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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신화 만들기'는 어떻게 '파시즘'을 잉태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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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신화 만들기'는 어떻게 '파시즘'을 잉태했나?

[파시즘의 어제와 오늘] 루터와 히틀러의 영웅 신화

1. 19세기에서 세계 제1차 대전까지의 독일 상황과 루터 영웅화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세력을 넓히는 가운데 1806년 8월에 신성로마제국이 막을 내린다. 그해 10월에 일어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프로이센은 1807년 7월의 쾨니히스베르크 협정과 1808년 9월의 파리 협정으로 인해 엄청난 전쟁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바로 이 두 협정이 맺어지는 사이에 피히테는 베를린에서 '독일민족에게 고함'이라는 강의를 하며 독일 민족 국가의 출현을 강하게 표방한다. 이 갈망은 1813년 10월 18일에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이기며 질풍노도처럼 퍼져나간다. 매년 이 전쟁승리를 기념하는 행사는 감사의 예배와 함께 애국심을 고무하는 내용으로 가득 찼다. 그 대표적인 예가 1817년 10월 18일에 열린 '바르트부르크 대학생 축제'다.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에 95개 조항을 세상에 알린 뒤 300년이 되는 것과 라이프치히 전쟁승리 4주년이 되는 것을 함께 기념하기 위해 모인 이 축제의 개최지가 바르트부르크라는 것은 의도된 선택이다. 이곳은 루터가 교회로부터 파문을 받은 자로,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추방된 자로 숨어 지낸 곳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을 후대의 독일 지성인들은 외세의 지배에 저항하는 민족적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바르트부르크성을 '루터 성', 또는 '모든 독일 성 중에서 가장 독일적인 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독일의 소국 분립주의에 반대하며 독자적인 헌법을 가진 민족국가 설립을 호소하는 '바르트부르크 대학생 축제'에서 루터는 불굴의 용기로 어둠의 세력에 맞서 싸운 영웅으로 등장한다. 일부 참가자들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르텐베르크에서 계획된 승전기념 장작불 축제에 참여한다. 여기에서 1520년 12월에 루터가 비텐베르크의 엘스터 문밖에서 교황의 파문위협교서와 교회법을 태운 것을 언급하며 나폴레옹 법전을 비롯해 막 시작하는 독일 민족 운동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 서적들의 목록을 불에 태운다. 이렇게 하여 루터는 독일 민족 운동의 선구자요 주춧돌로 등장한다.

루터 영웅 만들기는 루터 탄생 400주년을 맞는 1883년에 더욱 극대화된다. 그 배경에는 1870-71년에 있었던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과 1871년의 독일제국 탄생이 있다. 독일 민족에 대한 자긍심이 고조된 가운데 열린 이 행사의 기념연설('루터와 독일 민족')은 교황의 파문위협교서를 불태우고, 교회와 제국 개혁의 고삐를 독일 민족의 그리스도교 귀족에게 쥐여주고, 세속정부의 독자성을 강조하며 정치 해방을 부르짖고, 표준 독일어를 완성하여 독일 민족에게 통일된 하나의 언어를 선물하고, 황제와 제국 앞에 선 민족의 지도자(Führer) 역할을 한 루터를 게르만인의 용기를 가지고 세상과 맞서 싸운 민족의 영웅으로 칭송한다. 여기서 '게르만'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도 영웅 신화를 극대화하려는 것이다. 바로 한 달 전인 9월 28일에 뤼데스하임에 독일제국의 건립을 기념하는 '니더발덴 동상'이 세워졌는데 이 동상의 주인공이 독일을 상징하는 여신 '게르마니아'이기 때문이다.

독일 민족의 영웅 루터는 1914년에도 강력하게 등장한다. 8월 1일에 제1차 세계대전을 위한 군사동원령이 황제에 의해 발표될 때 무엇보다 먼저 진행된 것이 루터의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부른 것이다. 이후 전쟁 기간 내내 루터의 이 저항 찬송가는 일종의 군가로 불리며 전장을 오갔다. 1917년에 있은 종교개혁 400주년 기념행사에서 루터는 독일 민족을 외국의 영적 속박으로부터 해방하는 일에 첫 번째 강력한 발걸음을 내디딘 자로 등장한다. 두 번째 발걸음을 내디딘 자로는 루터의 유산을 정치적으로 성숙하게 만든 비스마르크가 언급된다. 세 번째 발걸음은 전쟁에 승리하여 그리스도교를 독일화해야 하는 독일 민족의 몫이라 호소한다. 그리스도교의 독일화란 구약적이고 유대적이고 가톨릭적인 영향들을 제거하고 그리스도교와 독일 정신을 통합한 독일 그리스도교를 세우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루터가 독일적인 본질을 가장 잘 대변하는 자로 자리매김한다는 것이다.

2. 루터와 히틀러 영웅화

19세기 이후 진행된 루터의 영웅화는 1933년 나치당이 정권을 잡은 이후 히틀러를 루터와 동일한 영웅의 자리로 올리는 데 여지없이 사용된다. 1933년 11월 10일, 루터 탄생 450주년을 맞아 준비한 '루터의 날'(Luthertag) 기념행사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실제로는 19일에 행해진 이 기념행사를 위해 많은 포스터들이 만들어졌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루터의 초상화 뒤로 나치 십자가를 그리고 '히틀러의 투쟁과 루터의 가르침은 독일 민족을 위한 최선의 방어책'이라는 글이 들어간 것이다. 히틀러를 루터와 동일 선상에 놓으려는 이러한 시도는 '독일국가교회'의 핵심 멤버요 반유대주의에 앞장섰던 지그프리드 레플러 목사의 연설에도 여지없이 나타난다.

