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 후 나온 메시지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0월 18일 참모들과 회의에서 한 이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마치 선거 패배 결과에 순응하겠다는 말처럼 들리지만, 대통령이 사용한 '늘', '무조건'이라는 수식어는 사실 독선의 수사다.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는 것이 내 생각이니 거기에 토를 달지 말라는 의미다.
"선수는 전광판을 보지 않는다", "지지율 1%가 되도 상관없다"는 윤 대통령식 '마이 웨이'가 "국민"을 주어로 해 자신을 위한 아포리즘으로 재탄생했다. 참모들은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는 명제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대통령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래서 이 명제는 대통령의 '변화의 조짐'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대통령은 변하지 않으리라는 걸 보여주는 말이 된다.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는 말은 검사 특유의 '자기 확신'에 다름 아니다.
혁명을 꿈꿨던 중국의 무정부주의자이자, 좌파 운동에 동조했던 작가 루쉰은 격동하는 중국 근대사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보냈던 인물이다. 그가 가장 혐오한 것은 '아큐'로 대변되는 중국인의 공허한 대국 기질과 변화를 거부하는 무기력함을 정당화하는 중국인들의 태도였다. 새 사상과 과학을 앞세운 서구 열강의 침략 위기가 다가오고 있지만, 결코 본인의 무능함과 오만함,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정신승리법'을 터득해 자신을 스스로 납득시키길 반복하는 것, 그 행태를 탈피하길 바라면서 쓴 루쉰의 대표작이 <아큐정전>이다.
지금 한국의 상황이 그렇다. 일본이 '물 반 컵'을 채우길 원하는 외교를 하면서 '한미일 공조'를 위한 고독한 결단으로 포장한다든지, 잼버리 세계대회를 파행으로 이끌어놓고, 급조한 K팝 콘서트를 무리하게 열어 전세계에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알렸다고 자찬한다. 세계는 RE100의 '재생에너지' 사용이 대세인데, 재생에너지 정책을 전임 정부의 '적폐'로 규정한 대통령은 뜬금없이 CF연합(무탄소연합)을 천명하고 냉소를 자초했다. 최근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에서 한국이 홍보한 CF연합 외신 인용 건수는 겨우 세 건이다. 기후 위기 대응에서 세계의 흐름을 거스르면서도 왠지 모를 당당함에 가득 차 있는 '아큐'다.
부산 엑스포 유치전에서 119대 29의 참담한 결과를 받아들고 즉각 사과하더니(아큐 식으로 하면 "오른 손을 들어 힘껏 자기 뺨을 두 차례 연거푸 때렸다. 얼얼하게 아팠다. 그제서야 그는 마음이 평안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때린 것은 자신이고, 얻어맞은 것은 또 다른 자신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그는 자기가 남을 때린 것 같이-비록 아직도 얼얼하지만-몹시 만족하여 의기양양해 드러누었다."-아큐정전) 태연하게 부산을 방문해 재벌 총수들과 떡볶이 '먹방'을 한다. 시장 상인이 "엑스포 준비하시느라 고생 많이 하셨죠"라고 묻자 "엑스포 전시장 세울 자리에 외국 투자 기업들 많이 들어오게 해서 부산도 발전시킬테니까 걱정하지 마시라"고 답한다. 재계는 "한국의 위상을 알리고 글로벌 네트워크를 강화한 측면에서 부산엑스포 유치전이 값진 자산으로 남았다"고 '정신 승리'를 한다.
