"며 "저에게 '마음의 집'이었던 민주당을 떠난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다. 오랫동안 고민하며 망설였다"고 했다.
그는 현재의 민주당에 대해 "김대중과 노무현의 정신과 가치와 품격은 사라지고, 폭력적이고 저급한 언동이 횡행하는 '1인 정당' '방탄 정당'"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민주당은 저를 포함한 오랜 당원들에게 이미 '낯선 집'이 됐다"며 "당내 비판자와 저의 지지자들은 2년 동안 전국에서 '수박'으로 모멸 받고, '처단'의 대상으로 공격 받았다. 포용과 통합의 김대중 정신은 실종됐다"고 했다.
이 전 총리는 과거 당 대표 재임 시절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민주당의 피폐에는 저의 책임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서도 "특히 민주당 소속 시장의 잘못으로 2021년에 치러진 서울시장, 부산시장 보궐선거에 기존 당헌을 고쳐가며 후보자를 낸 것은 제가 민주당 대표로 일하면서 저지른 크나큰 실수였다"고 말했다.
이어 "2020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공동선대위원장으로 일하면서 민주당 지도부의 위성정당 허용 결정에 제가 동의한 것도 부끄럽다"면서 "저의 그런 잘못을 후회하면서 국민과 당원 여러분께 사과드린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저는 지금의 민주당이 잃어버린 민주당 본래의 정신과 가치와 품격을 지키고 실현하기 위해 새로운 길에 나선다"고 했다.
이 전 총리는 현 정치 상황에 대해 "대한민국은 '검찰독재'와 '방탄'의 수렁에서 헤매고 있다"면서 "여야는 그런 적대적 공생관계로 국가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후목불가조(朽木不可雕), 썩은 나무로는 조각을 할 수 없다는 공자의 말씀처럼, 지금의 정치로는 대한민국을 살릴 수 없다"면서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하려면 정치 구조부터 바꿔야 한다"고 했다.
이어 "서로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혐오와 증오의 양극 정치를 끝내지 않고는, 국민이 마음 편히 사실 수 없다"면서 "정치를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바꿔야 한다"고 했다.
이 전 총리는 정치 개혁 과제로 다당제 실현과 분권형 대통령제 도입을 제안했다. 그는 분권형 대통령제 도입을 주장하는 이유에 대해 "현재의 대통령제는 검증되지 않은 인물이 집중된 최고 권력을 잡을 수도 있도록 돼 있다. 그 폐해를 우리는 진저리치며 경험하고 있다"며 "현행 제도를 고쳐, 대통령 후보를 철저히 검증하고 대통령의 권력을 최대한 분산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특권 없는 정치'와 '성역 없는 법치'를 약속하는 한편, R&D 지원과 규제 혁파, '중부담-중복지' 복지 시스템, 한미 동맹을 기반으로 한 주변국과의 우호적 관계 강화 등 구상도 밝혔다.
이 전 총리는 "그 길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힘을 모아야 한다"면서 "저는 우선 민주당에서 혁신을 위해 노력하셨던 의원 모임 '원칙과 상식'의 동지들과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어느 분야에서든 착하고 바르게 살아온 사람들이 그 길에 함께해 주시기를 바란다"며 "특히 청년과 전문직의 참여가 필요하다. 그런 분들께서 정치 참여의 기회를 얻으시도록 돕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제가 무엇이 되겠다는 마음에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최근 여러 자리에서 '허드렛물 노릇'을 하겠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이 전 총리는 마지막으로 "김대중 대통령은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말씀하셨다"며 "저는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가 대한민국을 더는 망가뜨리지 못하도록 싸우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이 전 총리는 기자회견을 마친 뒤 기자들과 만나 이날 자신의 고별 기자회견에 앞서 당 지도부와 130여 명의 소속 의원들이 탈당 반대 입장을 낸 것과 관련해 "민주당이 국민 신뢰를 충분히 받지 못하는 것은 단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변화하지 않아서"라며 "오늘 기자회견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그런 말을 하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런 노력을 평소 당 변화를 위해 썼다면 어땟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제가 그분들의 처지였다면 훨씬 더 점잖고 우아하게 말할 것같은데 아쉬움이 있다"고도 했다.
'원칙과상식'과의 신당 창당 추진 계획에 대해선 "그분들과는 협력하게 될 것이라고 했고, 어떻게 협력할 것인가. 또는 어떤 지점에서 함께할 것인가 하는 것은 협의가 진행되고 있다"며 구체적 답변은 피했다.
원칙과상식의 탈당 기자회견 직전 민주당 잔류를 택한 윤영찬 의원에 대해선 "윤 의원께서 굉장히 어려웠을 텐데 그럼에도 부족한 저를 도와주셨던 데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면서, "윤 의원의 고민은 (윤 의원 지역구 경쟁자인) 현모 씨 문제가 나오기 전부터 있었다. 그래서 공천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규정이라고 생각한다"고 세간의 의혹을 일축했다.
당내 친(親)이낙연계 의원들의 신당 합류 가능성에 대해선 "감히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 현역 정치인은 고려해야 할 일도 많고 정리할 일도 복잡하고 제3자가 말하는 것은 좋지 않다"며 말을 아꼈다.
역시 제3지대 창당을 추진 중인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와의 연대가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에 대해선 "오히려 양당에서 대표까지 지냈기 때문에 그(거대 양당 정치) 폐해를 더 잘 알 수 있다고 볼 수 있다"면서 "반성에 입각한 새로운 정치, 그게 오히려 결실을 맺기 쉽다"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옛날 김대중 대통령은 정반대인 보수 지도자와 연립 정부도 꾸렸다. 아주 보수적이었던 분들을 통일부 장관‧안기부장을 시켰어도 국정을 잘 운영했다"며 "지금 제3지대에서 만날 사람이 김대중 대통령이 만난 그 사람들보다, 디제이피(DJP)연합보다 훨씬 더 가까운 거리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문 전 대통령이 지난 6일 '야권 대통합'을 당부한 데 대해선 "정치가 다시 희망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말씀, 그 말씀은 현재의 정치가 희망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진단"이라며 "저도 똑같다. 현 정치가 국민에 절망을 드리기 때문에 그런 길을 만들어내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제가 하는 게 문 대통령 생각과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해석했다.
이날 이 전 총리가 고별 기자회견을 연 국회 소통관 건물 안팎에는 이 전 총리 지지자들이 결집해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 전 총리는 기자회견이 끝난 후 지지자들과 만나 신당에 대한 성원을 당부했다.
이 전 총리는 서산대사의 한시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을 언급하며 "오늘 내가 걸어가는 발자국은 뒷사람의 길이 될 것이라는 심정으로 새로운 길에 나섰다"며 "많은 증오와 저주의 말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동지 여러분은 흔들리지 마시고 우아함을 잃지 말고 새로운 길에 동행해주시길 바란다"고 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