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독일의 나치 독재 시대에 히틀러에 저항하는 쿠데타를 계획했다가, 39살의 나이에 교수형을 당한 독일 신학자의 이름은 폭압적인 권력이 신격화되는 어느 곳에서나, 억압적인 불의의 현실에서 교회가 침묵하는 곳 어디에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지하게 물어지는 곳 어디에서나,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현실에서 하느님 없이 하느님 앞에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색되는 곳 어디에서나 오늘도 기억되고 있다.
1970년대 권위주의적인 개발독재 체제 아래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 때문에 저항과 고난의 길을 걸었던 한국 교회에게 본회퍼는 희망과 위로의 근원이었다. 만일 그가 살아남았더라면 전후 세계 신학의 풍경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는 고난 속에서 생성된 신학적 담론을 그의 짧은 삶만큼이나 단편적으로 남겨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과 글을 읽을 때마다 그는 폭력적인 독재 권력에 대해 지식인이, 특히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책임적인 저항을 해야 하는지 성찰하도록 도전한다. 히틀러 암살로 귀결될 것이 분명한 쿠데타 계획에 참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며 신학자인 그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의식하면서도, 동시에 감옥에서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그리워하고 긍정하는 모습은, 오늘의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죽음을 앞두고 갈등하는 자아와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 안에 있는 자아 사이에서 흔들리는 그는 오늘의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역사는 역주행하는가?
우리가 오늘, 본회퍼를 소환하는 이유는 그의 이름이 전투적인 극우 목사들에 의해 왜곡되게 인(악)용되기 때문만이 아니다. 한국교회가 본회퍼가 지적했던 '값싼 은혜'의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반공주의에 사로잡혀 생각이 다른 사람이나 집단을 빨갱이로 몰고, 성소수자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면서, 차별금지법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편 가르기, 배제와 차별, 증오와 탄압이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독재정권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보다는 권력(정치, 경제)친화적, 혹은 유착적 굴종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폐쇄적 민족주의와 졸부 의식에 사로잡혀 가난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 난민들에게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오늘 우리가 본회퍼에 주목하는 것은 세계의 도처에서 극우파들이 득세하고 있고(그리스의 극우정당 '황금새벽당', 이탈리아의 극우정당 '신권력당'을 비롯하여, 스페인의 '신 팔랑헤', 우크라이나의 '아조우 여단' 등이 대표적이다. 지난 11월 19일에 치러진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에서는 아르헨티나의 트럼프라고 불리는 하비에르 밀레이가 당선되었다), 나치 시대 본회퍼가 직면했던 여러 문제들이 새로운 형태로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빈부 양극화, 인종갈등, 지역 분쟁이 '네오파시즘'을 확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 역사학자 데틀레프 포이케르트가 그의 책, <나치 시대의 일상사 – 순응, 저항, 인종주의>에서 역사로서의 나치즘을 단지 지나간 과거로 묻어두지 않고, 끊임없이 현재로 소환하여 해석하는 것은 그가 독일 출신의 사학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역사가 과거와의 대화만이 아니라, 현재와의 대화라는 것은 모든 사학자의 공통된 이해겠지만, 나치즘을 다시 조명하는 것은 나치즘이 말살 정책으로 극복하려고 했던 인종주의, 성차별, 빈부양극화로 고통받는 '작은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 가운데 함께 있고, 이들에 대한 배제와 억압은 훨씬 더 정교해진 현실 때문이다. 홀로코스트를 가해자의 악마화, 피해자에 대한 연민으로가 아니라, 현대성과의 관계에서 오늘의 문제로 인식하는 길을 연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래서 '홀로코스트에 관한 가장 놀라운 소식은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아니라 우리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고 말한 것이다.
왜, 오늘 우리에게 본회퍼인가?
그렇다. 오늘 우리는 같은 역사를 되풀이 경험하고 있다. 카리스마적 연설과 선전이 나치의 무기였다면, 오늘의 가짜뉴스와 선동, SNS도 양극화와 적대감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한국사회를 여전히 지배하는 반공주의도 마찬가지다. 나치는 마르크스주의자, 공산주의자를 체제의 적으로 삼고 공개적이고 폭력적으로 말살했는데, 한국사회에서도 반공 이데올로기가 억압의 도구로 작동하고 있다. 반대자들을 빨갱이로 매도하는 공포정치는 이른바 '정치검찰 독재'의 체제 유지를 위한 무기로 작용하고 있다.
유대인, 장애인, 집시, 정치적 반대자 등에 대한 배제와 차별과 억압이 나치즘의 지배 방식이었다면, 성소수자,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야당에 대한 배제와 차별이 있는 현실은 나치즘이 오늘도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히틀러 시대에도 나치의 야만적 행위에 대한 정치적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외 현상이었지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대중의 무관심 혹은 무조건적인 지지, 일상적으로 벌어진 감시, 협박, 폭력이 없었더라면, 나치즘 독재는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다. 독일에서 전개된 유대인 억압에 맞선 어떤 정치적 저항도 일어나지 않은 이유, 적극적인 저항이 오직 예외적인 경우에만 일어난 까닭은 평범한 독일 서민들의 성공한 유대인들에 대한 시기심과 적대감, 독일의 경제적, 사회적 추락에 대한 책임을 부유한 유대인에게 전가하려는 희생양 사상 때문이었다.
경제위기가 심화되면 희생양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 희생양은 언제나 사회적 약자라는 것이 분명하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무관심, 혹은 책임 전가는 새로운 나치즘의 온상이다.
나치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독일 교회의 태도도 우리 상황에 빗대어 살펴봐야 한다. 사실 당시 교회는 '나치의 세계관적 전체주의의 주장을 벗어나거나 그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었다. 그렇지만 교회는 정치적인 저항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특히 개신교회는 강력한 독일적, 민족적 전통 때문에 처음부터 쉽게 국가사회주의에 기울었다.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지지는 곧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 무신론에 대한 거부를 동시에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신앙 고백'으로서의 저항
디트리히 본회퍼는 한국교회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그의 옥중서간을 모은 책 제목, <저항과 복종>이 나는 본회퍼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불의하고 억압적인 체제에 대한 저항, 그러나 그 저항은 정치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에서 비롯되고, 바로 거기에서 끝나야 한다는 것이다. 본회퍼가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에 반대하고 그들을 구출한 일, 교회를 강제로 통합하려는 나치의 탄압에 맞서 교회의 자유를 지킨 일, 정치적 지도자에 대한 충성서약을 거부한 일, 마침내 독재자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기도한 일은 이 모든 것이 '신앙고백의 문제'(status confessionis)이고, 하느님에 대한 복종의 문제이기 때문에 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가 자신의 죽음을 '영원한 자유의 도상에 있는 최고의 축제'로 생각할 수 있었으며, '죽으면서 죽음 자신을 하느님의 얼굴 속에서 본다.'고 할 수 있었겠는가!
(이 연재는 공공선 거버넌스(원장 강치원)에서 기획한 것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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