외교 정책 실패는 물론이고, 정부 내 '정보 유통'의 적나라한 문제점이 드러났는데 국가안보실장은 국정원장으로 영전하고, 국정상황실장은 정무수석으로, 대변인은 홍보수석으로 줄줄이 승진했다. 장관 임명 3개월 만에 산업통상자원부장관을 차출해 총선에 내보내고, 국민권익위원장을 빼돌려 방송통신위원장에 돌려막기 한 것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장관 후보자들을 봐도 그렇다. 외교 실패 책임을 져야 할 외교부 차관(오영주)을 갑자기 전문성과 무관한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에 발탁한다. 또다른 장관 후보자는 "홍범도의 행적이 우리나라 정체성(면에서) 여러 논란을 야기한다"(강정애 국가보훈부장관 후보자)며 대통령의 '이념 전쟁'을 계승한다.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는 대통령은 그간 해 온 자신의 행동이 국민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하이라이트는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의 상황이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 이후 대통령이 한 일은 당을 차근차근 장악하는 것이었다. 윤핵관을 검핵관으로 대체하는 일이다. 인요한 혁신위를 띄워 '윤핵관'의 2선 후퇴를 종용하더니, 김기현 대표를 사실상 찍어냈다. 그 자리에 자신의 대학 후배이자 직장 부하였던 한동훈 법무부장관을 당 대표(비상대책위원장)로 올렸다. 대통령 "직할 체제(홍준표 대구시장)"의 완성이다. 꼭 1년 전인 올해 초 윤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을 대체한 <조선일보> 단독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한동훈) 당대표는 너무 이르잖은가(웃음). 한 장관과 업무 문제로 통화할 때 '당대표에 출마할 생각이 있는 거냐' 물었더니 그냥 웃더라." 1년 만에 '한동훈 당대표'는 현실화됐다.
정치적 비전을 보여준 적 없는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의 미래는 아직 가늠하기 어렵다. 시중의 말처럼 이순신이 될수도, 원균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은 출사표를 던지며 김건희 특검법은 '악법'이고, 김건희 명품백 수수 의혹은 '몰카 공작'이라고 규정했다. 한동훈은 검사다. 검사 입장에서 악법과 공작을 두고 타협 가능성을 타전한다는 건 논리적 모순이다. '방탄 당대표' 자락을 이미 깔고 움직였다.
검사는 흑백의 논리로 세상을 본다. 무죄, 아니면 유죄다. 하지만 정치는 흑백 논리가 통하지 않는 영역이다. 나쁜 짓임을 알면서도 해야 할 때가 있고, 좋은 일임을 알면서 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 1년 전 한동훈 당대표 차출설이 나왔을 때 <대통령의 자격>을 쓴 윤여준 전 장관이 "정치하지 말라"고 충고한 이유다. 그는 한동훈 비대위원장에 대해 "다른 쪽으로 갔으면 크게 성장하고 나라에도 기여할 수 있는 좋은 인물 하나가 정치권에 들어와서 망가지는 건 하지 말라"며 "정치에 소질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이제부터 사람을 자르고(물갈이), 등용하는 일(공천)에 착수해야 한다. 하지만 대통령 직할 체제가 구축된 상황에서 누구를 자르고, 누구를 그 자리에 앉힐지 결정하는 건 한동훈이 아니라 대통령이라고 사람들은 믿을 것이다. 대통령이 직접 당의 차기 대권 주자 구도에 깊숙히 개입한 모양새가 된 것도 주목할 만한다. 누가 봐도 한동훈은 '대통령이 책봉한 차기 주자'로 대선을 3년 넘게 남긴 상황에서 이른 '대관식'을 마쳤다. 유승민, 홍준표 등 다른 주자들 입장에선 '불공정'한 일이지만, 역으로 '尹의 남자'의 빈틈을 노릴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
갈 길 먼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루쉰의 단편소설 <고향>에 나오는 유명한 글귀를 인용했다.
"세상의 모든 길은 처음엔 다 길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같이하면 길이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은 루쉰의 자전적 스토리를 바탕으로 한다. 폐허가 된 고향 마을을 완전히 떠나며 '변화의 바람'이 부는 바깥세상으로 나아가는 루쉰의 심경이다. 구습을 타파하지 못하는 고향을 안타까워하지만, 새로운 길을 나서는 주인공은 '희망' 앞에 문득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건넨 말이 이것이다.
루쉰은 낡은 걸 타파하고 그 자리에 새로움을 채우길 바랐다. 그런데 루쉰이 극복하고자 하는 그 모든 모순들이 윤석열 정부 곳곳에 박혀 있다. 그 정점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있다. 아큐의 '정신승리법'을 폐기하고 대통령을 변화로 이끌어야 하는 게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만들어야 할 '길'이 될 것인데, 궁금하다. 그는 새로운 길을 만들 수 있을까? 아니면 이미 만들어진 실패의 길을 '새로운 길'이라 착각하며 정신승리를 하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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