"우리는 마르틴 루터 없이 아돌프 히틀러를 생각할 수 없다. 반대로 아돌프 히틀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루터가 행한 것은 400백 년 뒤 독일을 위해 온전히 성취되지 못했을 것이다."

히틀러 또한 루터와 같은 위치의 영웅으로 만들려는 정치적 프로파간다는 1933년 '루터의 날' 기획책임자의 입에서도 나온다. 그는 루터가 히틀러를 만난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라고 설정한다.

"고맙소, 너 독일 남자여! 너는 내 피에서 난 피요 내 종에서 난 종이다. 우리 둘은 정말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존재다!"

그런데 당시의 사람들이 정말 루터를 히틀러보다도 더 권위가 있는 독일의 지도자(Führer)로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러한 예를 '루터의 날'을 취재하고 보도한 문화담당기자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11월 19일 자 <Berliner Morgenpost>에서 "단 한 사람만이 독일 사람이었다면 그는 바로 마르틴 루터다."라는 말로 자기 기사를 시작한다. '그 독일 남자' 히틀러는 이제 '그 한 사람' 루터와 함께 독일을 외세의 영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자로 등극한다. 한 발 더 나아가, 독일국가교회의 주교가 된 루드비히 뮐러는 루터탄생 450주년 기념행사 공지(10월 26일)에서 "우리의 인도자 아돌프 히틀러를 통해 우리 백성을 구원한 것을 하나님의 손에서 온 선물"이라며 히틀러를 구원자로 칭송하며 그의 '정부'를 지지하고 따르는 것을 "하나님에 대한 순종"으로 선언한다. 1523년에 출판한 『세속 정부에 관하여』와 1525년에 발표한 '살인적이고 약탈적인 농부 일당에 반대하여'라는 글에서 거듭 밝힌 '세속 정부'에 순종해야 한다는 루터의 말을 환기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부'라는 말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독일 민족의 영웅 루터는 나치의 유대 정책에도 여지없이 사용된다. 1938년 11월 10일, 루터 탄생일에 유대교 회당들이 불에 탄다. 반유대주의 운동의 선봉장에 섰던 튀링엔의 주교 마르틴 자쎄는 이 회당 방화를 종교개혁시대의 "가장 위대한 반유대주의자"요 독일 민족에게 반유대주의를 촉구한 "16세기의 독일 예언자"로 칭송하는 루터를 소환하며 정당화한다. 여기서 그는 "그 남자의 소리"가 들려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루터가 1543년에 출판한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에 관하여』에서 내놓은 첫 번째 요구사항을 의미한다. 바로 유대인의 회당과 학교를 불태우라는 것이다.

나치의 반유대주의 운동과 독일 민족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한 루터가 어느 정도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지는 1946년에 있었던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도 읽을 수 있다. 반유대적 활동 때문에 피소된 율리우스 슈트라이허가 위에 언급한 루터의 책을 들먹이며 "이 책을 심문자들이 들여다보았다면, 오늘 피고석의 내 자리에 분명 마르틴 루터가 앉아 있을 것입니다.(…) 루터는 그들의 회당을 불태워 무너뜨리고 파괴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라고 언급하기 때문이다.

3. 영웅 신화 벗기기

19세기 초에 전 유럽에서 시작된 민족 및 영웅 신화 만들기는 민족 운동이 싹을 내리던 독일 지역에서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독일의 지성인들은 종교개혁자 루터를 외세와 싸우며 독일적인 것을 심은 민족의 영웅으로 치켜세웠다. 이 움직임은 나치 정권에서 더욱 극대화되어 히틀러를 영웅으로 만드는 데 적극 활용된다. 이 과정에서 루터의 영웅화와 그 정치적 사용은 그의 원래 의도가 와전된 것이라는 지적이 학자들 사이에서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목소리는 민족 운동을 파시즘적으로 끌고 가는 자들의 치밀한 선동과 과격한 행동에 묻힐 수밖에 없었고 대중적 지지를 끌어낼 수 없었다. 그 명백한 이유를 전후 독일교회를 새롭게 재건할 때 있었던 '슈투트가르트 선언'(Die Sttutgarter Erklärung)에서 엿볼 수 있다. 독일 교회를 대표해 죄 고백을 한 이 선언은 나치의 폭력정권에 대항하여 싸웠지만 "더 용기 있게 고백하지 못했고, 더 신실하게 기도하지 못했고, 더 기쁘게 믿지 못했고, 더 뜨겁게 사랑하지 못한 것"을 자신들의 잘못으로 고백한다. 루터의 영향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선언이다.

그는 교회가 해야 하는 영적인 일에 세속 정부가 관여한다면 말이나 고백을 통해 저항할 수는 있지만 행동으로, 특히 무력을 사용해 저항할 수는 없다고 못 박았다. 이 말은 본회퍼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곤 나치의 파시즘적 이데올로기 선동과 반인륜적인 만행에 저항의 몸짓이 일어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였다. 심지어 말로도 고백으로도 저항하지 않고 침묵하는 풍토를 만들었다. 이런 면에서 루터는 비판받아야 한다. 이런 비판을 진지하게 하며 루터의 영웅 신화를 벗겨낼 때 역사는 모든 종류의 파시즘 운동에 저항하는 문화를 만들 수 있다.

▲선동적인 연설을 연습하는 히틀러. ⓒvictoriarossi.livejournal.com

(이 연재는 공공선 거버넌스(원장 강치원)에서 기획한 것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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