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외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는 현실주의적인 외교 노선을 확립하며 미국과 중국 간 수교를 통해 냉전 질서를 완화시키는 성과를 거뒀지만, 반공산주의를 철저히 관철하면서 1970년대 좌파 정권을 교체하는 공작 등으로 인권 등 보편적 가치보다는 미국의 기업과 국익에만 치우쳤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29일(이하 현지시각) 미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는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미국 코네티컷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닉슨과 포드 대통령 행정부에서 미국 외교 정책에서 권력을 갖고 이후 수십 년 동안 고문과 작가로 활동했던 정치인이자 외교관인 키신저가 29일 코네티컷에 있는 그의 집에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키신저 전 장관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동시에 역임한 유일한 인물"이라며 "미국 외교 정책의 통제권을 행사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신문은 "키신저 박사는 공직생활에서 대부분 사람들의 꿈을 뛰어넘는 권력과 명성, 부를 얻었다"며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면서 마지막 수십 년을 본인의 자리를 지키는데 보냈다"고 설명했다.
신문은 1973년 중동 전쟁 이후 키신저 전 장관이 벌인 "셔틀 외교"에 대해 "이스라엘과 아랍 이웃 국가들의 관계를 안정시키는데 도움"이 됐으며 닉슨 행정부 당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 추진한 수교는 "세계 정세의 방향을 바꾸는"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대표적인 '현실주의자'로, 가치보다는 현실을 중시하는 '레알폴리티크'(Realpolitik, 현실정치)을 기반으로 대외 정책을 펼쳐 나갔다. 그의 이러한 관점이 있었기 때문에 냉전 시대 중국과 수교가 가능했고, 이후 미국과 소련‧러시아 간 관계도 달라질 수 있었다.
신문은 "1975년 7월 망명한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을 백악관에서 만나지 말라고 포드(당시 대통령)를 설득한 것도 가치보다 전략적 이익을 앞세우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준다"며 "솔제니친은 소련의 압제에 저항한 상징이었지만, 키신저는 러시아와의 데탕트 정책에 부정적인 영향을 우려했다"고 전했다.
러시아 매체 <스푸트니크> 통신은 키신저 전 장관이 "소련과 미국 사이 데탕트(detente, 평화적 공존) 정책을 개척"했다며 올해 5월에도 "러시아와 대화를 믿는다"고 말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매체는 키신저 전 장관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관련 "러시아가 크림반도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우크라이나 분쟁이 외교적으로 해결될 것을 요구했다"며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에서는 표적이 되기도 했다고 전했다.
매체는 "키신저 전 장관은 우크라이나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회원국이 되기를 바란 것은 심각한 실수라고 생각했다"며 "서방이 유럽 내에서 가장 전략적으로 경험이 적은 지도력을 가진 나라(우크라이나)를 유럽에서 가장 잘 무장된 나라로 만들었다고 경고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매체는 "키신저 전 장관은 유럽 지도자들에게 러시아가 유럽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놓치지 말 것을 거듭 촉구하면서, 우크라이나 분쟁 종식 후 새로운 세계 질서에 모스크바가 없는 것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덧붙였다.
이같이 현존하는 세력을 인정하고 그에 맞춰 미국의 전략을 세우고 실행하는 키신저 전 장관의 정책은 미국 내 보수 진영에서 미국의 가치와 다르다며 비판을 받기도 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로널드 레이건(전 대통령)과 다른 보수주의자들은 키신저가 모스크바와 협력하려는 것은 당시 바르샤바 조약에 가입한 국가들과 미국의 가치에 대한 배신이라고 비판했다"며 "반면 조지 W. 부시 (아들 부시 대통령)은 키신저를 가장 성공적이고 존경받는 공무원 중 한 명이라며 당시 행정부의 고위 관리들은 수시로 그에게 국제문제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고 전했다.
키신저 전 장관의 활동 중 또 하나의 중요한 축으로 공산주의 흐름을 막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정권 교체를 포함한 갖가지 공작을 벌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좌파 세력에게도 비판을 받아 왔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키신저 전 장관이 일부 외교 분석가들 사이에서는 "전쟁범죄자"로 여겨지고 있다면서 "동티모르 침공에서 인도네시아의 군사 독재자를 지지했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백인우월주의 인종차별정책) 정권에 의한 앙골라 침공을 지지했으며, 민주적으로 선출된 칠레 대통령을 타도하기 위해 중앙정보국(CIA)과 협력했다"고 지적했다.
신문은 키신저 전 장관이 닉슨 행정부 시절 기자들과 공무원들의 도청을 승인했고 1969년과 1970년 캄보디아에 대한 비밀 폭격을 포함한 베트남 전쟁과 관련한 중대한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소개했다. 신문은 이에 대해 "닉슨이 말한 '미치광이 전략(광인이론)'의 일부였는데, 미국 대통령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라고 북베트남이 믿게 하려는 시도였다"고 설명했다.
신문은 특히 "좌파 세력에서는 CIA가 살바도르 아옌데 칠레 대통령 타도를 선동한 것과 관련, 그의 기록이 남아있는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며 "닉슨과 키신저 전 장관은 파키스탄의 수십만 명 학살을 외면했다"고 전했다.
키신저 전 장관이 베트남전쟁 종전 협상인 파리 평화협상을 이끌어낸 공로를 인정받아 197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데 대해서도 문제가 제기됐었다. 당시 협상 상대인 베트남의 레둑토와 공동으로 평화상을 수상했지만, 레둑토는 베트남에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다며 상을 거부하기도 했다.
<가디언>은 "키신저 전 장관이 1969년 캄보디아에 대한 닉슨의 폭격을 지지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1973년 평화상은 노벨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상들 중 하나가 됐다"며 "두 명의 노벨 위원회 위원은 이 결정으로 인해 사임했다"고 보도했다.
베트남 전쟁과 관련 <워싱턴포스트>는 "그(키신저)를 비판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파리협정이 동맹국인 남베트남 정부를 암울한 운명에 빠뜨렸다고 말했다"며 "처음부터 기약없는 협상을 하는 동안 3년이 지나도록 전쟁 상태가 계속되도록 내버려 두었다고 비난했다"고 전했다.
신문은 "좌파 세력은 그가 인권보다 국가의 전략적 이익을 앞세운 냉혈한 실용주의자라고 비판했다"며 "이들은 키신저 전 장관이 미국의 목표를 진전시키기 위해 공개적이든 비밀리에 진행하든 힘을 사용하려 했고 인도주의적이고 인권적인 고려는 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고 전했다.
한편 키신저 장관은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도 현실적인 접근으로 여러 아이디어를 밝힌 바 있다. 일례로 그는 1970년대 미국과 일본이 북한을, 중국과 소련이 남한을 각각 승인하는 '교차 승인' 구상을 내놓으며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을 제안한 바 있다. 1991년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은 이뤄졌으나 교차 승인은 미국과 일본이 북한과 수교를 맺지 않으면서 아직도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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